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점
정천면 봉학리에 마조마을이 있다. 진안고원길 제7구간과 제8구간 사이의 시작점이자 종점이다. 며칠 전(2월 1일) 진안고원길 10차 총회 때 심원재를 넘어 칠성대를 향하는 자작나무 가로수길을 걸으러 갈 때 통과했었다.
운장산 기슭에 있으며 매우 깊은 곳에 있어 정천면의 중심지역은 아니었지만 풍부하고 맑은 계류수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마을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마조의 이름이 궁금하다.
지명총람에는 매우 소략하고 불충분한 설명이 있을 뿐이다.
가리점[마조리]【마을】학동 서쪽에 있는 마을. 전에 나무 가리점이 있었음.
마조리(麻造里)【마을】→가리점.
한자 표기는 ‘삼 麻’를 썼다. 麻造여서는 뜻이 통하지 않으므로 진안 향토문화백과사전 등은 麻를 ‘갈 마(磨)’의 잘못으로 비정하고 ‘갈아서 만든 그릇 종류(?)를 팔던 마을’이라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아직까지는 이 해석이 지배적인 것으로 안다.
전국적으로 가리점·가리점골 등의 이름을 가진 마을은 꽤 많은데, 그렇다면 그 많은 가리점들이 돌을 갈아 그릇을 만들었을까?
돌을 갈 수 있으려면 엄청난 기술이 필요하다.
평면으로 갈아내는 것도 아니고 그릇이라면 원통형이나 발형(鉢形)이어야 하는데 과연 그런 선반(旋盤)이나 녹로(轆轤, 로꾸로)시설이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기원전 23세기에 이미 돌을 갈아 만든 화병이나 그릇을 사용했다고 한다.
그때는 황금가면으로 유명한 '투탕카멘'의 시대였으므로 충분히 그런 기술이(비록 수작업이었겠지만) 있었을 것으로 고고학계는 추정하고 있다.
당시라면 우리나라도 고조선시대(청동기)에 해당하므로 이 땅의 선조들의 기술력을 의심하거나 폄하하지는 않지만, 전해지는 유물이 없으므로 일단 없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돌로 만든 그릇(?)으로는 확 정도뿐으로서, 식기로 쓰는 매끈한 돌그릇은 없었다.
그리고 확은 곡식을 찧거나 가공하기 위해 빻는 용도로 쓰이므로 표면이 거칠다.
정으로 쪼아내어 만들지 곱게 갈지는 않았던 것.
우리말의 ‘가리’는 몇 가지 의미를 동시에 가진 낱말이다.
동사 ‘갈다’의 명사형인 것은 이미 짚었다.
명사로서는 우선, 솔잎이 떨어져 마른 것을 칭한다. (솔)갈비 또는 가리라 했다. 지역에 따라 ‘소깝(솔에서 ㄹ이 탈락)’이라 부르기도 한다. 긁어모아 연료로 쓰면 불이 잘 붙고 불꽃이 사그라진 후에도 불똥으로 오래 남아있어서 감자나 고구마 등을 굽기에 좋다. 약간의 상품가치도 있으므로 한 짐씩 지고 나가 장에서 팔기도 했다.
다음으로, ‘칼’의 고어이다.
우리말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격음화·경음화 현상을 보여 왔는데 칼도 그 중 하나로서 옛날에는 ‘갈, 가리’였다.
(‘코’도 고어에서는 ‘고’였다.
짐승이나 사람의 코도 '고'.
끈의 양쪽 끝을 동그랗게 만들어 나비 모양으로 묶을 때 그 동그란 고리 부분도 ‘고’라 한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고를 내어 묶어야 나중에 풀기 쉽다”고 부모님들이 말하곤 했는데 그 ‘고’도 수십 년 사이에 ‘코’로 격음화했다. )
위에서 살핀 대로 일단 돌그릇은 아니라고 젖혀 두자.
그러면 솔갈비를 파는 동네였을까, 쇠칼을 파는 마을이었을까?
소나무 갈비(가리)라면 굳이 그 마을의 특산이랄 것도 없다. 누구나 자력으로 채취할 수 있고 흔한 것이므로.
남은 것은 칼.
얼마 전 ‘전북가야’의 전령 곽장근 교수(군산대 가야문화연구소장)는 고대 전북가야가 제철 왕국이었음을 여러 증거로 주장했다. 발제에는 없었으나 “운장산이 철광석의 덩어리”라던 언급이 오래도록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를 확인할 방법이 있을까?
칠성대로 통하는 자작나무 숲길을 걷기로 한 총회의 사이드 이벤트가 내게는 좋은 기회였다.
그리고 그 계곡에서 벌겋게 녹슨 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 확신하게 되었다.
마조마을(가리점)은 ‘갈 짓는(造) 마을’ 즉 쇠로 칼(갈, 가리)을 생산하던 대장장이들의 동네였다!
‘가리’라는 고유어의 뜻을 ‘갈다[磨]’에 국한하여 파묻혀 있어서는 풀리지 않았을 것이다.
또, 거기에 ‘삼 麻’를 쓴 옛 사람의 실수까지 겹쳐 이렇게 오래도록 골치를 썩인 셈이었다.
제철작업에는 많은 물이 필요하다. 장수 대적골 제철유적에도 작업장 바로 옆으로 풍부한 물이 흐르고 있었다. 마조마을을 관통하는 마조천의 맑은 물은 운장산에서 캐낸 철광석을 제련하고 작업자들을 머물러 살게 하는 데 천혜의 환경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치면, 제철사업이 성했던 것은 어느 시대였을까? 지금은 흔적을 찾기도 어려운 것을 보면 역시 가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걸까?
전북가야의 실체를 찾기 위한 연구자들의 노력이 진행 중이므로 기대를 걸고 기다려보자.
이상은 필자의 빈약한 추론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늘 걷는 길 위의 마을이어서 하나의 이야깃거리로 재미삼아 생각해 보았을 뿐입니다. 더 근거 있는 유래를 아시는 분은 언제든지 고쳐주시고 깨우쳐 주시기를 기다립니다.
(최태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