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초석: 교회신문 > 제 1255호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 (마5:13~16)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마5:13~15).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리고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까요? 공식을 알면 문제는 풀리는 법, 그 답은 바로 뒤에 나오는 16절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착한 행실’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 하십니다. 착하고 바른 행실로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라는 말씀이지요. 착한 행실이 뭡니까? 바로 처세술입니다. 어떻게 처신하느냐, 언행심사가 어떠냐에 따라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가 행할 ‘착한 행실’ 중 몇 가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믿는 자는 온유해야 합니다.
‘오 모래여, 오 모래여, 내 사랑 모래여/ 나만이 아는 당신의 희생의 사랑에 할 말을 잊었다오/ 이것이 파도의 고백이라오/ 당신은 모래, 나는 파도/ 당신은 배요, 나는 노라오/ 우리는 예수가 맺어주신 영원한 천생연분이라오/ 오 사랑, 오 사랑, 우리는 사랑뿐이라오/ 지치고 상한 맘 안식이 있다면 오직 당신의 품이라오/ 영원히 당신만을, 당신만을, 당신만을 사랑하리라~’
제가 작시한 ‘모래와 파도’라는 곡입니다. 이 곡을 작시한 계기는 이렇습니다. 목회 초기, 여러 가지 일로 마음이 괴롭고 힘들 때 마음도 식힐 겸 혼자 제주도에 갔습니다. 제주 바닷가에서 상념에 잠겨있는데, 거센 파도가 밀려왔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위에 부딪히니 파도가 자지러지게 소리를 내고 아파하며 물러가고, 받아친 바위도 눈물을 뚝뚝 흘렸습니다.
반면에 눈을 돌려 모래사장을 보니 같은 세찬 파도가 몰려와도 모래는 그것을 다 안아 잠재우고 물방울을 만들며 방글방글 웃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곳으로 달려 내려갔습니다. ‘아~ 노를 되받아치지 않고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모래 같은 사람이 되어야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손바닥도 마주치니 소리가 나는 겁니다. 그러나 내가 온유해지면, 내가 모래처럼 부서지면 세찬 파도도 품을 수 있고, 거센 분노도 가라앉힐 수 있습니다. 문제는 내가 바위라 맞받아치니 가정이, 사무실이, 교회가 시끄러운 겁니다. 그러니 맛을 잃은 소금이 되고, 불을 밝혀 말 아래 두는 격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 ‘온유’란 따스할 온(溫), 부드러울 유(柔)입니다. 양지에 사람이 몰리듯 내가 온유한 자가 되면 내 주위에 사람이 몰립니다. 회사에서 내가 온유한 자가 되면 동료들이 달리 볼 것이고, 학교에서 내가 모래가 되어 바위 같은 자를 품어주면 ‘역시 예수 믿는 자는 달라.’ 할 겁니다. 가정에서도 그리하면 믿지 않는 아내나 남편, 시댁 식구가 ‘우리 마누라가 믿는 예수, 우리 며느리가 믿는 예수를 믿어볼까?’ 합니다(벧전3:1~4).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11:29)고 하신 예수님은 자기를 죽이려는 자들 앞에서도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계셨고, 하나님의 아들인 자기를 십자가에 매달아 놓고 조롱하고 모욕하는 자들 앞에서조차 맞받아치지 않으시고 끝까지 참으셨습니다(히12:2). 그래서 결국 승리하셨고, 뜻을 이루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조그마한 일에도 버럭 화를 내고, 노를 발하니 쓸모없는 소금처럼 버려져 숱한 사람들의 발에 밟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의인과 악인을 네게서 끊을터이므로 내 칼을 집에서 빼어 무릇 혈기 있는 자를 남에서 북까지 치리니 무릇 혈기 있는 자는 나 여호와가 내 칼을 집에서 빼어낸 줄을 알찌라 칼이 다시 꽂혀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하라”(겔21:4~5) 하실 정도로 혈기 있고, 분노하는 자를 싫어하십니다. 그러니 온유한 자가 됩시다. 혈기나 분노는 제2의 가인을 만들 뿐입니다. 모세처럼 천하의 온유한 자가 되어 봅시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16:32).
둘째는 상대를 잘 대접해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7:12)는 말씀은 인생의 황금률 (黃金律)입니다. 황금처럼 고귀하고 변하지 않는 그리스도교의 윤리관이라는 겁니다. 이 말씀은 남에게 악을 주면 내가 악을 받게 되고, 남에게 사랑을 주면 나에게도 사랑이 온다는 말씀입니다. 남편을 왕 대접하면 아내인 내가 왕비 대접을 받지만, 남편을 하인 다루듯 하면 결국 나도 하녀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푸줏간을 하는 김선택이란 자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고기를 사러 왔습니다. 그는 푸줏간에 들어서자마자 “어이, 개똥아. 고기 두 근만 줘.”라고 했습니다. 개똥이라 불린 김선택은 고기를 잘라 종이에 말아주었습니다. 바로 그때 다른 사람이 또 고기를 사러 들어왔습니다. 그 사람은 “김 서방, 고기 두 근 주시게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김선택은 “예~”하고는 고기를 잘라 종이에 말아주었습니다. 먼저 들어온 사람이 흘낏 보니 같은 두 근인데 자기 것보다 양도 많고 육질도 훨씬 좋아 보였습니다. “야, 개똥아. 똑같은 두 근인데 왜 이리 달라?” 하고 소리를 지르자 김선택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를 수밖에요. 그건 개똥이가 준 것이고, 이건 김 서방이 드린 거니까요.”
그럼요, 대접받으려면 상대를 대접해야 합니다. 정죄 받지 않으려면 정죄하지 말고, 비판받지 않으려면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울러 손 대접도 잘해야 합니다. 남에게 베풀 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인색한 자식은 부모도 싫어한다는데, 남에게 인색하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이번 세부집회에서 우리 일행은 아주 융숭한 대접을 받고 돌아왔습니다. 그 원천이 무엇인가 하면 집회를 주최한 세부한인회장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 우리가 최고로 대접했기 때문입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눅6:38)는 말씀은 진리입니다. 아브라함이 천사를 극진히 대접하더니 늙어서 아들을 얻지 않습니까(창18)?
셋째, 작은 일에도 충성되어야 합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눅16:10). 이 말씀은 제 인생철학이자 목회철학입니다.
지극히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하면 주인이 큰일도 망설이지 않고 맡긴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회사 일을 내 일처럼, 내가 주인인 것처럼 시간을 도적질하지 말고 매사 최선을 다해 임해야 합니다. 그 일이 비록 작은 것이지만, 그 일로 인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하여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하고 사람들에게 하듯하지 말라”(엡6:5~7).
여러분, 나의 온유함, 나의 인격적 대접, 나의 충성으로 인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습니다. 마음은 원인데, 힘들다고요? 성경에는 진정한 착한 행실은 성령의 열매임을 말씀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면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가 맺힙니다(갈5:22~23). 성령으로 살면 성령으로 행하게 되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하나님께 무한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엡5:9). 할렐루야!
될 성 싶은 나무 떡잎부터 다르다
네 신앙은 짝퉁이냐 명품이냐?
♣ 은혜로운 찬양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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