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고 신선한 틈새!
주경림 (시인)
조승래 시집 『적막이 오는 순서』
동학사
『적막이 오는 순서』 라니, 시집 제목부터 눈길을 끌었다. 조승래 시인의 8번 째 시집이 적막처럼 도착했기에 조심스럽게 적막을 뒤적여 읽기 시작했다. 먼저 표제시 부터 찾았다.
여름 내내 방충망에 붙어 울던 매미, 어느 날 도막난 소
리를 끝으로 조용해 졌다. 잘 가거라, 불편했던 동거여 본래
공존이란 없었던 것 매미 그렇게 떠나시고 누가 걸어 놓은
것일까 적멸에 든 서쪽 하늘, 말랑한 구름 한 덩이 떠 있다
―「적막이 오는 순서」 전문
고막이 찢어질 것 같이 울던 매미 소리가 조용해진 자리에 걸린 “적멸에 든 서쪽 하늘”이라는 시각적 장치가 압도적이다. 방충망에 ‘매미 소리’와 ‘적멸’을 동격으로 걸기에는 언어가 갖는 무게감의 차이가 크게 느껴진다. ‘말랑한 구름 한 덩이’의 완충제 역할로 끝맺음이 무리 없이 산뜻하다. 더 이상의 이야기는 사족(蛇足)이 될 것 같아 시인의 말을 인용해본다.
“시인은 세상의 틈새와 마음의 틈새를 들여다보는 사람이고 매미를 닮았다. 매미는 자아의 껍질을 벗고 시인처럼 노래한다. 벗어놓은 허물에는 갈라진 틈이 있다. 우화등선(羽化登仙)의 흔적이다. 그 틈새로 들여다보이는 폐허는 한때 삶의 온기가 가득했던 곳이다. 하지만 그 폐허가 존재하므로 매미는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갔다.”(<틈새의 여유와 희망> 『시와소금』2023. 봄호)
『적막이 오는 순서』에는 아름다운 틈새, 잊혀진 틈새, 마음의 틈새를 들여다보고 따듯한 인간애를 바탕으로 시로 승화시킨 작품들이 많이 실려있어 ‘틈새의 시학’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산 정상에서 골짜기로 가속도 붙은 바람
동구 밖 방풍림 지나면서 한풀 꺾이고
돌담을 지나면서 엉거주춤 하더니
창호지에 달린 작은 오두막집 문 앞에서 그만
주저앉고 말아
마음껏 지나도록 만든
큰 틈새 작은 틈새 촘촘한 틈새
차례로 지나면서 제풀에 쓰러진 것
틈새가 바로 함정
좁은 유리문으로 내다보면서
사람도 무도 바람 들면 안 된다 하시며
토닥토닥 할머니 손길에
새근새근 잠자는 손주들이 있었다는,
- 「바람이 잠든 전설」 전문
‘틈새’의 사전적 정의는 “벌어져서 사이가 난 자리, 간격”를 말한다. 시간적 사이를 말하는 겨를, 여유의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또 ‘틈’이란 메워야 정상 복구가 되는 대상으로 경계의 의미를 포함하기도 한다. 그런데 「바람이 잠든 전설」 에서는 “틈새가 바로 함정”의 의미로 쓰여 새롭게 읽혔다. 시의 배경은 “언제나 가고 싶어/ 두 손 모아지는 곳”, 향토적 정서가 물씬한 「고향」 풍경이라 짐작해본다. 산 정상에서 골짜기로 내려오면서 가속도 붙은 바람이 큰 틈새, 동구 밖 방풍림을 지나면서 한풀 꺾이고 작은 틈새, 돌담을 지나면서 엉거주춤 하더니, 촘촘한 틈새, 오두막집 창호지문 앞에서 주저앉고 만다. 바람이 “차례로 지나면서 제풀에 지쳐 쓰러진 것”의 연유를 “할머니 손길에 새근새근 잠자는 손주들”에 두고 있다. 조승래 시인이 우리를 할머니의 따듯한 품속에서 잠들 수 있는 정겨운 고향의 평화롭고 아늑한 작은 오두막집으로 초대한 것이다.
이처럼 ‘틈새’의 변주로 빚어내는 시 세계가 다양한데 한결같이 사랑이 넘치는 따듯한 포용력을 보여준다.
바위 벼랑 틈새를 열고 소나무가 꿋꿋이 버티고 있듯
시멘트 벽돌 틈을 비집고 마른 씨를 날리는 민들레
- 「우리들의 임계점」 부분
지구상의 모든 생명들이 태어나서 살다 죽고 태어나기를 반복하는 가장 큰 틈새는 하늘과 땅 사이로 이동순 시인은 이를 ‘장엄한 틈새’라 불렀다.
틈새에 수없이 들락날락 했지요
더러는 땅속으로 가고 일부는 하늘로 갔어요
―「인칭의 거주지」 부분
이 밖에도 사회 부조리를 풍자한 「벌초 대행」 「천하지대본야」를 비롯해 생명 존중의 시 「초록의 소유권」 「더부살이」, 깨달음의 화두를 던지기도 하는 「연꽃」 「허공의 통찰」 등, 재미있게 읽히면서도 우리의 사유를 보다 넓고 깊게 가꾸어주는 시편들이 많다.
조승래 시인은 경영인으로서 성공한 경영학 박사이기도 하다. 2010년 『시와시학』으로 등단해서 『청다오 잔교』(2015년 세종도서 문학 나눔) 등 8권의 시집과 시선집 『수렵사회의 귀가』 등을 상재했다. 영남문학상, 계간문예문학상, 『어느 봄바다 활동성 어류에 대한 보고서』로 조지훈 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