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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선지자란 / 새 언약의 일꾼 (최한나)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고후3:6] 말씀 아멘!
바울은 자신을 비롯한 일단의 사도들이 지니는 만족함의 기원을 하나님으로 고백하였을(5절) 뿐만 아니라 이어지는 본절에서는 그 하나님께서 그들을 새 언약의 일꾼으로 삼으셨다고 천명한다. 그렇다면 바울이 여기서 언급라고 있는 “새 언약”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새 언약”은 헬라어로 ‘카이네스 아데케스’를 번역한 말인데 여기서 ‘카이네스’는 본래 “새로운”이라는 뜻을 지닌 ‘카이노스’의 소유격이다. 그런데 헬라어에서는 “새로운”이라는 뜻으로 더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단어가 있다. 그것은 바로 ‘네오스’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언약의 새로움을 지시하는 형용사로서 보다 더 보편적으로 쓰여진 단어인 ‘네오스’를 사용하지 않고 ‘카이네스’를 사용한 것일까? 그것은 바울 당시 사용되던 ‘네오스’와 ‘카이노스’의 뉘양스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네오스’는 오직 시간적인 전후 관계에 있어 새롭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반면 ‘카이노스’는 그러한 의미와 더불어 지적인 차원까지를 포괄한다. 그러므로 바울이 여기서 “새 언약”이라 언급할 때 ‘카이네스’를 사용한 것은 이와 같이 옛 언약에 대비한 새 언약의 ‘질적인 우월성’을 강조적으로 나타내고자 한 데서 기인한 것이다. 그렇다면 ‘언약’으로 번역된 ‘디아데케스’의 원형 ‘디아데케’는 어떤 의미를 함축하는가? 이 단어는 본래 ‘마지막 유언’이란 뜻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 주지하다시피 유언이란 유언자의 죽음과 동시에 효력을 발생한다. 만약 유언자가 죽지 않는다면 그 유언은 사실상 그 기능을 수행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유언이란 항상 죽음이란 주제를 동반한다. 이러한 죽음 곧 피 흘림은 구약은 물론 신약에서도 중심을 이루는 주제이다.
옛 언약에서도 짐승의 피흘림을 통한 속죄가 이루어졌거니와 새 언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피 흘림을 통해 속죄가 완전하게 이루어진 것이다. 바울은 이미 고전 11:25에서 성만찬의 의의를 설명하면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적이 있고, 바울의 동역자였던 누가역시 자신의 복음서22:20에서 동일한 내용을 피력한 바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새 언약의 관점에서 옛 언약과의 대비 속에서 잘 설명하는 히브리서는 ‘언약의 피’ (출24:8 ; 히9:20 ; 10:29) 또는 ‘영원한 언약의 피’ (히13:20)라는 표현으로 이러한 새언약이 구세주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설명해 준다.
그러나 ‘디아데케’가 이러한 의미와 더불어 여기서는 ‘협정’의 의미도 지닌다. 협정은 소위 쌍방간의 합의에 의해 도출되는 협약을 지칭한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쌍방간의 ‘합의’만 강조된다면 이를 나타내는 원어 표현으로는 ‘쉰데케’라는 별도의 단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쉰데케’와 ‘디아데케’는 어떠한 점에서 다른가? 먼저 ‘디아데케’가 지니는 ‘합정’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협정”이란 절대적 권력을 지닌 편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상대편을 받아들이거나 거절할 수는 있어도 변경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제공한 계약은 바로 이와 같은 협정이며 쌍방이 동등한 조건 아래 맺은 협약은 아니다.
말하자면 ‘디아데케’는 ‘쉰데케’와 달리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적인 계약”을 가릴킬 떄 사용되는 표현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바 새 언약은 옛언약 곧 모세의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고, 성육신 하신 예수께서 죄인들을 구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렸으며, 바로 그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 십자가 보혈의 공로를 힘입는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받는다는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제정하신 협정이다. 바울은 바로 이러한 새 언약, 즉 복음을 전하기 위해 부름 받았다.
