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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물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145분의 대서사시, 전훈의 갈매기_챠이카.
챠이카 2024는 기존의 챠이카를 봤던 분들이라면 큰 차이가 바로 체감되는 것이 두드러진 특징입니다.
신선함과 직설적인 표현이 더해진 리마스터 버전이라고 하면 조금 부족한 듯 하고,
클래식을 재해석한 넷플릭스 느낌의 버전이라고 하면 또 과한 듯하지만,
확실한 것은 무대에서 매체연기를 직접 볼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극이 더욱 리드미컬해지고 각 캐릭터의 대사마다 고유의 운율이 더해졌기 때문이죠.
보통 연극이라고 하면 감정 표현과 동작이 일정부분 과한, 소위 ‘연극톤’이라는 것을 떠올리기 쉽지만,
2024년의 챠이카는 마치 영화나 드라마 촬영현장을 직접 보는듯한 느낌이 강합니다.
그만큼 배우들의 연기가 일상에서 보는 사람들만큼이나 자연스럽다는 반증인 것이죠.
거기에 전작보다 좀 더 과감한 애정표현과 거침없는 감정의 폭발을 더한 전훈 연출님의 이번 챠이카는 긴 공연시간이 순삭될 정도로 상당한 몰입감을 선사합니다.
2024년 5월 23일의 챠이카를 자연스러운 연기로 꽉 채워준 분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아르까지나 역을 맡으신 남명지 배우님.
아르까지나 실물영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엄청난 열연을 보여주셨습니다.
아들인 꼬스챠와의 팽팽한 갈등에서 피어나는 긴장감을 공연 내내 끌고 가는 에너지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지만,
4막의 마지막 장면에서 총성이 들렸을 때의 모습은 자신에게서 뭔가가 정말로 떨어져나간, 상실을 직감한 ‘엄마’, 그 자체였습니다.
모스크바 유명 극단의 ‘여배우’임을 강조하며 ‘엄마’가 아닌 ‘여자’로 인정받기를 원하지만,
정작 존재 자체가 자신을 더 이상 ‘여자’일 수 없게 만드는 아들, 꼬스챠에 대한 짜증스러움과 분노,
하지만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혈육에 대한 양가감정을 탁월하게 표현해주셨습니다.
이어서 꼬스챠 역의 정승현 배우님.
이번에도 챠이카의 주인공인 꼬스챠 역을 맡으셨지만, 작년과 확 달라진 연기변신을 선보여주셨습니다.
지난번의 꼬스챠가 ‘내재된 분노’를 어떻게든 참아내려고 하지만 잘 되지 않는급발진 캐릭터였다면,
이번 꼬스챠는 거침없이 화내고 망설임 없이 내지르는, ‘젊은 혈기’를 가진 신인작가의 욕망을 정확하게 그려내 주셨습니다.
실제로 정승현 배우님은 자신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성격이라, 이번과 같은 캐릭터 구축은 괄목할만한 성장이자 터닝포인트라 생각됩니다.
있는 그대로 과감하게 드러내는 연기가 실생활에서도 긍정적인 작용으로 이어지길 바라며 다음 작품을 기대해봅니다!
꼬스챠의 사랑, 니나 역의 정유림 배우님.
워크샵 공연을 봤을 때부터 기본기가 탄탄한 느낌을 받기는 했지만, 감정소모가 극심한 캐릭터를 너무나도 섬세하게 연기해주셨습니다.
어쩌면 아르까지나의 젊은 시절일지도 모르는 ‘니나’는 순수한 백색연기부터 파멸된 흑화연기까지 넓은 스펙트럼을 소화해내야 하는 어려운 캐릭터입니다.
하지만 정유림 배우님의 ‘니나’는 체홉의 텍스트가 여성으로 변한다면 정말로 이런 뉘앙스와 움직임을 갖지 않을까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실제로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배신당해 바닥을 경험한 적이 있었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물론 없었겠지만)
망가진 감정선을 애써 추스르려는 안쓰러움을 진하게 표현해 관객들의 몰입도를 더욱 높여준 정유림 배우님의 다음 변신이 궁금해집니다.
니나를 파멸에 이르게 한 장본인, 뜨리고린 역의 유영진 배우님.
‘본능에 충실한 작가, 뜨리고린을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구나’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찌 보면 자신의 마음 가는대로 사는 순수한 인물이지만,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솔직한,
그래서 꼬스챠와 아르까지나의 질투를 불러일으키는 빌런 역할을 멋지게 보여주셨습니다.
잘생김을 장착한 피지컬에서 오는 설득력도 상당하지만,
약간은 느릿느릿한 말투와 상대를 유심히 관찰하는데서 보이는 세심한 동작선은, 정말 여자를 잘 이해하고 있지 않으면 나오지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노련미가 돋보였습니다.
