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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가버나움에서 발생한 사건 하나를 소개한다(2:1, 5:1)
가버나움은 갈릴리 호수 북쪽 끝에 있는 마을이다.
그리고 가버나움은 예수님 사역의 핵심 도시였다.
이곳에서 예수님은 많은 사역을 하셨다.
세리 마태를 제자로 삼았고, 백부장의 하인을 살렸고, 들것에 실려온 중풍병자를 살렸고, 다 죽어가던 베드로의 장모를 살렸다.
그럼에도 이곳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았다.
나중에 예수님은 가버나움이 멸망할 것이라고 저주하신다.
은혜를 받고도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당한다. 은혜를 당연하다고 여기지마라.
은혜를 당연하다고 여기는 자들을 배은망덕하다라고 표현한다.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앞에서 배은망덕하지 않기를 바란다.
오늘 본문을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기 위해 3:20-30절 까지를 읽어보자.
정리하자면, 이렇다.
예수님께서 12제자들을 선임하신 후에 휴식을 취하고자 어느 집으로 가신다(20)
"집에 들어가시니"를 "집에 돌아오시자"로 해석(공동번역본)
하루 사역을 마친 후 예수님께서 퇴근하셨던 것이다.
하지만 퇴근후에도 예수님은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무리들이 몰려들어 저녁식사할 시간도 빠듯했다(20)
이들 무리중에는 예수님의 친척들이 있었다(21)
이들은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데리러 왔던 것이다(21)
유대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미쳤다고 거짓소문을 퍼뜨렸기 때문이다(22)
친척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에 예수님은 자신을 미쳤다라고 루머를 퍼뜨린 유대종교지도자들과 논쟁 중이었다(23)
"예수께서 그들을 불러다가"
그래서 자신을 찾아온 친척들을 만날 수가 없었다.
예수님과 친척들의 만남은 성사되지 못했다.
이번에는 예수님의 가족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님의 동생들이 예수님을 찾아왔다(31)
나사렛에서 가버나움까지의 거리는 약 50Km 정도였다.
성인 걸음으로 하루 반나절 정도의 거리이다.
친척들이 나사렛으로 돌아가서 예수님의 가족들에게 예수님의 근황을 전했던 것 같다.
그러자 예수님의 가족들이 예수님을 찾아왔던 것이다.
이때에 예수님 아버지에 관한 정보는 기록되지 않았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예수님 아버지 요셉이 일찍 사망한 것으로 추측한다.
이렇게 예수님에게는 부모님이 계셨고 동생들이 있었다.
예수님은 다둥이 가정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예수님은 아버지가 일찍 사망함으로 인해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하느라 30살이 될 때까지 가정의 경제를 책임지느라 결혼하지 못했을 것이다.
예수님 아래로 여려명의 남동생과 여동생이 있었다.
참고로, 카톨릭에서는 예수님에게 동생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래와 같이 해석한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신 이후에는 더 이상 출산을 하지 않았다고 해석한다.
요셉이 후처를 얻어서 예수님의 동생들을 출산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러니깐 예수님만 동정녀 마리아의 소생이고, 예수님 동생들은 모두 후처의 소생이라는 해석이다.
가톨릭 교리는 마리아를 동정녀로 추앙할 목적으로 이런 추론들을 만들었다.
어쨌든 예수님의 가족들 역시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을 믿었던 것 같다.
수년 전에 집을 떠난 예수님이 미쳤다고 하니,
예수님의 가족들은 걱정이 되어 예수님의 형편을 살펴보러 온 것이다.
가족들이 밖에서 사람을 통해 예수님에게 자신들이 찾아왔다는 사실을 알렸다.
집회 중에 이 소식을 접한 예수님은 대중들 앞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라고 반문하신다(33)
아주 충격적인 장면이다. 예수님께서 반인륜적인 발언을 하셨다.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이나 오늘날 이 구절을 읽는 독자들 모두가 이 대목에서 당황스러워지고 어리둥절해진다.
그리고 예수님은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내 어머니요 내 동생들이다"라고 선포하셨다(34)
이 사건이 주는 교훈은?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가족의 개념을 소개하셨다.
일반적으로 가족은 혼인과 혈연과 입양으로 이루어진다.
가족?
사전적인 의미) "혼인과 혈연과 입양으로 이루어진 일정 범위의 인간관계"
전통적인 가족 개념의 핵심어는 "혼인" "혈연" "입양"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새로운 가족 모델과 가족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 두 가지를 제시하신다.
