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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 승무원으로 오래 동안 항공사에서 일을 했던 미즈키 아키코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퍼스트 클래스 객실 담당으로 16년 동안 일을 했습니다. 그는 그런 경험으로 {퍼스트 클래스 승객은 펜을 빌리지 않는다}라는 흥미로운 책을 내었습니다. 그 책에는 퍼스트 클래스를 사용하는 손님들의 특징을 설명했습니다.
“손에 책이, 특히 역사책이 들려 있다. 펜을 빌리지 않는다. 계속 메모한다. 낯선 사람을 경계하지 않는다. 자기만의 명품이 있다”
그러면서 명품에 대한 설명을 합니다.
“성공한 사람들의 특징은 세월의 흔적이 담긴 자신만의 명품을 늘 지니고 있었다. 브랜드가 명품이라는 것이 아니다. 비싸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30년 전 부인이 사준 지갑, 딸이 만들어 준 자수 열쇠고리, 아버지가 선물해 준 만년필, 라이터, 도장, 시계에 이르기까지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추억이 담긴 물건을 소중히 지니고 있었다. 자신의 물건을 보면서 항상 초심을 되새긴다고 한다. 자신의 오래된 만년필을 통해 어려운 시절 자신을 위해 헌신한 아버지를 떠올리고 늘 초심을 다지며 계약을 하는 사람이 성공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퍼스트 클래스 승객이 곧 성공한 사람을 상징하지는 않습니다. 인생의 목표가 퍼스트 클래스 승객이 되는 것이 되서는 안됩니다. 그렇지만 퍼스트 클래스 승객들에게서 배울 수 있는 점이 있습니다. 이들이 명품을 소지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이 지닌 것은 진한 삶의 스토리가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자신만의 경험, 감동적인 스토리를 소중히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성공자에게는 감동적인 자기의 이야기(스토리)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는 스토리보다 스펙에 치중하는 시대를 살아가고자 합니다. 남들로부터 ‘스펙이 좋다’라는 소리를 들으려 합니다. 다들 그렇게 살아가니, 어쩔 수 없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 젊은 세대는 더 여기에 집중해 있습니다. 그래서 더 높고 높은 스펙을 향해서 강박관념을 가집니다. 그래야 이름있는 재벌 회사에 취직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남과 비교해서 그러지 못하면 루저(looser)가 되어 버립니다.
예, 그렇습니다. 스펙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 자신만의 이야기, 나만의 경험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있는 삶을 추구하는 자는 의미있는,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스펙은 ‘최초, 최대, 최고’를 지향합니다. 그렇지만 스토리는 ‘유일한, 독특한, 특별한’ 과 같은 말을 좋아합니다.
스펙은 나의 성공을 내세우지만 스토리는 나의 약점이 오히려 경쟁력이 되기도 합니다.
스펙은 남을 경쟁 생대로 보고 나 한 사람만 기쁘게 하지만, 스토리는 모두를 기쁘게 합니다. 스토리 속에서는 모두가 주인공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스펙을 추구하면 열등감과 상대적 박탈감에 사로잡히고 행복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스토리가 있는 삶을 추구하면 자신의 삶에 자긍심을 가지고 자존감 있는 삶을 추구하는 주인공의 삶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십니다. 그렇지만 그가 인간의 옷을 입고 오실 때의 스펙은 어떠했을까요? 화려했습니까? 정말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우선 외모를 떠올려 보십시오. 영화에서 혹은 성화에서 자주 보았던 예수님은 어떠합니까?
적당하게 큰 키에 조각 같은 몸매, 어깨까지 내려오는 윤기 나는 곱슬머리, 잘 생긴 이미, 고운 피부에 광채 나는 큰 눈, 배우같이 잘 다듬어진 턱수염, 너무나도 서구적인 잘 생긴 미남의 이미지입니다.