뜨리고린의 풍부한 경험치에서 우러난 플러팅이 꼬스챠와 아르까지나의 분노 섞인 질투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완급조절의 절묘함에 박수를 보냅니다.
다음은 마샤역을 맡아 열연해주신 이지현 배우님.
‘안무의 대가’답게 멋진 퍼포먼스와 연기로 새로운 마샤를 구현해주셨습니다.
체홉의 글을 독특한 안무로 풀어낸 점도 멋지지만,
꼬스챠의 사랑을 얻을 수 없는 슬픔을 다양하게 소화해낸 점은 극의 재미와 깊이를 한층 더 끌어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라 생각됩니다.
춤에 이어 연기에도 재능이 있음을 증명했던 연극, ‘결혼전야’에서의 좋은 인상은 이번 ‘챠이카’에서 캐릭터 분석에 꽤 공을 들였던 고민이 느껴질 정도로 성숙한 인상으로 이어졌습니다.
꽤나 입체적인 캐릭터가 만들어진 덕분에 처음부터 끝까지 검은 상복을 입은 마샤의 모든 행동과 말들은 4막에서 흑화된 니나의 이미지와 중첩되면서도, 일찍부터 꼬스챠의 자살을 예감한 것 같은 상징성을 획득하면서 극의 재미를 확장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해주셨습니다.
덧. 관객 중 누군가 마샤의 춤을 보고 “저 배우는 댄서를 해도 충분히 성공하겠다.”라고 했던 건 안 비밀입니다.
그리고 닥터 도른역의 유성곤 배우님.
극 중에서 유일하게 모든 욕망을 다 내려놓은 캐릭터, ‘도른’역에 찰떡 캐스팅이었습니다.
누구나 살면서 주변에 한 명쯤은 있을 것 같은,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언제나 여유로워 보이고 게다가 은근히 웃기기까지 한 ‘인생 선배’같은 사람들이 간혹 있습니다.
겉으로는 적당히 가벼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진중한 면이 있는 캐릭터를 자연스럽게 빌드업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뽈리나와의 밀당 장면과 꼬스챠의 자살을 뜨리고린에게만 조용히 알리는 장면의 온도차를 아우를 수 있는 입체적인 캐릭터 구현에 박수를 보냅니다. 덧. 도른의 수영복 등장씬은 언제나 관객의 웃음을 유발하는 치트키가 확실합니다.
아르까지나의 오빠, 쏘린 역의 유경열 배우님.
체홉의 작품들을 관통하는 키워드, ‘시간’과 ‘과거에 대한 회한’을 이토록 담담하게 큰 울림이 느껴지도록 표현할 수 있을까.
어떠한 인생을 살아오셨는지 알 수는 없지만, 연륜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움은 실제로 공무원 생활만 28년이나 해왔던,
그래서 인생의 재미를 이제라도 찾고자 애쓰는 ‘쏘린’의 실물을 직접 마주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1막에서 4막에 이르는 동안, 쏘린을 통해 실제 공연시간이 아닌 극에서 흘러버린 몇 년의 시간이 직접 와 닿는 체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매우 특별한 경험을 안겨주신 유경열 배우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온몸으로 연기하는 배우, 샴라예프 역의 박장용 배우님.
오랜 기간 연마한 내공으로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하는 배우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최근 들어서는 역할에 맞춰 체형도 변화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배우입니다.
프랑켄슈타인에서 ‘집시 멍키’역을 맡았을 때는 굉장히 몸집이 작은 사람처럼 보였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덩치가 엄청 커진 인상을 받아 무척이나 신기했습니다.
무대 위에만 올라가면 체형마저 바꿀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라고나 할까요.
아재 개그를 선보이고 리액션 해주는 사람을 바쁘게 찾는 눈짓과 큰 웃음소리에서 채찍을 휘두르며 극대노하는 모습까지,
분노조절장애 연기마저 탁월하게 해내는 박장용님의 차기작이 기대가 됩니다.
더 많은 분들이 박장용이라는 권총(함정)에 빠지는 즐거움을 느끼시길!
샴라예프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뽈리나 역의 김혜연 배우님.
이번 공연을 통해 처음 뵙게 된 분입니다.
캐릭터를 어떻게 해석하실지 내심 궁금했었는데, 정말 절박하고 처연한 뽈리나의 진심이 느껴지는 연기를 보여주셨습니다.
도른을 향한 절실함이 너무나 안쓰럽게 느껴져 오히려 뽈리나에게서 빠져나가려고 발버둥치는 도른이 얄미워 보였습니다.
‘이 정도면 좀 받아주지’라는 마음이 들 정도로.
그만큼 샴라예프에게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과 그에 따른 두려움을, 도른을 향한 거침없는 애정공세로 연결하는 능수능란한 연기에 감탄했습니다.