35절을 다 같이 읽어보자. 요절말씀이다.
"하나님의 뜻"과 "누구든지"이다(35)
가족의 <본질>과 <범위>를 가리킨다.
1) "하나님의 뜻"(가족의 본질)
"본질"? 근본적인 성질.
<가족>의 근본적인 성질은 무엇인가?
서울대학교 철학연구소에서 발간한 백과사전에 의하면 <사랑>이라고 한다.
이에 수긍이 간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나 가족이 시작되었고 그렇게 시작된 가족은 사랑으로 유지되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하나님은 가족의 본질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하신다.
가족은 하나님의 뜻으로 출발해서 하나님의 뜻으로 종결이 된다.
종종 사랑으로 시작된 가족이 비극으로 끝이나는 경우를 보게된다.
그 이유? 하나님의 뜻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2) "누구든지"(가족의 범위)
가족의 범위는 자신과 배우자 그리고 형제자매와 직계혈족(부모와 자녀)을 가리킨다(민법 799조)
이렇게 가족의 범위는 명확하고 확정적이다.
동시에 가족의 개념은 폐쇄적이다.
가족밖에 있는 사람들은 절대로 가족이 될 수 없다.
한번 가족은 영원한 가족이다.
가족 구성원은 바뀌거나 변하지 않는다.
민법이 말하는 가족은 정해져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족의 범위를 확대하신다.
<누구든지>? 특정한 사람이 아닌 막연한 사람을 가리키는 인칭대명사이다.
누구든지 가족이 될수 있다고 선언하신다.
이렇게 하나님이 제시하신 가족의 범위는 개방적이다. 열려있다.
누구나 가족이 될수 있다.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메시지!
"혈통이나 혈연으로 사람을 구별하지 마라"
사람을 구별하는 것을 차별이라고 말한다.
모든 비극이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혈통으로 사람들을 차별했다.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민족외 다른 민족을 차별했다. 혈통이 다르다는 이유로.
자기 민족 외에는 모두 다 이방인이라고 불렀다.
심지어 유대인들은 동족이었던 사마리아인들까지 차별했다.
같은 민족이었지만, 혼혈이라는 이유로 사마리아인을 차별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는 상종도 하지 않았다.
이런 관념을 이들은 선민의식이라고 말했다
그러다 역전이 일어난다. 차별을 하다가 차별을 당한다.
2차 대전 당시 게르만민족이 유대인들을 차별하고 학살했다.
혈통이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을 차별하기 시작하면 비극도 함께 시작된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사람들을 차별하고 차별을 당하고 있다.
모든 비극이 차별에서 비롯된다.
예수님은 혈통으로 사람을 차별하고 가족의 개념을 혈통으로 규정짓는 유대인들을 향해 새로운 가족 개념을 선포하신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가족이기주의에 빠지지 말라는 교훈이다.
혈연에 집착하면 이기주의에 빠지기 쉽다.
유대인들은 혈연으로만 가족이 구성된다고 생각했다.
우리 민족도 마찬가지다.
혈연으로만 가족이 구성될 수 있다고 단정 짓는다.
우리는 핏줄로 가족과 가족이 아닌 사람들을 구별한다.
같은 핏줄이 아니면 가족이 아니다고 단정 짓는다.
그러므로 자기 가족 외에는 모두가 남이다.
남이라는 의미는 경우에 따라 적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 민족은 유달리 핏줄의식이 강하다.
"단일민족" "백의민족"이라는 용어를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시절도 있었다.
자기 가족만 가족이고, 다른 가족은 가족이 아니다고 생각한다.
이런 현상을 가족 이기주의라고 말한다.
내 가족의 편리만 우선이고, 다른 가족에 대해서는 전혀 배려하지 않는 현상을 가리킨다.
며칠 전에 저희 부부가 TV에서 심야영화를 보았다.
아주 끔찍한 미국 영화였다.
어느 여성 작가가 외딴집을 빌려 작품을 구상하려고 홀로 시골마을로 이사를 왔다.
그런데 그 마을 보안관과 악한 무리들이 작당을 해서는 그 여성에게 육체적인 폭행을 가했고
나중에 그 여성이 이들을 찾아가서 응징한다는 일종의 사이다 영화이다.
