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
(로마8,26).
Ⅱ.청원 기도
2629탄원supplicatio이라는 낱말은 신약 성경에서 그 의미가 풍부하게 나타난다.곧,청원하다,애원하다,끈질기게 청하다,호소하다,부르짖다,울부짖다 등의 의미와“기도를 통한 줄다리기”라는 의미까지 포함된다.그러나 가장 일상적인 형태는 청원이며,이는 청원이 가장 자발적이기 때문이다. 청원 기도를 드림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하느님과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한 깨달음을 표현한다.피조물인 우리는 우리 자신의 기원 起源도 아니고,우리가 당하는 역경을 마음대로 없앨 수 있는 주인도 아니며,우리의 궁극 목적도 아니다.도리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아버지께 등을 돌린 죄인임을 알고 있다.청원은 이미 아버지께 돌아섬을 의미한다.
2630신약 성경에는 구약 성경에 자주 나오는 비탄의 기도가 거의 없다.우리가 비록 아직은 기다림 중에 있고 날마다 회개해야 하지만,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의 청원은 희망으로 지탱된다.비탄보다 훨씬 더 깊은 데서 솟아나는 그리스도교 청원을 바오로 사도는 탄식이라고 부른다.이 탄식은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는”(로마8,22)모든 피조물의 탄식이기도 하며,우리의 탄식이기도 하다.우리는 “우리의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로마8,23-24).끝으로, 이 탄식은 바로“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시고,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몸소 말로 다 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시는”(로마8,26)성령의 탄식이다.
2631용서를 청함은 청원 기도의 첫 단계이다(“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세리,루카18,13).용서를 청함은 올바르고 순수한 기도의 전제 조건이다.겸손하고 신뢰심을 가져야만 우리는,아버지이신 하느님과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고 타인들과도 친교를 나누어,다시 빛 가운데에서 살 수 있는 것이다.그리하여 우리는 “우리가 청하는 것은 다 그분에게서 받게 된다”(1요한3,22).용서를 청함은,개인이 드리는 기도에서 그러하듯이,성찬 전례에 앞서 이루어져야 할 행동이다.
2632그리스도인의 청원은,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다가오고 있는 하느님 나라를 바라고 찾는 것에 집중된다.청원에는 순서가 있다.먼저 하느님 나라를 청하고,다음에는 하느님 나라를 맞이하고 그 나라의 도래에 협력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을 청해야 한다.그리스도와 성령께서 맡으신 임무에 대하여 그와 같이 협력하는 것은 이제 교회의 사명으로서,사도 공동체가 이 협력 문제를 기도의 주제로 삼고 있다.참으로 출중한 사도인 바오로 사도의 기도는,모든 교회에 관한 숭고한 염려가 그리스도인 기도의 중요한 동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다.세례 받은 모든 사람은 기도를 통하여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2633이렇게 하여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 사랑에 참여하게 될 때,우리는 필요한 모든 것이 청원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모든 사람을 속량하려고 모든 것을 떠맡으신 그리스도께서는,우리가 그분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드리는 청원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신다.이러한 확신에서 야고보와 바오로 사도는 언제나 기도하라고 우리에게 권고한다.
Ⅲ.전 구
2634전구 轉求는 우리의 기도를 예수님의 기도와 매우 흡사하게 해 주는 청원 기도의 하나이다.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해,특히 죄인들을 위해,하느님께 기도드리는 전구자이시다.“따라서 그분께서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언제나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그분께서 늘 살아 계시어 그들을 위하여 빌어 주십니다”(히브7,25).성령께서도 친히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로마8,26-27).
2635다른 사람을 위하여 청원하는 전구는 아브라함 이래로,자비로우신 하느님과 일치된 인간 마음의 특징이다.교회 시대에 와서,그리스도인의 전구는 그리스도의 기도에 참여하는 것이며,성인들의 통공을 표현하는 것이다.전구에서,기도하는 이는“자기 것만 돌보지 말고 남의 것도 돌보며”(필리2,4),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을 위해서까지 기도한다.
2636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은 이런 형태의 나눔을 철저히 실천하였다.바오로 사도는 그렇게 기도하는 공동체들을 그의 복음 선포 직무에 참여시키면서도,그들을 위하여 전구한다.그리스도인의 전구에는 한계가 없다.“모든 사람을 위하여,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1티모2,1),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구원을 위하여 간구한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 발췌)
나는 이제 안다네,
주님께서 당신의 기름부음받은이에게 구원을 베푸심을,
그분께서 당신의 거룩한 하늘에서
당신 오른손의 구원 위업으로 그에게 응답하시리라.
이들은 병거를,저들은 기마를 믿지만
우리는 우리 하느님이신 주님의 이름을 부르네.
그들은 넘어지고 쓰러지지만
우리는 일어나 굳건히 서있으리라.