그렇지만 이사야서에 예수님의 모습이 어떠하다고 합니까?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2-3)
이 구절의 말씀은 예수님의 외모를 표현한 구절이라고만 볼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인간적인 매력이 넘쳐나는 외모의 소유자가 아니었음을 보여주기에는 충분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출생의 백그라운드를 보십시오. 예수님은 왕궁이나 귀족의 가문에서 소위 금수저로 태어났습니까? 아닙니다. 목수의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예수님은 완전 흙수저입니다. 그러니 그 당시에 부유한 귀족의 자녀들처럼 세계의 중심지인 로마에 유학을 갔겠습니까? 문화 예술의 중심지 애굽의 알렉산드리아에 견학을 다녀왔겠습니까?
목수의 아들로 살아야 했던 예수님의 얼굴은 뜨거운 지중해의 햇살에 그을린 얼굴을 했을 것입니다. 손은 막노동을 하는 굵게 마디진 거친 삶의 흔적으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스펙은 보잘 것 없었습니다. 우리의 구주 예수님도 세상에 계실 때에 내세울 만한 스펙 하나 없었던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떠했을까요? 예수님께서 따르는 많은 무리들 중에 택하여 부르신 사도들을 보십시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은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아 생계를 유지했던 어부들입니다. 마태는 매국노라 손가락질을 받는 세리였습니다. 셀롯이라 하는 시몬은 유대 독립 투쟁을 위한 과격한 열심 당원이었습니다.
열 두 제자들의 스펙을 가지고 오늘날의 재벌 기업들의 입사 면접을 본다면 통과할 사람은 아무도 가룟 유다 정도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시어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하심에 있어서 우리의 스펙을 보고서 택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의 화려한 스펙의 삶보다는 스토리가 있는 삶을 더 원하십니다.
“나는 지금 너를, 너의 스토리가 있는 삶을 사랑하고, 지금의 너를 통해서 기뻐한다.”
예수님께서 골고다 동산에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에 우편에 있던 강도를 아시지요. 정말 땡 잡은 사람입니다. 평생을 자기 멋대로 살다가 마지막에 예수님을 믿고 천국에 가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천국에서도 후회하는 마음이 있다면 십자가의 한편 강도가 무엇에 대해 아쉬워하며 후회를 하게 되겠습니까? 그에게는 주님을 위해서 땀을 흘린 삶의 스토리가 없습니다.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깊이 사랑했던 추억이 없습니다. 예수님과 동행했던 나만의 삶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의 말씀 가운데 사도 바울의 고백을 다시 한번 들어보십시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 6:17)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고, 율법의 속박에서 자유하는 자가 되었음을 전합니다. 그는 편지의 말미에,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을 받는 자신을 설명하면서 낙망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하고 감사합니다. 그리고는 자기의 몸에는 예수의 흔적을 지녔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흔적’이라는 헬라어는 ‘스티그마’라고 합니다. 바로 ‘낙인’이라는 의미입니다. 중동지방에서 가축을 공동으로 관리하면서 기를 때에, 가축의 엉덩이에 벌겋게 달군 인장으로 화인을 만듭니다. 그래서 소유주(주인)이 누구인지를 구분케 했습니다. 옛날에 노예에게도 그렇게 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바울에게는 예수님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마오리들처럼 몸에 문신을 새겼다면 어떤 형태 모양의 문신을 새겼을까요?
다메섹 동산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으니, 그 얼굴을 기억하고자 예수님의 얼굴을 새겼을까요? 아니면 십자가를 새겨 놓았을까요? 여러분 같으면 무엇을 새길 것 같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런 문신과 같은 흔적이 그의 삶의 이야기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 속에 어떤 예수의 이야기가 있는지 고백을 들어보십시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23-27)
사도 바울에게 어떤 예수님의 흔적이 있었겠습니까?
그의 몸에는 돌팔매질과 몽둥이로 맞은 흔적이 있습니다. 먹지 못해 굶주리고, 여행의 여러가지 고충과 위험, 춥고 헐벗었던 흔적, 예수님을 사랑한 흔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흔적들은 바울에게만 있는 자신의 경험이요 흔적이요 예수님을 사랑한 스토리입니다.
여수에 가보셨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여수에 가면 ‘여수 밤바다’를 보려고 합니다. 여수 돌섬 전망대에서 바다를 내려다 보는데, 사람들이 많이 갑니다. 한 번 가 보십시오. 그리고 근방에 순천 국가 정원이 인기라고 합니다.
