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금은보화, 명예, 권력, 건강...
살아있지 못하면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수 있으니 역시 사람에게 있어 가장 귀한 것은 목숨일 게다.
티끌 같은 세포가 생명이 되기 위해
정갈히 목욕재계한 부부가 원앙금침을 펴고 황촉 불을 끈 후 엄숙한 목소리로 “시작하시지요.” 공을 들이면 하나의 생명이 잉태되고, 복중 물침대에서 세상 편안한 자세로 꼬물거리던 살덩이가 10달이 차면 기진한 어미의 배를 째고 드디어 세상에 나온다.
눈도 뜨지 못했던 핏덩이가 젖 빨고 똥 싸지르며 버둥거리다가 어느 순간 벌떡 두 발로 서면 입을 못 다문 부모의 놀람&환희 속에 인생의 예습 단계로 들어선다. 미운 5살 예쁜 7살을 거쳐 글을 배우고 도리를 배우고 내 맘 같지 않은 인생의 쓴맛을 처음 맛보게 되는 15세에 도달하면 그간 살아남은 공을 치하 받으며 비로소 연치에 따른 애칭을 갖게 된다. 드디어 하나의 인생이 시작되는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아침에 주고받는 만나면 주고받는 인사는 목숨을 잘 보존하고 있느냐는 인사말에 다름 아니다. 이런 인사의 배후엔 (터부시하여 말은 않지만) 언제나 불쑥 찾아오는 죽음에 대한 경계가 있었다. 똥칠도 않고 80을 넘겨 버티는 요즘에야 별것 아니지만 예전에는 나이에 상관없이 죽음이 늘 가까운 곳에서 서성거렸다. 굶어 죽고, 앓아 죽고, 원인도 모르게 죽었다. 한 집안 열 자식 중 두엇 정도는 혼사도 치르기 전에 반드시 죽었다.
뻥이라고?
뻥 아니고, 구라 아니다. 실례로 살펴보자. 그것도 살아남는 것 외엔 걱정이 없었던 이씨 조선 왕족의 예로.
태종 이방원의 피 칠갑 덕에 태평성대를 구가했던 세종대왕. 그분의 18남6여 총 24명 자식 중 정실 소현왕후에게서 얻은 8남2여를 살펴보면...
정소공주 13세, 평원19, 광평20, 금성32, 영응34, 안평36, 문종39, 임영50, 수양52, 정의공주63.
열 분 대군&공주의 평균수명이 35.8세다. 왕족이 이러하니 평민과 노비는 언급할 필요도 없다.
죽음이 늘 가까이 있었기에 해마다 (태어난 기념이 아닌) 살아남은 기념으로 생일을 축하했다. 새로운 갑자(61세)를 맞이한 이가 있으면 집안은 물론이려니와 마을 전체로도 성대히 잔치를 치렀고 고을의 수령까지 방문하여 살아남은 공을 치하했다. 지금 생각하면 웃긴 이야기지만 예전에는 그랬다. 그만큼 살아남기가 만만치 않았다. 오죽하면 당나라의 두보가 <곡강이수(曲江二首)>에서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고 읊조렸을까.
朝回日日典春衣 조회가 끝나면 날마다 봄옷을 잡혀
每日江頭盡醉歸 매일같이 강가에서 만취해 돌아오네
酒債尋常行處有 술빚이야 가는 곳마다 늘 있는 것이지만
人生七十古來稀 인생 칠십은 예로부터 드물었다네
- <곡강이수> 중에서
청정 하늘 아래 살았던 선조보다 배기가스와 미세먼지를 마시고 사는 후손들이 장수하게 된 까닭은 아무래도 의학의 발달이 큰 몫을 했을 것이다. 더하여 풍부한 먹을거리와 건강을 챙기는 습관이 일조했으리라. 그럼에도 죽음은 여전히 우리들 곁을 서성거린다. 단지 몇 십 년의 유예기간을 허락했을 뿐이다.
인명은 재천.
만만해진 하늘과 쉬워진 세월을 살고 있는 덕에 요즘의 인생은 살아남기가 아닌 다른 것들에 주목할 수 있게 되었다. 평균 80세를 거뜬히 버티며 과연 우리는 무엇에 주목하며 살아가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