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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누가복음 24장 44-53절
설교제목: 율법과 지침
44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모세의 율법과 예언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두고 기록한 모든 일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였다."
45 그 때에 예수께서는 성경을 깨닫게 하시려고 그들의 마음을 열어 주시고,
46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곧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으시고, 사흘째 되는 날에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실 것이며,
47 그의 이름으로 죄를 사함받게 하는 회개가 8)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것이다' 하였다. 너희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48 이 일의 증인이다.
49 보아라,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낸다. 그러므로 너희는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입을 때까지, 이 성에 머물러 있어라."
50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들을, 밖으로 베다니까지 데리고 나가서, 손을 들어 그들을 축복하셨다.
51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축복하시면서, 그들을 떠나 9)[하늘로 올라가셨다.]
52 그들은 [예수께 경배하고,]크게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53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지냈다.
눅 24: 44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모세의 율법과 예언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두고 기록한 모든 일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였다."
아이들을 만나면서 느끼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훈육의 필요성입니다. 아이들과 함께 격의 없이 어울리는 것은 좋은데, 때로는 버릇없이 구는 때가 종종 생깁니다. 이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아이들은 세상을 배워나가는 과정 중에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이들이 잘못하는 일이 벌어지면 어른들은 당연히 그들을 혼내야 합니다. 제가 가르치거나 타이른다는 말을 사용하지 않은 이유는, 정당한 종류의 처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가 잘못을 하면 주인은 그 개를 혼내서라도 버릇을 고쳐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제가 다른 교회에서 전도사를 하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가족들이 마당에 개를 한 마리 기르면 좋겠다고 하길래, 교인 중에 한 분께 부탁을 드려서 하얀 강아지 한 마리를 얻어왔습니다. 그래서 그 개를 데려다가 가족들이 기르는데, 처음에는 분명히 저에게 집을 지킬만한 개가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 목적부터가 틀렸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아실겁니다. 개가 주인이 없으면 집을 잘 지킬까요? 그런 훌륭하고 듬직한 개도 있을 수 있지만, 보통은 그렇지 않습니다. 집은 집주인이 지키는 것이고, 개는 주인의 사랑과 돌봄을 받으면서 꼬리나 흔드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일이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되었느냐면, 이 개가 상전이 됐습니다. 제가 오랜만에 집에 돌아갔더니, 온 식구가 매일 개를 산책시키고, 똥 치우고, 맛있는 사료를 구해다 주느라 오히려 피로도가 더 올라갔습니다. 개가 집을 좀 지켜주면, 잠깐이라도 편하게 집을 비우고 돌아다니려는 생각이었는데, 반대로 개를 돌보느라 집을 더 못 비우게 됐습니다. 그래도 결과적으로 개와 사람이 모두 행복하고 즐겁게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이 개가 그만 갑자기 죽어버렸습니다. 아버지가 개를 데리고 산책 할 때마다, 개의 줄을 풀어준 모양입니다. 주인의 훈육과 통제에서 벗어난 우리 강아지는, 마음대로 도로로 뛰어다니다가 그만 차에 치여서 갑작스레 죽음을 당했습니다. 누구의 잘못일까요? 제대로 목줄을 관리하지 않은 주인의 잘못입니다. 그래서 온 식구가 사랑하던 개의 죽음에 슬퍼하면서도 동시에 개를 돌보는 임무에서 해방되어 묘하게 되었던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제가 개와 사람을 동일시 했다고 기분나빠 하지는 않으시리라 생각합니다. 개의 죽음으로 끝나는 이 이야기는, 조금은 극단적입니다만, 사람의 교육에도 분명 비슷한 면들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남자들이 군대나 직장에서 흔하게 겪는 상황 중 하나는, 괴롭히는 선임이나 윗사람들을 보고, 나는 저렇게 하지 말아야겠다 하고 보면, 정작 착하고 좋은 윗사람의 말을 사람들이 안 듣는다는 겁니다. 결과적으로 조직이 개판이 되고, 더 많은 문제가 발생하는 것들을 경험하는 때가 있습니다. 알아서 잘 돌아가는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항상 누군가의 도움을 통해서만 살아갈 수 있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부모님들이 우리를 가르쳤던 것처럼, 우리도 누군가를 가르치고 돌보아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의 교회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합니다. 그 생각 중 하나는, 이제 한국 교회에, 우리 교단에 훌륭한 교역자가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왜 인재가 부족할까요. 단순하게 경제적인 관점에서는 목사의 월급이 적어서라고 말할 수도 있을겁니다. 