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신 75/200131]대저 인문학이 무엇이더냐?
후배님의 시집을 탐독하고 있는데, 도반道伴의 슬픈 전화에 나도 마음이 아팠다. “아니, 정월 초하루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다요? 마흔도 안된 당질堂姪부부가 교통사고로 가부렸당개. 어찌나 짠-허던지 장례식장에서 이 나이에 허벌나게 울어부럿소. 그러고 집에 왔는디, 어떤 싸가지 없는 새끼가 우리집 개를 치고 뺑소니를 해부맀소. 뒷다리 두 개를 절단하는 수술을 히야는디, 참말로 환장허것소잉. 2백만원이 든다는디, 돈도 돈이지만, 사람이 그라믄 쓰것소” 참말로 뛰다죽을 일이었을 듯하다. 나도 쯧쯧쯧이 절로 나오는 배드뉴스bad news이다.
뺑소니 운전사를 욕하던 말 끝에 ‘인문학人文學’ 얘기가 나왔다. “인문학이 머 별 거요. 염치廉恥를 알고 짜-안헌 마음을 가지는 게 인문학 아니요?” “맞씀다. 그래서 맹자孟子가 측은지심惻隱之心을 인지단仁之端이라고 안혔소” 나도 이런 맞짱꾸는 잘 칠 줄 안다. 인문학이 한마디로 ‘짠-헌 마음’이라는 도반의 명쾌한 정의定義에 박수를 쳤다. 도반이 도道를 통했나? 대학에서는 학과 폐쇄 등 인문학이 마구 죽어가고 있는 현실인데, 시중市中에서는 각종 인문학특강이 범람하고 있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이상한 나라. 대저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인문학이 왜 필요한가? 인문학의 핵심이 ‘온갖 지식知識을 넘어 사람답게 사는 것’이라고 하면 너무 나이브naive하고 심플한 것인가? 하지만 인문학을 인간의 마음을 넉넉하고, 생활을 윤택하게 만드는데 일조하는 것이라 정의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니리라.
봉건국가에서는 백성들을 무조건 우매한 존재로 생각했다. 세종대왕도 훈민정음 서문 ‘어린(어리석은) 백성이 니르고저(말하고자) 홀배 이셔도(하는 것이 있어도)’처럼, 백성들이 짜안하여 측은지심으로 만든 게 한글이 아니던가. 나의 못된 ‘버릇’인 <3분 반짝특강>이 전화상에서 발동했다. “도반님, 임금의 첫 번째 미션(사명)이 무엇인지 아시오?” “글씨요” “우매한 백성들에게 ‘5상五常(사람이면 마땅히 갖춰야 할 다섯 가지 품성)을 가르쳐 사람다운 품성을 만드는 것이었답니다.” “오상이 머시오?” “사람이라면 먼저 어질어야 되지 않것소. 아까 말한 측은지심이요. 다음에 의롭고, 예의 바르고, 슬기롭고, 믿음직스럽고.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고거시 5상이지요. 어느 것이 먼저랄 것없이 이 다섯 가지 품성을 고루 갖추도록 백성들을 교화敎化시키는게 임금의 첫 번째 미션mission이었단 말이요. 두 번째 미션은 무엇인지 아오? 이 나라를 이끌어갈 차세대 리더 왕자王子를 생산하는 일이지요. 왕세자를 국본國本이라고 하는 이유요.”
그래서 유교국가인 조선의 5대 궁궐의 정문에 모두 ’화化‘자가 들어간 까닭이다. ‘될 화’자가 아니고 ‘교화 화’자지요. 경복궁의 광화문光化門, 창덕궁의 돈화문敦化門, 창경궁의 홍화문弘化門, 경희궁의 흥화문興化門, 경운궁(덕수궁)의 인화문仁化門(지금은 없어졌지만). 어떻게 교화를 시키냐구요? 인의예지신, 5상을 갖추도록. 그래서 사대문四大門과 보신각의 글자에 모두 5상을 담았지요. 동대문인 흥인(지)문興仁(之)門, 서대문인 돈의문敦義門, 남대문인 숭례문崇禮門, 북대문인 숙정문肅靖門(세종때엔 소지문昭智門이었다는 기록이 있다오. 홍제동의 홍지문弘智門은 숙종때 세웠고 여기에 해당이 안되는데 가짜뉴스가 판을 치고 있지요), 종루鐘樓인 보신각普信閣이 바로 그것이라오. 말하자면 조선 500년내내 임금이 백성들에게 5상을 갖추도록 교화시키라는 절체절명의 미션을 못박아놓은 것이지요.
"아항, 조선이 그런 나라였네. 고맙소잉” “생각해보시오. 1396년에 한 나라 수도首都를 정비하면서 쌓은 경계인 한양도성漢陽都城도성 성곽 18.6km. 네 곳에 세운 출입문의 이름에 ‘인의예지’ 네 글자가 들어간 것이 신통하고 제법 멋있지 않소? 물론 대문 네 개로 부족해 사소문四小門(혜화문, 소의문, 광희문, 창의문)도 지었지만, 그 안에 사는 당시 백성 2만가구 10만여명. 나라 이름 좀 보소. 아침 조朝, 신선할 선鮮. 조용한 아침의 나라. 영어로 Morning Calm. 얼마나 좋소. 그 백성들은 또 얼마나 순박했을 것이요. 유난히 평화(970여회 외침外侵을 당하면서도 우리는 한번도 먼저 침략한 적이 없소)와 흰옷을 사랑한 백의민족白衣民族. ‘고난의 역사’의 연속에서도 이만큼 발전하며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뭔가 하느님의 뜻이 있지 않을까요? 맹자孟子의 ‘사단四端’(惻隱之心 仁之端, 羞惡之心 義之端, 辭讓之心 禮之端, 是非之心 智之端)을 줄줄줄 들이대는 등 반짝특강의 열기는 점점 더해갔으나, 문득 작금昨今의 정치政治 돌아가는 판을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맥이 빠졌다.
4월 15일은 21대 총선이 실시되는 날이다. 좌충우돌, 중구난방 설쳐대는, x도 모르는 정치인과 정당도 많지만, 그 결과가 정말 어찌 될지를 누가 알겠는가. 민심民心의 총합總合이 어떻게 될까? 고거시 문제로다. 정치는 백성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슬픔을 위로해주는 것이련만, 이렇게 쉬운 문제를 어느 누가 단 한번이라도 제대로 해준 대통령이 있었던가. 그래도 조선 임금들은 몇몇 있었다. 세종이 그랬고, 정조가 그랬다. 그래서 성군聖君이라 칭하는 게 아닌가. 선거 며칠 후이면 바로 4월 10일, 사월혁명 60주년이 되는 날이다. 60주년이면 환갑, 지금까지 미완성으로 남은 '사월혁명'이 올해 제대로 완성되기를 온 뫔(몸과 마음)으로 빌고 빌어본다. 이것이야말로 ‘남북통일南北統一’ 못지 않은 우리 민족의 비원悲願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정말로 ‘한마음’이 될 수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