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바빙크 {개혁교의학} 중생론은 “혼란스러운 중생론”인가?
윤영상 (2016년 4월 30일 오전 1:27)
미국 리버티신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으셨던 예장 합신 갈릭 목사 견해들을 인용해 아직까지 교묘하게 거짓말을 지어내는 박채동 씨 글이 어쩌다 눈에 들어오면 안타깝기만 합니다. 간간히 영문도 모르고 박채동 씨 글을 읽는 분들이 그것이 거짓말인지 모르고 오해를 할까 싶어 간단하게 몇 자 적습니다.
연장적 중생론이 무엇인가? 핵심 두 가지로 요약합니다.
A) 좁은 의미의 중생(원인)과 회심(결과)을 하나의 중생으로 간주하며,
B) 중생과 회심 사이의 간격이 택자마다 달라서(환경이) 간격이 순간적일 수도, 점진적일 수도 있다는 핵심 프레임(뼈대)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프레임은 개혁교회 회심론 공통 특징이기도 합니다.****
벌콥 {조직신학}에서도 바빙크 {개혁교의학}에서도 순간적일 수도 있고, 점진적일 수도 있다는 이 두 프레임을 항상 가르쳐 왔습니다. 이것이 전통 개혁교회 중생론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박채동 씨는 이러한 프레임을 “돌팔이”, “좌충우돌 논리오류”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프레임을 반대하는 갈릭 목사와 존 머레이 교수를 칭송합니다.
박채동 씨가 붙잡고 있는 동아줄이 튼튼한지 한번 볼까요?
(1) 갈릭 목사께서 바빙크 {개혁교의학} 중생론을 두고 “혼란스러운 중생론이다.”고 했다는 까닭으로 박채동 씨는 바빙크 중생론을 두고 마치 문제가 있는 것처럼 여깁니다.
(2) 그런데 2012년 7월 27일자 덧글 하나를 보면 “갈릭도 언약 백성의 경우는 연속적 중생론이 맞다고 합니다.”고 적혀 있습니다.
(3) 이름을 밝힐 수 없는 “국내 신학교수 열 명께 토론 내용을 보여주었더니 중생과 회심 사이가 순간적이거나 점진적일 수도 있다는 이 프레임을 가진 연장적 중생론을 지지할 수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고 하고, “어떤 교수는 이단적이라는 소리까지 했다.”고 합니다.
이거 어찌하면 좋을까요? 바빙크 중생론에 대한 갈릭 목사 평가가 과연 합당한 것일까요? 무엇 때문에 혼란스럽다는 것인지 그게 더 궁금하군요.
그리고 갈릭 목사가 “언약 백성의 경우는 연장적 중생론이 맞다.”고 했다는데, 2012년 7월 당시, 연장적 중생론 프레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군요.
그리고 국내 신학교수 열 명 모두 갈릭 목사와 같이 바빙크 {개혁교의학} 중생론이 “혼란스러운 중생론”이라서 바빙크 중생론을 지지하지 못하거나 혹은 이단적이라고까지 평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상황이 되는 것인데요.
<결론과 요약>
* 바빙크 {개혁교의학} 중생론에 대한 갈릭 목사의 평가: 혼란스러운 중생론이다. ㅡ이름을 밝힐 수 없는 국내 교수 10 명도 역시 “바빙크 중생론은 혼란스러운 중생론이다.”고 말한 상황이 되어버렸네요.ㅡ
* 연장적중생론: 순간적일 수도 있고, 점진적일 수도 있다.
* 갈릭께서 오해한 연장적중생론: 점진적이기만 하다. → 바빙크 {개혁교의학} 중생론을 혼란스러운 중생론이라고 치부해 버리는 신학적 성향과 연장적 중생론을 <점진적인 것>으로만 잘못 알고 써왔던 소리들을 과연 붙잡아도 되는 것인가?
p.s
우리에게 “과거의 주장을 수정했냐?”하는 분이 있는데, 수정한 것은 하나도 없음을 밝힙니다. 달라진 점은 최근래에 번역된 청교도들 글들과 바빙크 {개혁교의학} 자료들을 추가 보충해 포장한 것뿐이지 알맹이인 프레임은 같습니다.
{페북} 윤영상 목사님 담벼락에서 옮겨옵니다.
첫댓글 10명의 교수님들외에 조직신학에 정통하신 여러 목사님 교수님들중 아직까지 연중론이 옳다고 하신분이 없습니다.
그리고 바빙크도 연중론자가 아님을 이미 밝힌것 아닌가요?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는 언약의 자손 경우 어릴 때 중생하면 하나님 ‘말씀’으로서 복음을 이해할 수 있는 ‘지능(말: 언어)’이 자란 뒤에 회심한다.”는 이론, 이른바 “중생 뒤 점진 회심” 이론을 주장하는 ‘바빙크, 벌콥 목사님 중생론’은 오직 단 한 번 “순간 중생”을 주장합니다.