사람들은 돈을 잘 버는 곳에 몰려들게 되어있습니다. 공부를 잘 하는 사람들은 의사가 되려 할 것이고, 운동을 잘 하는 사람들은 프로 선수가 되려 할 것이 당연합니다. 만약에 목사님들이 억대 연봉을 받는다면 어떨까요? 물론 지금도 누군가는 그렇겠지만, 목사들의 전체적인 소득의 수준이 고소득 전문직에 당당하게 이름을 올릴 만큼이나 높아진다고 상상해봅시다. 그럼 전국의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이들이 아마 목사가 되겠다고 할겁니다. 목사가 되기 싫은 아이가 있더라도 부모님들이 강제로 그렇게 만들겁니다. 그럼 대한민국에서 제일 뛰어난, 난다긴다 하는 우수한 인재들이 교회로 몰려들게 될 것이니, 교역자의 질적 양적 부족이 해결될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이것이 과연 실현 가능한 이야기일까요?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교회는 대기업도 아니고, 프로야구단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가 목회를 십 여년 가까이 하면서 느낀 문제점은, 물론 돈을 적게 주는것도 있지만 그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교회 권사님들이 참한 손녀딸이 있어도 목사 전도사에게 시집을 안 보냅니다. 왜? 고생할 것을 뻔히 아니까. 교회에 장로님들이 공부 잘하는 자기 자녀를 신학교에 안 보냅니다. 왜? 가난할 테니까. 자 그럼 우리가 어떻게 했어야 할까요? 제 생각에는, 교회들마다 책임감을 가지고 목사를 길러냈으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좋은 명문 학교들은 우수한 학생을 길러내서 그들이 성장해서 훌륭한 교수도 되고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실패한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부모님들은, 윗세대들은 힘든 환경 속에서도 좋은 신앙을 가지고 살았는데, 비교적 풍족하고 자유로운 자녀들에게는 오히려 신앙이라는 유산을 물려주는데 소극적이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물론 제가 아직 장가를 가지 못했고,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양육해보지는 못한 사람이기 때문에 쉽게 말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지금껏 경험하면서 열심히 고민해본 바로는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자기가 좋은 기독교인이 되기를 바라면서, 자기 자녀가 좋은 기독교인이 되는 것에는 무관심해 보인다는 말입니다.
저는 이것이 권위, 훈육의 부재와 연관이 있다고 느껴집니다. 이런 말 하면 제가 참 아저씨같고 꼰대같은데, 제 마음은 아직도 좀 더 어리고 철없는 청년인데, 현실은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요즘 것들은 아주 버르장머리가 없습니다. 제가 어릴 땐 까딱하면 동네에서 형들한테 맞고, 학교에서 선생님들한테 맞고, 집에서도 잘못하면 맞았습니다. 그리고 그게 그렇게도 싫었습니다. 저의 부모님 세대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자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 상대적으로 저의 부모님은 저를 폭력적으로 다루지 않으셨습니다. 항상 정당한 이유를 가지고 저를 훈육하셨습니다. 그리고 요즘은, 제 나이또래의 사람들이 자녀를 기르면서, 자기 자녀를 바르게 훈육하는 것을 어려워합니다. 가정에서 이루어져야 할 많은 교육이 학교와 학원 등 외부기관으로 위탁됩니다. 부모님과 자녀가 허물없이 지내는 것은 좋지만, 부모의 권위와 위엄은 좀 부족해 보입니다. 가정에서 이러하니 학교에서도 당연히 선생님들의 권위가 떨어집니다. 집에서 부모님의 말을 잘 듣는 아이가 학교 선생님께 막무가내로 개길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모든 아이들은 부모님의 말을 잘 듣는 척 할겁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서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시고, 그리고 하늘로 돌아가시기 전에 이런저런 것들을 알려주시고 보여주시고 하셨던 내용입니다. 우리가 보통 이 내용을 다룰 때는 비슷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 성경의 다른 구절들을 함께 언급하면서, 전도에 중점을 둘 때가 많습니다. 많은 전도사님과 목사님들이 마가복음과 사도행전에 나오는데, 주로 ‘땅끝까지 복음을 전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가지고 열심히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설교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의 내용을 보면 약간 취지가 다릅니다. 예수님이 올라가신 뒤에 기다리면 능력을 받고 열심히 전도를 해야 한다는 것은 맞는데, 44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율법과 시편과 나(예수)를 두고 기록한 모든 일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십니다.
유대인들에게 성경은 기본적으로 율법입니다. 지켜야 할 것들입니다. 예수님도 자기 스스로를 유대인이라고 생각하셨을 겁니다.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제가 한국 사람인데 한국인이 아니라고 생각할까요? 따라서 예수님은 율법을 지키는 것에 대하여 자연스럽고, 좋은 것 이라고 생각하셨을 겁니다. 자 그런데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율법’이라는 단어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성경에 대해 대단히 편리하고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는데, 성경의 일점 일획도 틀림이 없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면서, 다들 신나게 돼지고기를 먹고, 안식일인 토요일이 아니라 일요일에 교회를 다니고, 심지어 안식일에는 집 밖으로 나오지도 말고 음식도 만들지 말라고 했는데 차타고 지하철 타고 멀리까지 교회를 힘들게 다닙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오히려 사이비 이단들이 더 율법을 열심히 지키는 것 같고, 기독교인들은 대단히 방만해 보입니다.