(시편20,7-9)
“이제”라는 말과 더불어 새로운 전환이 이뤄진다.앞에서 임금이 승리를 위해 드린 기도가 이제 응답을 받는다.“안다네”는 확신을 표현한다.곧 하느님이 임금에게 구원의 승리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확신한다.곧 하느님이 임금의 정체를 나타나는데 그는 ‘기름부음받은이’곧 메시아이다.
이 시편의 군사적 배경이 잘나타난다.“이들”과 “저들”이 “우리”와 강한 대조를 이룬다.또한 “병거”와“기마”가 “주님의 이름”과 대조를 이룬다.병거와 기마는 고대 근동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 무기였다.적들은 막강한 군사력을 믿는다.그러나 병거와 기마에 의존하는 것보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전쟁에서 승리한다.“그들은 병거와 기마를 믿어 그것들로부터 이익을 즐기지 못했고 보이지 않는 혼란에 사로잡혀 붕괴되었다.대조적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도움을 구했고 보이는 방식으로 구원을 얻었으며 적들보다 우월하게 나타났다”(키루스의 테오도레투스).이스라엘의 위협적인 무기는 하느님께 대한 신뢰다.
기마와 병거를 의지하는 자는 쓰러진다.그러나 주님의 이름을 의지하는 자는 굳건히 서있다.시편은 군사력에 의지하는 것은 믿음에 모순된다고 가르친다(시편33,16-19;44,4,7-8;147,10-11).인간의 뛰어남을 신뢰하는 자들은 그들의 욕망의 끈에 사로잡히고 죽음의 구렁에 빠진다(카시오도루스).“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넘어질 때 똑바로 일어설 것이다.왜냐하면 우리의 임금이 구원되었고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어 하늘에 올라 하느님 아버지 오른편에 앉으셨기 때문에 그분은 매일 우리가 그분을 부르는 소리를 들으신다”(소 아르노비우스).
시편 20편의 전체적 의미:시편 20편은 전쟁에 임하기 전,백성이 임금을 위해 드리는 기도다.그들은 하느님이 임금을 보호하고,도와주고,받쳐주며,그의 제물을 기억하고,그의 번제를 즐거이 받아주시기를 기원한다.이스라엘의 임금은 군대를 지휘하고 성소 예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그래서 임금도 전쟁에 나가기 전에 성소에서 하느님의 도움을 빌며 공식적인 예배를 드렸다.전쟁에서의 승리는 일차적으로 군사적 계획이나 전략이 아니라 하느님께 달려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사무17장참조).전쟁을 치르기 위해서는 실제적으로 군사적인 준비와 종교적인 준비를 모두 해야 했다.이 시인의 공동체도 전쟁에서 중요한 것은 병거나 기마나 전략이 아니라 믿음임을 고백한다(시편20,8-9).‘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8절)은 그 이름에 계시된 하느님의 모든 특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다.‘야훼’이신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이집트 종살이에서 구원하셨다.그러므로 이 시인의 공동체는 주님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승리를 기원한다.인간적인 능력에만 의지한 이들은 쓰러지지만 주님을 의지한 이들은 굳건히 서게 될 것이다.이 시편은 우리의 삶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노력이나 준비도 필요하지만 반드시 주님이 함께해주셔야 함을 말한다.그러므로 이 시편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신학적인 관점을 제공해 준다.말하자면 크고 작은 모든 일에서 참된 승리는 하느님이 함께해 주실 때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이 때문에 우리는 기도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거룩한 독서를 위한 구약성경 주해,시편 1-41편)
“침묵은 신앙입니다.
그분이 행하시도록 침묵할 때
주님의 현존 안에 있기 위해 세상 소리와 소음을 피할 때
그분이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여 인간의 이해를 찾지 않을 때
바로 침묵은 신앙입니다.”
(토머스 머튼,침묵에서)
“머튼은 침묵이 소극적인 방어가 아니라 주님의 현존을 이 세상에서 깨닫기 위한 적극적인 선택임을 이야기합니다. 침묵 속에 홀로 기도할 때 내가 보는 것,내가 감당하는 것,나를 스치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목소리를 알게 되는 것,소리 높여 내 고통을 이야기하면서 손쉬운 인간의 위로를 찾는 대신 침묵을 통해 하느님의 신비에 귀 기울이는 것,내 의지로 세상 모든 것을 관철하려고 하기보다는 온유한 고독속에서 타인의 참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이모든 양선 良善,자비,인내와 겸손이 침묵을 통해 가능하고 이러한 침묵은 참 신앙의 길로 이끄는 존재조건이 됩니다.”
“이 세상의 무수한 소음과 관계를 맺으면서 말로 하느님을 만나려는 신앙인들은 혼돈의 소음 대신 포기와 공평,인내와 흠숭을 주는 침묵 속에서 참하느님,참 기도를 만나라고 합니다.”
“홀로 침묵하며 만나는 진정한 기도가 우리에게 더 큰 자유를 줄 것입니다.”
(다시 시작하는 경이로운 순간들/정은귀 著)
뜨거운 여름날,
더위를 피하는 최선의 선택은
해~피해!(happy 하시길!)
-아재 개그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