그렇다면 새 언약 곧 복음은 옛 언약 곧 율법에 비해 어떤점이 우월한가? 본절을 해석함에 있어서 오해하지 말아야할 것은 바울이 율법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롬7:10이하에서 바울은 율법이 거룩하고 선하며 생명에 이르게까지 한다고 인정하며, 롬10:5;갈3:12등 에서도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 로 살리라”고 언급하여 옛 언약이 추구하고 있는 율법관을 그대로 수긍한다. 그렇다면 율법에 대해 이러한 견해를 지니고 있는 바울이 여기서 율법의 무익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어떤 이유인가 ? 이에 대해 틴델 (Tyndae) 은 적절하게 말한다. “율법은 마음 가운데 그것이 명하는 것을 행할 욕망이 없는한 그것은 양심을 죽이고 저주하는 일밖에 모른다. 그러나 복음은 칭의의 실현을 이룬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전파되고 또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제시하신 약속들이 믿어질 때 성령께서마음에 들어오사 마음을 자유하게 하시며 율법을 행할 욕망을 주시며 율법을 마음가운데 생생한 것이 되게 하시기 때문이다.” 새 언약은 ‘영의 요구를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 구가 이루어지게’ (롬8:4) 하는 능력이 있다는 점에서 옛 언약보다 탁월한 것이다.
바울은 여기서 율법과 복음을 옛 언약과 새 언약으로 날카롭게 대조하면서 복음에 대한 율법의 열등성이나 율법에 대한 복음의 우월성을 본격적으로 논하지는 않는다. 다만 바울의 논점은 고린도 교회 내부에 침투하여 바울과 고린도 교인들사이를 이간하는 거짓사도들에게 있다.바울은 이미2:17에서 이들거짓사도들에 대해 언급한바있고 본절의 맥락 역시 이러한 거짓사도들이 추천서 운운하며 바울의 사도권에 대해 공박하고 있는 맥락의 연장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렴풋이 고린도 교회 내부에 침투해있던 이거짓사도들의 주장이 드러나고 있는 셈이다. 그들은 바울이 전한 새 언약의 복음보다는 옛 언약의 율법에 탐닉하는 유대주의자들로서 바울을 위시한 일단의 사도들이 “새언 약 의일 꾼들” 이라면 이들은 “옛언 약 의일 꾼들”이었다. 이러한 거짓사도들을 좌시할 경우고 린도교회가 율법주의로 회귀할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이의 위험성을 강하게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본절의 말씀은 율법과 새 언약간의 차이를 보여준다. 그러면 율법은 나쁜것일까? 아니다. 율법역시 하나님께로서 나온 것이기에 10절을 보면 “영광된 것”이다. 선한 것이다. 하지만, 율법에는 한계가 있다. 율법은 본절의 말씀처럼 영혼을 살리는 것이 못된다. 율법의 기능은 죄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새 언약은 다르다. 새 언약은 죄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새 언약의 핵심은 죄가 있어도 사랑으로 감싸안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새 언약은 살리는 것이요, 율법은 죽이는 것이라 했다. 여기에 우리를 향한 주님의 강력한 메시지가 있다.
성경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수 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데 누구보다도 열심히였다. 율법으론 흠이 없는 사람들이였디.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겐 아주 냉혹했다. 다시 말하여 그들은 율법을 지킴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을 깔봤다. 그리고 그들과 같지 않은 사람들을 종교적 교화란 명목으로 정죄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사람이 변하기보다는 틈이 더 생겼다. 따라서 그들은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의 말은 바르고 옳았지만 그 말엔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 없었다. 아무리 이것이 율법이고, 너희는 지금이 틀렸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말응 사람을 바르게 하지도 살리지도 못했다, 오히려 영적인 고아를 낳았을 뿐이다.
그런데 새 언약 시대가 열린 지 2천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바리새인처럼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죄를 지적하면 그 영혼이 변할것이라는 기대를 한다. 또 변화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도 답답해 한다. 하지만 가장 답답한 분은 예수님이다. 예수님꼐서는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죄인들을 정죄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병자와 죄인에게 사랑을 실천하려고 오셨기 때문이다. 그것이 새 언약의 시작이다. 정죄가 아닌 사랑이 인간의 영혼을 변화시키는 유일한 길이다. 이로 인해 우리도 구원을 얻어 새 언약 안에 있는 사랑이 곧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다. 그런데 서로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 신앙을 위한답시고 서로의 죄를 들춰내는 혈안이 되어 있다 더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자가 더 믿음 좋은 사람이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완전히 시대를 꺼꾸러 가고 있다. 그것도 아무런 효과 없는 정죄로 서로를 위한답시고 행하고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은 상황윤리에서 말하는 아무런 기준 없는 사랑이 아니다. 물론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 하지만 따르지 못한 사람들을 향해 돌을 던져서는 안된다. 상대를 위하여 울어주고, 기도하고, 기다리는 사랑을 해야 한다. 정죄가 아니라 사랑이 영혼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는 것이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와라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13:35)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전13:3)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벧전 4:8) 아멘!