저는 여기서, 상당히 불경스럽지만 성경의 율법들이 마치 부모님의 잔소리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니까 딱히 틀린 소리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 우리 부모님들이 아이에게 이런거 저런거 해라 하지말아라 하면 그것은 사랑에서 비롯된 것 아니겠습니까. 어린 아이에게는 술도 커피도 주지 않는 것이 좋지만, 나중에 그가 장성하면 아버지와 함께 술 한잔 걸칠 수 있는 날을 기대해봐도 좋지 않겠습니까?
결국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법을 지키느냐 그렇지 않으냐의 문제보다도 더 복잡한 수준이 요구된다는 말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사실상 더 높은 도덕성이 요구됩니다. 법에서 자유롭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겁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이혼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못된 사람들이 이혼은 안 하고 편법을 써서 불륜을 저지르거나 결혼을 여러명하고 합니다. 형제에게는 이자를 받지 말랬더니, 이방인에게는 이자를 받습니다. 멀리 지방에서 예루살렘 성전에 방문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돈을 받지 말라고 했더니 물건을 강탈해갑니다. 이게 말장한 하는 것일까요 율법을 지키는 것일까요? 불륜 현장에서 잡혀온 여자를 놓고, 율법은 돌로 쳐 죽이라고 하고 있으나 예수님은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용서해준 겁니다. 자 그럼 예수님은 율법을 어긴 사람입니까? 율법을 지시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가장 잘 헤아린 것이 바로 예수님이었을 겁니다.
우리가 왜 자녀들에게 잔소리를 합니까? 잘 되라고. 더 정확하게는 그 아이가 장차 성장해서 번듯한 성인이 되면, 우리의 도움 없이도 독립적으로 잘 살아가라고 하는 것 아닙니까? 아이에게 고기를 잡아주지 말고, 잡는 법을 가르치라는 것이 바로 이런 이야기 아닙니까? 우리 기독교인들이 매일 싸워야 할 것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는, 여러분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무엇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가를 잘 판별하며 매일매일을 살아가야 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여러분의 자녀들을 잘 길러내는 일입니다. 즉저와 여러분과 우리의 아이들에게 ‘율법과 지침’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 기록한 모든 일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은 여러분들이 성경대로 살기를 기대하는 것인 동시에, 그 말씀들을 실현해야 하는 것 또한 우리의 몫이라는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스스로 생각하기에 부족하다고 느끼십니까? 그럼 우리 공동체의 아이들이 더 훌륭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랄 수 있도록, 그들을 통해서 성경이 실현되도록 노력하셔야 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의 아이들이 인사를 잘 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종종 아이들에게 억지로 인사를 시킵니다. 요즘은 어른들이 아이를 보면, 그저 흐뭇해서 웃고 아이들의 관심과 사랑을 얻으려고 막 입장이 역전되는데, 마냥 바람직한 상황은 아닙니다. 아이는 아이답게 굴어야 하고, 어른에 대한 존중과 예의를 배워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아이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올바른 지침을 줄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아이들이 최소한 인사라도 반듯하게 하기를 원합니다. 저는 짜잔한 사람이라 뭘 잘 안 사주는 편인데, 우리 교회 어른들께서 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져주시고 과자나 선물도 주시는 것에 대해서 너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저는 선물을 나누어 줄 때, 이리떼처럼 달려들어서 자기 것만 챙기려는 아이들을 제지하고, 항상 감사다는 말을 들은 뒤에 선물을 나눠주고 있습니다. 또 그날 사주신 어른이 계시면 가서 감사 인사를 드리도록 하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베푼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어린이가 되어야 합니다. 사회생활에서 인사만 잘 해도 반은 먹고 들어갑니다. 저는 우리 아이들이 어디가서 버릇없고 싸가지 없다는 소리는 안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규율이 부족한 사람이고, 이런저런 일들로 어려움을 겪어봤기 때문에 더 그런 것인지도 모릅니다. 물론 억지로 아이들을 괴롭히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어느 정도 적절한 선이 필요할 겁니다. 기본적으로 저는 교회에 오면 아이들이 즐겁게 놀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어린이로서 여러분 스스로를 돌아보시고 하나님의 훈육지침, 율법과 지침을 잘 따르실 수 있으면 좋겠고, 또 우리의 자녀들을 잘 양육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하늘샘교회와 저와 여러분의 가정이 더 기쁘고 행복하고 반듯하게 서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