그 영화 중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보안관과 그 무리들이 차례로 그 여성을 폭행하던 중에 보안관의 초등학생 딸로부터 전화가 온다.
그러자 그 보안관이 바지를 주섬주섬 챙겨 입고 범행현장에서 빗겨나 자신의 딸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조금 전까지 연약한 여인을 공개된 장소에서 육체적 폭행을 가했던 흉악한 모습은 사라지고
아주 천사 같은 목소리로 다정 다감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딸과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를 마치자마자, 다시 흉악범으로 돌변했다.
그 여성에게로 달려가 아주 악랄한 방식으로 육체적 폭행을 가한다.
자기 딸에게는 그렇게 잘하는 아버지가 다른 여성에게는 서슴없이 악랄한 짓을 행했다.
가족이기주의가 만들어 낸 극단적인 장면이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가족의 위기라는 말을 한다.
가족의 해체를 조장하는 각종 범죄들이 연이어 발생하기 때문이다.
존속살해, 유산상속으로 인한 범죄등..
이런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전문가들이 사건 발생의 원인을 분석한다.
가해자들이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거나 차별을 받았기에 이런 범죄를 저지른다고 해석한다.
분명 이런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또 하나의 요인이 있다면,
가족의 위기를 조장하는 여러 요인들 중 하나가 바로 가족 이기주의이다.
지나친 핏줄의식이다.
자신의 가족을 위해서라면 다른 가족들에게 위해를 가하는 일을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가족 이기주의가 바로 가족 제도를 해체시키는 요인중 하나임이 분명하다.
우리가 한 가족이 된 것은 분명 하나님의 축복이다.
수많은 사람들 중 우리 서로가 한 가족을 이루고 사는 것은 축복임에 분명하다.
이것을 부정하고 부인하자는 것이 아니다.
지나친 핏줄의식을 경계하자는 것이다.
자신의 가족만 가족이고 다른 이의 가족은 가족이 아니다라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사는 이 사회에 사랑과 정의가 있을 수 있을까요?
같은 핏줄이라고 같은 가족이라고 모든 실수와 잘못을 아무런 징계 없이 용납하거나
나의 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이들을 부정하고 거절한다면
우리가 사는 이 사회의 근간이 무너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가정의 달을 맞아 지난 주에 이어 두 번째로 가족을 생각하며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가버나움에서 새로운 가족 모델을 제시하신다.
그리고 오늘을 사는 우리들을 향해 가족의 해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셨다.
영적 가족의 모델을 제시하셨다.
육적 가족은 혈연으로 구성되지만, 영적 가족은 믿음으로 구성된다고 설명하신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겠다고 결단하는 모든 이들이 우리들의 영적가족이 될 수 있다고 선언하신다.
우리 모두는 혈연과 지나친 핏줄의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가족 이기주의를 무너뜨려야 한다.
그래야 우리 가족이 살고 교회가 살고 우리 사회가 회복될 수 있다.
상상해 보라.
자신의 가족만큼 이웃의 가족을 사랑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다툼과 분쟁이 사라질 것이다.
아파트 안에서 층간 소음, 벽간 소음 문제가 사라질 것이다.
한국교회 성도들이 자신의 교회 성도와 다른 교회 성도 모두를 자신의 영적 가족이라고 생각한다면
한국교회는 회복될 것이 분명하다.
먼저, 우리교회 성도들이 다른 교회 성도들을 자신의 영적 가족이라고 인정하시기를 원한다.
그리고 다른 교회 성도들이 우리 교회 성도들을 자신의 영적가족으로 받아들이게 되기를 기대한다.
이렇게 한국교회 성도 모두가 영적가족이 되는 날을 고대한다.
영적 가족이 되는 날이 한국교회 회복의 날이 될 것이다.
아마 그렇게 되면 수영로교회 성도들이 우리 교회 앞에서 전도하는 일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들 말한다. 피보다 진한 것이 믿음이다.
그래서 믿음아래 모여있는 교회 공동체는 가족공동체이다. 피보다도 더 진한 공동체이다.
예수님은 교회가 새로운 가족 그리고 영적 가족의 모델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들이 우리들의 영적 가족이다.
미준교회는 영적가족이다.
우리 공동체가 피보다도 진한 영적가족이 된 것을 선포한다.
교회 밖에서도 여러분의 새로운 가족들이 늘어나기를 축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