우리 모두 사랑만이 영혼을 바로 세우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사랑을 실천하는 주님의 참된 자녀들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22. 산 위와 산 아래
20.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그가 땅에 엎드러져 구르며 거품을 흘리더라
21. 예수께서 그 아버지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이르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22.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24.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25. 예수께서 무리가 달려와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이르시되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26. 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27.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28.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조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막9:20-29]말씀 아멘!!
마가복음 9장 20-29절은 예수님께서 귀신 들린 아이를 치유하시는 장면을 다룬다. 이 말씀을 통해 산 위에서의 영적 경험과 산 아래에서의 현실적 도전을 살펴보며,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 어떻게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지 생각해본다. 예수님의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와 현실 속에서의 믿음의 실천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된다. 마가복음 9:2-8절 본문 앞의 변모 사건에서 예수님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셔서 변형되셨다. 예수님의 옷은 빛나고 매우 희어졌으며,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하였다. 이 영광스러운 장면은 예수님의 신성과 하나님의 임재를 드러낸다.
산 위에서의 경험은 우리가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며 영적으로 충전받는 순간들을 상징한다. 이러한 시간들은 우리 신앙 생활의 기초가 되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힘과 비전을 새롭게 한다. 기도와 예배, 말씀 묵상을 통해 우리는 산 위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산 아래의 현실에는(마가복음 9:14-19) 산 아래로 내려오니 제자들이 귀신 들린 아이를 치유하지 못해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이의 아버지는 절망 속에서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한다. 이는 우리 일상 속에서 마주하는 문제와 도전을 상징한다. 신앙 생활을 하다 보면 우리는 종종 예상치 못한 어려움과 맞닥뜨리게 된다. 기록된 말씀을 보면, 아이의 아버지는 예수님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라고 간청한다. 이에 예수님은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시고, 아버지는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외친다. 이는 우리의 연약한 믿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예수께서 소년을 고친 후 어떤 집으로 틀어가셨다. 제자들은 거기서 왜 자신들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냐고 질문한다. 예수님이 무리를 떠나 있는 상황에서, 제자들이 질문하는 일은 앞서도 있었고(4:10; 7:17), 다음에도 나온다(10:10). 이런 장면은 예수님의 설명을 들을수 있는 제자들의 특권과 더불어 제자들의 깨닫지 못함을 동시에 보여준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귀신 들린 소년을 치유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기도가 하나님에 대한 신뢰라는 점에서 제자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들을 과신한 것이다. 앞서 제자들은 예수로부터 귀신쫓는 권위를 받고 많은 귀신들을 쫓아내었다. 그러나 그들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간구하는 믿음을 보이지 않고 자신을 믿었던 것이다. 이 외는 반대로 예수님은 늘 기도하는 분이었다(1:35; 6:46).
예수님은 산 위에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신 후, 산 아래로 내려와 제자들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해결하셨다. 이는 우리에게 영적 준비와 현실 사역이 균형을 이루어야 함을 가르쳐준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해 영적으로 준비된 후, 현실 속에서 믿음을 실천하며 살아가야 한다. 또한 기도의 능력 (마가복음 9:28-29)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왜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는지 묻자,“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기도가 우리의 사역과 삶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한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믿음을 지킬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산 위와 산 아래의 경험을 합니다. 산 위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고, 산 아래에서는 도전과 문제를 맞닥뜨립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기도와 믿음을 통해 산 아래의 현실에서도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하고, 하나님께 더욱 의지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또한 기도의 능력과 믿음의 중요성을 마음에 새기며, 산 위에서의 영적 경험을 통해 힘을 얻고, 산 아래에서의 현실적 도전에 맞서 승리하는 신앙 생활을 다짐합시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고,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23.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자여!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시온아,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예루살렘아,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을 보라' 하라.
