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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국 목사
한번은 베드로가 예수님께 질문 하였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 마태복음 18:21.
그때 예수님께서는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한 말씀은 그 당시 제자들에게 충격적인 말씀이 아닐 수 없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의 사고 방식은 네번째는 용서해 주지 않아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배워왔기 때문이다. 유명한 랍비 호세벤하니나는 말하기를 “이웃에게 용서를 구하는 자는 세번이상 용서해 달라고 하지 말것이다. 네번째에는 용서해 주지 말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는 원칙을 구약 성경 아모스서에 그 근거를 두었는데, 하나님께서 예루살렘과 그 이방 도시들에게 세번 경고 하신후 네번째 무시했을 경우에는 그들의 죄 때문에 심판하셨다는 기록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그 랍비의 가르침보다 훨씬 더 너그럽게 일곱번까지 용서하겠다고 말하고는 칭찬을 기대하고 있다가, 오히려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충격적인 말씀을 들은 것이다.
그렇다면 그 말씀은 490번까지만 용서하라는 뜻이었을까? 물론 아니다. 그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참으신 하나님의 무한한 인내와 용서를 상징하는 말씀이었다. 예수님의 그 말씀은 신약 전체에 흐르고 있는 신앙 사상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으며, 더 나아가서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까지 말씀하시었다 (마태복음 5:7; 6:14,15). 야고보는 말하기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라고 말씀하였다 (야고보서 2:13). 이러한 모든 말씀들을 미루어 보아 우리가 남을 용서해 주는지 또는 용서해 주지 않는지의 태도가 우리의 구원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실을 보게 된다.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하자면, 우리의 용서의 태도는 우리가 하나님과 구원의 관계에 있는지 없는지를 판가름하는 기준 가운데 하나이며, 또한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인 경험이 있는지 없는지 즉 거듭난 사람인지 아닌지를 나타내 주는 표현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이해하고 나면 용서의 문제가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예화를 읽어 보면 우리는 큰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게 된다. 함께 읽어 보도록 하자.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회계 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대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마태복음 18:23-35
우리가 이 예화 가운데 나오는 돈의 수치를 계산하여 보면 그 의미가 훨씬 심각하게 우리에게 다가오게 된다. 그 당시에 한 달란트는 한 젊은 사람이 받는 한달 봉급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현재 싯가로 약 1,500불 혹은 한화로 약 100만원 가량 된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다. 용서 할 줄 모르는 그 종은 10,000 달란트 즉, 1,500만 달라의 빚을 임금에게 지고 있었다. 그 말은 다시 바꾸어 말해서 1,000년 동안 일을 해도 벌 수 없는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그 당시 달란트란 금의 무게를 환산한 것이었는데, 10,000 달란트를 들고 가려면 8,600명의 장정이 한사람 당 30킬로 그램씩 들고 가야 할 정도의 어마어마한 무게였다. 그 당시에 갈릴리 지방의 일년 예산이 약 600달란트가 고작이었다고 한다. 그 종은 이토록 엄청난 액수를 자기 임금에게 빚을 지고 있었다. 그는 자기와 자기 처자들을 모두 합하여 일평생 동안 종노릇해도 갚을 수 없는 큰 빚을 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빚을 갚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임금에게로 부터 용서를 받는 길 밖에 없었다. 그래서 왕은 그를 불쌍하게 여겨 그의 빚을 탕감해 주고 그를 용서해 주었다. 그 종은 자기의 빚의 크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나머지 참아 주시면 갚겠다고 말한 사실을 볼 수가 있다.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이 예화는 우리가 지은 죄는 하나님의 용서의 방법 밖에는 갚을 길이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시기 위하여 기록된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심에서 부터 출발한다. 우리는 우리의 의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 아무리 우리가 많은 선을 행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의를 살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갚없이 믿음으로 받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행함과 태도 곧 우리의 성품이 우리의 구원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 빚졌던 종이 왕에게서 용서 받은 후에 자기가 남에게 행한 자기의 태도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된 사실을 우리는 보게 된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왕에게 큰 빚을 용서 받았다 하더라도 자기가 다른 형제에게 행한 자기의 행함이 잘못되었을 때에는 그 빚을 전혀 용서 받지 못한 것처럼 취급을 받고 형벌에 처하게 된 사실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용서의 복음을 받아들인 우리의 삶의 태도가 우리의 구원의 운명을 결정지어 주는 것이다.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종의 태도를 보라. 엄청난 용서를 받고 나오던 그 종이 자기에게 100 데나리온을 빚진 형제를 만났다. 그 돈은 현 싯가로 약 20불쯤되는 액수였다. 누구든지 갚을 수 있는 적은 돈이었다. 그래서 그 빚진 형제가 조금만 참아 주면 갚겠다고 엎드리어 사정하였다. 그러자 용서 받은 종이, 지금 당장 갚으라고 어름장을 놓으며 그를 감옥 속에 쳐 넣고 말았다. 이 사실을 보고 있던 다른 종들이 임금에게 그 일을 고하게 되고, 급기야 노한 왕은 그를 다시 불러들여 빚에 대한 용서를 취소하고, 그를 감옥에 던져 넣어 심판하는 장면으로 그 이야기는 끝을 맺고 있다.
이 예화에서 우리가 짚고 지나가야 할 중요한 교훈이 있다. 내용을 잘 살펴 보면 왕이 그 신하를 정죄한 것이 아니다. 그 신하 자신의 태도와 성품이 자기 자신을 정죄한 것이다. 우리의 구원의 경험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를 믿었을 때 이미 우리는 우리의 모든 죄들을 용서 받았다. 우리는 도저히 죄 사함 받을 길이 없는 엄청난 죄들을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과 그 크신 십자가의 희생을 통하여 용서를 받은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우리의 생애와 품성에 따라 우리는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을 무효화 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정죄하신다기 보다는, 우리의 생애 자체가 “우리는 구원 받을 자격이 없다”고 우리 스스로를 정죄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용서는 용서 받는 죄인의 심령에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 회개라고 하는 것은 그 죄를 깊이 뉘우치고 후회하며 다시는 그러한 일을 행하지 않고 돌이켜서 반대 방향으로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은 너무나 뜨거워서 인간 속에 있는 모든 죄들을 태워 버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죄인의 마음을 녹여서 부드럽게 하고 새로운 심령을 갖도록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마태복음 18장의 그 예화는 다음과 같은 말로 그 끝을 맺고 있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렇게 하시리라.”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은 조건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드린 후에 나타나는 우리의 태도는 우리의 구원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대로 갚으리라”고 말씀하셨고, 사도 바울은,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말씀하였다(마태복음 16:27; 고린도 후서 5:10). 우리의 성품은 하나님의 용서를 올바로 받아 들였는지 아니했는지를 보여 주는 척도인 것이다.
그대는 가족들과 이웃들의 잘못과 죄를 중심으로 용서해 주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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