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중달교수의 역사칼럼(53)
권중달
중앙대 명예교수, 삼화고전연구소 소장
爲子孫奴耶
자손의 노예가 될 것인가?
부모가 자식을 걱정하고 그 앞날을 위한 토대를 만들어 주려는 것은 예나 오늘이나 다를 바가 없다.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인물인 맹자(孟子)를 말할 때면 떠오르는 말이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이다. 맹자가 어렸을 때 그 어머니가 자식을 위하여 계속하여 옮겨 다녔다는 이야기이다.
이는 전한(前漢)시대 경학(經學)의 대가라 할 유향(劉向)이 편찬한 열녀전(列女傳)에 실려 있다. 맹자의 어머니는 아들 맹자를 데리고 처음에 묘지(墓地) 근처에 살았는데, 어린 맹자가 보고 배우는 것이 장사지내는 것이어서 시전(市廛)이 가까운 곳으로 옮겼다. 그런데 이번에는 맹자가 상인이 물건 팔고 있는 모습만 배우자 다시 서당(書堂) 주변으로 이사했다. 그제야 맹자가 글 읽는 것을 배웠고, 그래서 맹자는 훌륭한 인물이 되었다는 말이다. 어머니가 아들을 위하여 제대로 교육 시키려고 노력하였고, 그것이 성공한 경우의 대표적 예로 회자 된다.
오늘날 우리나라 부모가 자식 교육을 위하여 맹모(孟母) 이상으로 이사 다닌다. 그런데 문제는 부모가 자식을 위하여 교육의 전당인 학교 근처로 이사 가는 것이 아니라 교육을 돈벌이로 생각하는 학원이 있는 곳으로 간다. 그래서 개학이 가까워지면 좋은 학원이 있다는 강남으로 사람들이 몰리고, 그래서 집값 또한 덩달아 올라간다.
이것도 맹모에 비교할 수 있을까? 요즈음 많은 부모들은 학원 근처로 이사 간 다음에 자식에게 쉴 틈을 주지 않고 하루에 몇 군데의 학원을 거쳐서 한밤중에야 집에 오도록 한다. 많은 시간을 들여서 많은 것을 배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이 지나쳐서 아이들이 이른바 ‘창의력’이 없는 ‘암기’에 그치게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것이 정말 자식을 위한 것일까?
역사 기록 속에서도 부모가 자식에게 무엇을 남겨 주어야 할지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속자치통감에는 금(金)의 태보(太保)이고 도원수(都元帥)인 완안앙(完顔昂)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당시에 금나라는 남송을 압박하여 해마다 세폐(歲幣)를 받고 있었고, 완안앙은 그렇게 강한 나라의 황족이고 높은 관직까지 가졌으니 돈이건 권력이건 자식에게 물려 줄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을까?
사실 안완앙의 삶도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그는 원래 금왕조를 개국한 금 태조(太祖)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를 따라서 전쟁에 나가서 여러 차례 큰 공적(功績)을 이룬 사람이다. 그런데 도중에 같은 황족인 완안량(完顔亮)이 황제인 희종(熙宗)을 죽이고 스스로 황제가 된 사건이 벌어진 어려운 시기를 맞았다. 완안량은 자기가 저지른 일이 있는지라 자리가 불안했던지 툭하면 사람을 죽이는 폭군이 되어갔다. 이런 정치적 변동기에는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그 운명이 결정된다. 이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는 암기(暗記)한 지식 속에는 없다. 사태를 잘 못 파악하면 황족이기 때문에 새 황제가 자기의 경쟁자로 알고 죽일 수도 있다. 반대로 새 황제에게 아첨하면 출세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완안앙의 부인은 쿠데타를 일으킨 완안량의 이종사촌 누이인 대씨(大氏)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완안앙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집안 동생인 완안량이 황제로 있던 10여 년 동안 술독에 빠져 사는 사람이 되었다. 술을 한 번 마시기 시작하면 깊이 취하여서 며칠 동안 깨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이렇게 폭주(暴酒)한다는 소식이 새 황제인 완안량에게 전해지자 그를 불러서 단단히 주의하였다. 그러나 완안앙은 틈만 있으면 예전처럼 술을 마시면서 조금도 고치지 아니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황제 완안량은 남송을 다시 공격하려고 군사를 일으키고 직접 전방에 나아갔다. 이 틈에 완안량의 독재와 만행에 진저리를 내던 사람들이 경사에서 쿠데타를 일으켰다. 사람들은 태조 완안아골타의 손자인 세종(世宗) 완안옹(完顔雍)을 옹립하여 황제로 추대한 것이다. 한편 전선에 나가 있던 황제 완안량은 부하들의 손에 목이 베였다.