저는 여수에 가면 애양원이라는 곳에 갑니다. 거기는 옛날에 양성 나환자들의 집단 거주지입니다. 거기에는 순교하신 손양원 목사님의 묘지와 박물관이 있습니다. 지금은 요양원이 되어 있습니다. 25년 전에 청년 대학생을 데리고 수양회를 갔습니다. 거기서 요양원에 계시는 나병을 앓다 나은 분들이 여생을 보내고 있는데, 한 건물에는 낮 시간에 모여 찬송하며 시간을 보는 건물을 방문했습니다.
거기에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나병에 걸려서 나았지만 코가 뭉그러지고, 손가락 발가락이 다 떨어지고, 얼굴이 흉악한, 처참한 그런 모습의 노인네들입니다. 그분들이 모여 찬송을 하는데, 얼마나 힘차게 그리고 은혜롭게 하는지요.
그리고는 성경을 암송합니다. 거기 모인 분들 가운데는 신약을 다 암송하는 분들도 있다고 합니다. 한번 읽은 사람이 아니라 통째로 외우는 사람입니다. 이분들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말씀을 사랑하여서 읽고 암송하고 싶은데, 나병으로 인해서 눈이 멀었습니다. 그러니 점자 성경을 읽자니 손가락 마디가 떨어져 나갔습니다. 살아있는 감각이라고는 혀바닥과 귀였습니다. 그 분들은 침을 흘려가며 점자 성경을 읽고, 녹음 테잎으로 성경 말씀을 듣고 듣고 또 들으며 성경을 암송했습니다. 저는 그 광경을 보면서 참 부끄럽고 회개가 되었습니다.
저분들은 젊을 때에 천형과 같은 질병을 안고서 가족과 이웃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밀리고 밀려서 온 곳이 남도의 외딴지 여수였습니다. 인생을 원망하고, 비방하고, 모진 삶을 스스로 끊고 싶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지옥과 같은 그곳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말씀을 만나므로, 그분들의 일그러진 얼굴과 삶은 하나님의 역사, 예수님의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그분들을 보면서 저와 젊은 청년들은 감동을 받고 도전을 받고, 예수님을 만남이 무슨 의미인지를 듣고 보고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리더하시던 장로님께서 나와서 손양원 목사님께서 여기에 오셔서 어떤 일을 하셨고 순교를 하셨는지를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말미에 하셨던 말씀을 저는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손 목사님은 우리의 영원한 목사님이십니다. 손목사님은 5년을 우리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 5년이 길면 길고 짧으면 짧습니다. 그렇지만 그분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남긴 우리의 목사님이십니다”
다시 그 말씀을 새겨보면서, 저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반성합니다. 세월이 아니라 얼마나 농도 깊은 삶, 예수님의 사랑으로 살아가고 있느냐는 소리가 저에게 들려오면서 반성하게 합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랑의 깊이만큼 흔적을 가지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젊다는 것은 도전하고, 실패해도 다시 시도해도 될 시간과 여유을 가진 사람이 젊은이들입니다. 그러나 실패를 하면 만회할 시간과 여유를 가지지 못하는 사람은 나이를 떠나서 이미 노년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행복한 노년을 맞이하고 싶다면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깊이 사랑했던 스토리에 대한 추억이 많은 사람이 된다면 그는 분명 행복한 노년을 맞이한 사람입니다.
반면에 초라한 노년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과 동행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고 전부 자신의 욕심을 좇아 아둥바둥 살다가 삶의 마지막을 맞이한 노년입니다.
생체적으로 노년이 되었다고 희망이 없다고 실망하지 마십시오. 끝났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오늘이 바로 꿈 꿀 수 있는 남은 나의 생애에 가장 젊은 날입니다. 그러기에 얼마든지 지금 감동적인 스토리를 써갈 수 있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며, 헌신하는 스토리를 써갈 수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과 동행하는 나의 역사(history)는 하나님의 이야기(His story)가 됩니다.
스토리는 스펙으로 쓰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갈망하십시오.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위해 결단하며 나아가는 나만의 경험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스토리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루고 세워가는 교회 공동체에서 여러분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보십시오. 잊어지지 않는 감동을 주는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여러분과 저가 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