[이사야 40장 9절] 말씀 아멘!!
이사야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해방될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특히 40장은 하나님의 위로와 구원의 약속을 강조한다. 당시 역사적 배경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에서 오랜 기간 포로 생활을 하면서 큰 고통과 절망을 겪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백성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시며, 그들이 곧 해방될 것임을 약속하셨다. 여기서 말씀을 보면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시온아,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시온’은 예루살렘을 가리키며,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함을 의미한다. ‘높은 산에 오르라’는 더 넓고 높은 곳에서 소식을 전파하라는 명령이다. 또한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에는 하나님이 주신 소식을 확신 있게, 두려움 없이 전해야 함을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너희 하나님을 보라’ 메시지의 핵심은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우리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아름다운 소식의 본질은 복음의 의미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죽음, 부활을 통해 인류에게 구원이 주어졌다는 소식이다. 곧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자유와 희망, 새로운 생명을 제공한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의 해방과 하나님의 주권 회복을 의미한다. 이는 하나님이 여전히 그들의 하나님이심을 재확인시키는 메시지이다.
원어 성경을 보면 예루살렘에 좋은 소식을 전하는 남자 선구자가 이사야서의 후반부에 나타난다(41:27, 52:7). 그러나 본절에서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고 산에서 선포하는 선구자는 여자이다. 시편 68편에서 다윗은 “고독한 자들은 가족과 함께 살게 하시며 갇힌 자들은 이끌어내사 형통하게 하시”(6절)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여기에서 언급된 내용은 애굽에서 경험한 노예생활로부터의 해방을 가리키지만, 이사야는 같은 개념을 두 번째 ‘출애굽’인 바벨론 포로생활로부터의 귀환에 적용한다.
신약은 이사야 40:3~5을 자기 백성 가운데 육체로 오시는 영원한 말씀(요1:14)이신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했던 침례 요한에게 적용한다. 물론 요한보다 더 일찍 그분이 오셨다는 소식을 전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 중에 나이 많은 시므온과 안나가 있다. 그들은 아기 예수께서 성전에 봉헌되실 때에 그분을 만났다(눅2:25~38). 이사야서에 나오는 선구자들처럼 그들은 남성과 여성이었다. 시므온은 메시아의 모습으로 오실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고 있었다(눅 2:25~26). 이사야의 예언에 비추어 볼 때, 여선지자 안나가 성전이 있는 산인 시온에서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주님의 오심을 공개적으로 선포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녀는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눅 2:38)했다. 우리가 아는 바로는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을 가져오기 위해 강림하셨다는 복음의 전파, 곧 그리스도의 전도의 기원이다. 나중에 그리스도께서는 지구에 대한 그분의 선교 사명이 완수되었음을 인증했던 부활의 소식을 처음으로 막달라 마리아라는 여인에게 맡기셨다(요 20:17~18). 육체는 풀과 같으나 육신이 되신 거룩한 ‘말씀’은 영원하시다(사 40:6~8 참고)
결론으로 이사야 40장 9절은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자로서 우리의 사명과 역할을 강조한다. 우리는 두려움 없이,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 각자가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결단을 촉구하며,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나타내는 도구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담대함과 지혜를 주셔서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무릅으로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연하는 목사는 사명이지 직업이 아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이 쓰시기 좋은 질 그릇되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주님의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도구가 되기를 소망한다.
24. 나위의 비밀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가면 곧 매여 있는 나귀와 나귀 새끼를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4.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탓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6.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갈림산의 동쪽 기슭에 있는 마을 벳바게에서부터 이 사건이 일어났는데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이곳을 “벳바게와 베다니에” 거이 다 갔을 떄로 되어 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에 감람산의 동쪽 기슭에 있었다. 벳바게는 베다니와 예루살렘 사이에 베다니와 불러 있었거나 가까운 거레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시고 거룩한 성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섰다. 메마른 산길에는 양탄자 대신 때묻은 겉옷이, 급히 잘라온 나무 가지들이 깔렸다. 가난한 사람들이 훍먼지를 일으키며 앞서거니 뒤따르거니 함께 걸으며 소리소리 질러댔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나사렛 예수의 일행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예루살렘은 금방 소동이 일어났다(9-10절). 하나님의 아들은 이렇게 초라하게 하나님의 성 거룩한 성을 방문하셨다. 군대도 풍악도 없었다. 종려나무 자기들이 군기와 무기 대신 햇빛에 번쩍거렸다. 예루살렘에 울러 퍼진 노래는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라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였다.