그런데 연중론은 “값진 생명의 씨앗”과 “새로운 본성”이 ‘동의어’임에도 “두 번 순간 중생: 수태(초기중생) 시 값진 생명의 씨앗을 주시고, 임신 기간을 거쳐, 출산(완전중생) 시 새로운 본성을 주신다.”고 주장합니다. ‘좌충우돌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바빙크 목사님과 벌콥 목사님 이른바 “중생 뒤 점진 회심” 이론은 故 존 머레이 목사님께서 해박한 원어실력으로 ‘20세기 개혁신학 보물’로서 ‘순간 단회 중생 시 확정(단회) 성화와 회심’이라는 ‘성경의 진리’를 확립하시기 전에 있었던 이론, ‘그릇된 이론’입니다.
{양무리 마을}에 ‘로빈슨크로소 <존 오웬이 말하는 좁은 의미의 중생과 회심의 예비단계와 회심>’가 있습니다. 로빈슨크로소 윤영상 목사님께서 ‘존 오웬 {개혁주의 성령론}’에 적힌 중생론을 해석하면서 ‘중생과 회심 사이에 간격(임신기간)을 둔 연중론 프레임’으로 존 오웬 목사님 중생론을 해석하는 나머지 ‘중생’과 ‘회심’ 사이에 청교도 신학자들 ‘중생-회심’을 위한 ‘예비(준비) 은혜’를 넣어 동굴 속 미로에서 계속 헤매며 빠져 나오지 못하고 계십니다.
청교도 신학자들께서 ‘중생과 회심을 동시 사건’으로 보셨다는 것을 머릿속에 ‘각인’해 어서 빨리 ‘연중론 동굴 미로’에서 빠져나오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바빙크와 벌콥은 회심과 중생을 혼용해서 썼는데 그 의미를 잘 봐야하는데 연중론주장자들은 그런것들을 무시하시는걸로 압니다.
사계님/ 양무리 마을에서 연중론 토론할 때에 손성은, 윤영상, 노승수 목사 들이...
연중론(연속적 중생론)은 “소명(처음 임신기간 : 중생)에서 회심, 칭의 후에 완성된 중생이다” 라고 하지 않았나요?
‘피터 마스터스 {영혼의 의사}’에 적힌 연중론 프레임은 다음과 같습니다. 물론, 아래 ①에 적힌 “값진 생명의 씨앗”과 ④에 적힌 “새로운 본성”은 ‘동의어’입니다.
① 회심 1단계: 수태(초기중생) = 하나님만의 단독 순간 사역 = 하나님께서 예정된 자에게 ‘값진 생명의 씨앗’을 뿌리심. →
② 회심 2단계: 임신 초기에서 중기 = 태아가 죄에 대해 각성하고 죄에 대해 확신함. →
③ 회심 3단계: 임신 중기에서 말기 = 죄인임을 안 태아가 참된 회심(믿음과 회개)을 위해 ‘믿을까, 말까? 회개할까, 말까?’ 분투하는 과정으로서 거짓 회심을 되풀이함. 이 거짓 회심이 점차 거진(nearly) 회심으로 자라나 참된 진리를 추구해 참된 회심의 열매를 맺음. →
④ 회심 4단계: 출산(완전중생). 즉, 새 출생과 칭의 = 하나님만의 단독 순간 사역 = 임신 말기에 참된 회심을 한 태아에게 하나님께서 ‘새로운 본성’을 주셔서 태어나게 하심. →
⑤ 회심 5단계: 간난아이가 ‘성령님께서 자신을 하나님 자녀로 인치셨다.’는 사실을 의식하며 구원을 확신함.
③에 “참된 회심의 열매”가 있습니다. 그리고 ④에 새 출생과 칭의가 있습니다. 그래서 2012년 여름 {양무리 마을} 연중론 비평 초반 때 손성은 목사님께서 ‘믿음(참된 회심)은 중생에 선행한다.’는 알미니안 주장을 하신 것입니다. 즉, “믿음은 중생에 선행한다는 개혁신학자도 있습니다.” 하신 것입니다.
{페북} 윤영상 목사님 담벼락에서 윤영상 목사님께서 저를 두고 “연중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거짓말을 지어내 거짓증거를 한다.”고 하셔서 {영혼의 의사} Text를 적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도자의 신실함을 더 견고케 해 주기 위해 전도설교라는 매개체를 이 단계에서 사용하십니다. 그 결과 그는 거리낌 없이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사역을 전적으로 신뢰하게 됩니다.≫ → {영혼의 의사} 65쪽~66쪽에 있는 문장으로서 <회심 3단계> 마지막 문장입니다.
≪신실한(참된) 회개와 믿음의 직접적인 결과는 구원의 넷째 단계인 칭의와 의식적인 새 출생이라는 동시 사건인데 이것들은 순간적으로 일어납니다. ···(중략)··· 이때 참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명백하게 새로운 본성(a new nature)을 받게 되고 상당한 정도로 확신하게 됩니다.≫ → 바로 위 문장과 이어지는 문단입니다. 즉, {영혼의 의사} 66쪽에 있는 문단으로서 <회심 4단계> 첫째 문단입니다. 가로 속 “참된”은 이해를 돕기 위해 제가 썼습니다.
“참된 회심의 결과는 새 출생이다.” 즉, ‘참된 회심은 새 출생을 낳는다.’와 “참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새로운 본성을 받게 된다.”는 주장은 당연히 “참된 회심은 중생을 낳는다.”고 주장하는, “믿음은 중생에 선행한다.”고 주장하는 알미니안 주장입니다. 즉, ‘행위구원론’입니다.
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