세상이 바뀌자 완안앙은 양주(揚州)에서 경사로 돌아왔다. 모처럼 집에 온 완안앙을 보자 부인 대씨는 그가 술을 좋아하는 것을 아는지라 술을 준비하고 술자리를 마련하였다. 그런데 완안앙은 술 몇 순배를 돌리고서는 더 이상 마시지 않고 누어버렸다. 이렇게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하는 남편을 보고 대씨가 그 이유를 물었다.
완안앙은 말하였다. “나는 본래 술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지만, 지난번에 술로 스스로 아둔한 척하지 않았다면 나는 오래전에 그대의 동생인 황제 완안량에게 죽었을 것이요. 지금 밝은 시절을 만났으니 마땅히 스스로 아껴야 하니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이요.” 그에게는 술을 먹으며 자신을 감추었던 것이 완안량 시절에 살아남는 방법이었다. 불가근불가원의 폭군인 완안량 시절에 살아남는 방법을 알아차린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이렇게 지혜 있는 사람이라면 자식을 위하여 최고의 선택을 했을 것인데, 보통 사람과는 다르게 자신의 재력과 지위를 자식에게 남기려 하지 않았다. 자식보다는 그보다 못한 형제를 도와주어 화목하게 지내며 특히 친족(親族) 중에 빈곤(貧困)한 사람이 있으면 넉넉하게 주었다.
이러한 행동을 본 어떤 사람이 완안앙에게 그 자손의 장래를 위하여 계획을 세우라고 권고하였더니, 그의 대답은 의외였다. “사람은 각기 운명이 있는 것이며, 다만 그가 자립(自立)할 수 있게 할 뿐이지 어찌하여 자손의 노복(奴僕)이 되기에 이를 것인가!”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살아 온 완안앙은 자기가 모은 재산을 남겨 주기보다는 재산을 어떻게 쓰는 것이 보람 있는 일인지를 가르쳐 주었고, 보이지 않게 이웃이라는 울타리를 만들어 준 것이다. 이것이 자식을 위한 지혜가 아닐까? 자기도 자식의 노복이 되지 않고 자식도 제힘으로 살아가게 한 것이다.
지금 맹모(孟母)처럼 야단법석인 사람들의 행동은 정말 자식을 위한 것일까? 그렇게 극성스럽게 했지만, 혹 창의력 없는 자식을 길러내어 물고기를 잡아 주어야 겨우 살 수 있는 무능력한 자식을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부모라면 자식을 위하여 자신이 죽을 때까지 봉양해야 하는 노복으로 전락하겠지만, 그것을 감수한다고 하여도 자기가 죽고 나서 남겨진 자식은 어떻게 살아갈까?
지금부터 1천 년 전에 살았던 완안앙도 이미 자식을 위하여 어떻게 하는 것이 물고기를 낚을 수 있게 하는 것인지를 알았는데, 스스로 학벌을 자랑하는 오늘날 우리의 많은 맹모들은 스스로 모르는 사이에 노복이 되어 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
첫댓글 좋은 사론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완안앙의 경우 역사가의 서술이 그를 평가함에 크게 작용한 듯합니다. 자신을 감추기 위해 술에 숨었다는 표현이 좀처럼 실답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식의 노예가 아니라 자식과 부모간의 끈이 끊어지지 않음을 더욱 소중하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역사의 지속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의 현상을 개인의 전기에서 읽으려는 의미가 얼마나 있을런지요? 이에 대한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