감정의 무게중심을 자유롭게 다룰 수 있는 배우를 알게 되어 기쁜 마음입니다.
월급 23루블의 중학교선생님, 메드베젠꼬 역의 정성결 배우님.
연기에 대한 열정이 가득한 정성결 님의 메드베젠꼬는 정말 마샤의 표현대로 ‘매력 없음’이 성공적으로 표현된 캐릭터였습니다.
무한도전에서 정형돈이 맡았던 ‘캐릭터가 없는 캐릭터’,‘그냥 정형돈’이 바로 메드베젠꼬 연기의 핵심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죠.
이 세상에서 누가 매력 없다는 소리를 듣고 싶겠습니까만, 정작 매력이 전혀 없는 사람은 없기에 만만치 않은 캐릭터 구축과 연기내공을 필요로 하는 캐릭터가 메드베젠꼬입니다.
몇몇 체홉 작품의 조연을 거쳐 ‘시라노’에서 감을 잡기 시작한 정성결 배우님의 이번 캐릭터는 그동안 자기 자신을 지워내는 작업이 완료됨과 더불어 어떤 캐릭터든지 맞춤형으로 입을 수 있게 됐다는 반증의 시작이라고 확신합니다.
마지막으로 야꼬프 역을 맡아주신 이찬웅 배우님.
극 중에서 유일한 상의 탈의 출연으로 관객들의 눈도장을 안 찍을래야 안 찍을 수 없는 야꼬프역은 작은 분량이지만 큰 비중을 가진 캐릭터입니다.
웃음포인트마다 어김없이 등장하기 때문이죠.
주연배우들의 호흡 중간 중간에 치고 빠져야 하는 만큼, 높은 정확성과 전체 그림을 숙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어려운 위치임에도 아주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가자신의 배역을 관객들에게 각인시켰습니다.
이찬웅 배우님의 성장을 기대합니다!
벚꽃동산의 자작나무숲에 이어 멋진 무대를 꾸며주신 이지수 배우님.
공연이 끝난 뒤 많은 배우들이 바닥을 가리키며, ‘이 무대 누가 꾸몄는지 알아?’라고 묻더군요. 페인팅이 프린트된 타일을 깔아놓은 줄 알았는데,
이지수 배우님께서 열정적으로작업하셨다는 말에 바닥을 찬찬히 다시 봤습니다.
유명화가인 ‘잭슨 폴락’의 액션페인팅을 체홉 무대에 구현하다니. 와우.
챠이카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감정선이 표현된 것 같은 멋진 페인팅에 박수를 보냅니다!
5월 23일 공연에 출연하신 모든 배우 분들의 멋진 앙상블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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얻을 수 없는 것을 갈망하고 타인에게 인정과 사랑을 받고자하는 욕망에 대한 이야기,
챠이카를 통해 체홉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얻고자 하는 마음이 클수록 가질 수 없고,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하기 때문에 더 소유하고 싶은 사람의 본성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가가려 하면 멀어지는 것처럼,
오히려 모든 것을 내려놓았을 때 얻을 수 있는 자연의 법칙이자 마음의 작동원리는 지금 시대에 가장 필요한 기대관리의 핵심이라 생각됩니다.
‘기대가 크다는 것은 결국 기회를 잡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증거’라는 사실을 늦게 깨달은 저로서는
챠이카를 볼 때마다 꼬스챠의 자살이 너무나 안타깝고 아쉬울 뿐입니다.
저 역시 꼬스챠와 같은 무명작가의 길을 걷고 있기 때문이죠.
최근에 다시 읽었던 데미안에서 저는 기대관리에 대한, 그리고 사랑에 대한 해답을 찾았습니다.
이전에 읽었을 때는 지나쳤던 문구가 이번에는 저의 눈과 마음을 잡았기에,
리뷰를 쓰면서 생각난 것을 적어보는 것으로 글을 마치고자 합니다.
꼬스챠가 자신의 인생에서 ‘뜨리고린’을 알게 된 다음 ‘데미안’도 만났다면,
그래서 데미안의 어머니, 에바부인의 말을 들었다면 꼬스챠는 자살에 이르지 않았을 것이고
더욱 성공한 작가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데미안의 글 중에서 에바부인이 싱클레어에게 한 말을 여기에 옮겨 봅니다.
“사랑은 간청해서도 강요해서도 안 돼요.
사랑은, 자신의 안에서 확인에 이르는 힘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사랑은 더 이상 끌림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끕니다.
당신의 사랑이 나를 끌면, 내가 갈 겁니다.
나는 선물을 주지는 않겠어요.
쟁취되겠습니다.”
- 5월 23일 챠이카를 보고나서 -
정가비 씀.
첫댓글 바쁜 시간 짬을 내어 출연배우 하나하나 코맨트를 아끼지 않은 정가비작가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전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