누가 이 광경을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경제적 폭동도 민족적 봉기도 끼여들 틈이 없다. 예수는 혁명가도 민중 지도자도 아니었다. 인류를 호령하는 사령관의 모습도 아니다. 이 땅에 유토피아를 건설하려 한다는 어떤 암시도 없다.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나사렛 예수! 하늘 높이 피어 오르는 뿌연 흙먼지와 사람들의 고함, 흥분과 소 동만이 있었다. 이 광경은 며칠 후 예루살렘을 떠나시는 예수님의 마지막 모습과 너무나 잘 어울린다. 더 많은 사람들의 고함과 흥분, 소동 속에 예 수님은 혼자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오르시지 않았던가!
그것은 예수님이 스스로 선택하신 방법이었다(1~3절). 그렇다면 이 장면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분은 예수님뿐이다. 예수님은 죽기 위해 그렇게 입성하신 것이다. 홀홀 단신으로 하나님 앞에 서신 예수! 그것이 예루살렘의 예수였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지시하신 이 방법이 하나님에게서 나왔고 구약성경에 예언되어 있던 것임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래서 마태는 이 사건과 함께 “선지자를 통해 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이렇게 하셨다”(4절)고 기록했다. 그가 인용한 구절은 스가랴 9장 9절이었다. “시온의 딸에게 말하라. 보라 네 왕이 네게로 가신다.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 승의 새끼를 탔다.”
예수님의 입성 과경과 이 예언을 연결해 주는 연결 고리는 나귀였다. 그렇다면 나귀를 타고 가신 예수는 예언 속에 나오는 “시온의 왕”이시다. 하나님이 계획을 따라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예수는 그렇게 하나님 앞에 서신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 하에 기꺼이 십자가를 지셔아 할 예수! 예수님은 죄인들의 왕이 되어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것이다. 천국의 왕은 죄인들의 구원자였다.
나귀의 상징성에서 나귀는 성경에서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겸손과 평화, 나귀는 전쟁에서 사용하는 말과는 대조적으로 평화의 상징이다. 예수님은 힘과 권위로 다스리는 왕이 아닌, 겸손과 섬김으로 다스리는 왕임을 보여준다. 또한 순종과 충성,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제자들이 나귀를 가져왔고, 나귀 주인도 “주가 쓰시겠다”는 말에 순종한다. 이는 우리가 주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고 충성해야 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예수님의 메시아적 권위이다.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예수님이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임을 공표하는 행위였다.
예루살렘 입성에는 겉으로 드러난 사건들, 즉 사람들이 내보인 기대와 함성 속에 하나님이 계획과 예수님의 의도가 스며 있었다. 11절을 보면 사람들은 예수님을 나사렛 출신 선지라고 했다. 또한 9절에서 “다윗의 아들” 이라고 불렀고,“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라고 찬송했다. 이런 점만 감안해도 예루살렘 입성은 메시아적 성격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용어들로 예수님을 모세와 같은 민족의 해방자로 생각했다. 그들의 노래는 이스라엘의 회복과 영광에 대한 흥분에서 나왔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무슨 기대를 거졌던지 예루살렘에 오신 예수님은 자기 나름대로 이 찬송을 들으셨고 자신의 의도대로 자신의 길을 가셨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서 나귀를 타신 사건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는 우리에게 많은 영적 교훈을 제공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겸손과 섬김을 본받아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믿고 그분을 따르며, 우리의 삶 속에서 그분의 사랑과 평화를 전해야 합니다. 나귀의 비밀은 겸손과 섬김, 순종과 평화, 그리고 예언의 성취 속에서 드러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진정한 왕으로서의 모습을 깨닫고, 그분을 더욱 깊이 사랑하고 섬기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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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전에 보내셨는데 내가 착오로 못 올렸습니다. 다시 찾아서 올렸습니다.
올렸었는데 어찌 안 보여서 ... 요즘 너무 바빠서 ... 우리 교회가 여름아카데미 스쿨을 하느라고 ...
20여명이 집에서 정신을 뺴는 바람에 .... 두 개가 올라서 한 개를 지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