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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로 보라
세상에는 아픈 이별이 참 많다. 의로운 죽음도 있지만, 뜻밖의 참사를 겪는 일도 있다. 누군들 다른 사람의 아픔을 이해한다고 감히 말할 수는 없다. 다만 그 눈물과 슬픔에 연대할 수 있다. 어떻게 가능할까? 세월호 가족 유경근 님(예은 아빠)이 “희생자 부모를 바라보지 말고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것을 함께 바라보면 좋겠다”고 한 말이 오래 기억난다. 그런 점에서 노란 리본은 서로를 이타심으로 연결해 주는 심벌이다.
노란 리본의 유래가 있다. 안양YMCA 사무총장으로 일하던 고(故) 문홍빈 권사가 세월호 참사 사흘 후 성금요일에 노란 리본을 달고 교회에 왔다. 아직 아무도 노란 리본을 상상하지 않았던 때였다. 무슨 의미냐고 했더니 2007년 여름, 아프가니스탄으로 단기선교를 간 한인들이 피랍당했을 때 안양Y 회원들이 노란 리본을 달았다고 한다. 이듬해 2008년, 안양에서 초등학생 두 여자아이가 실종되었을 때에도 노란 리본을 달았다.
노란 리본은 공중파 TV에 소개되면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리고 오랫동안 잊혀진 노란색의 괴로운 기억이 세월호 참사로 다시 재현된 것이다. 곧바로 노란 리본은 국민적 관심사가 되었다. 노란 리본에 대해 대체로 호의적이었지만, 적대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노란 리본은 단지 추모 이미지를 넘어, 우리 사회에 던지는 선명한 메시지였다.
세월호 관련 기도회와 여러 집회에 참석하면서 얻은 노란 리본은 참 다양하였다. 크기와 재료가 다르고, 가슴에 다는 배지와 가방에 다는 장신구 등 용도도 제각각이었다. 노란 리본의 이미지는 점점 진화하였다. 노란 리본과 풍선을 단 배 등 오브제 44개를 모아 ‘세월호 십자가’를 만들었다. 작은 리본을 배열하여 ‘닻’ 모양(히 6:19)으로 형상화하였다. 작가 김향렬의 작품이다.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고,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다시는 이런 참변이 일어나지 않기를 소망해 만든 십자가이다. 노란 리본은 눈물을 닦아주는 노란 손수건처럼, 약한 이들의 사랑의 일치를 표시한다. 세월호 이후 그동안 만들어낸 다양한 추모용 심벌들을 모아 연결하였다. 십자가 형태는 초대교회로부터 전해진 ‘닻 십자가’ 모양이다. 닻은 사나운 바다에서 거센 파도와 풍랑이란 억압과 박해를 이기고 소망의 항구로 인도한다는 희망을 담고 있다. 무성한 노란 띠들은 애통하는 가족과 나누는 위로와 희망이며, 세상 안에서 이루어야 할 정의와 평화에 대한 연대 의지다. 노란 리본은 새들처럼 반드시 날아오를 것을 믿는다.”
이번 주간부터 ‘닻 십자가’ 4점, 숫자 4.16을 형상화한 십자가(화륜 목사) 그리고 가족이 직접 그린 십자가 5점을 모아 청주 남부은샘교회에서 전시한다. 닻은 사나운 바다에서 거센 풍랑이란 억압과 박해를 이기고 소망의 항구로 인도한다는 희망을 담고 있다. 영혼의 닻을 갖고 있는 누구나 소망의 항구로 귀항할 것을 바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소원이다.
10년 전, 국민적 관심사였던 팽목항에 세 차례 방문하였다. 연말에는 걷기도를 한 적도 있다. 당시 팽목항에는 세월호 유가족 중 특히 미수습자 가족들이 머무르고 있었다. 슬픔 중에도 더 참혹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팽목항에 외로이 나풀거리는 깃발에 이런 마음이 담겨 있었다. 마치 티벳 사람들이 지붕 위 깃발에 적은 기도문을 바람이 훑어가면서 하늘에 전해준다고 믿는 것처럼, 간절함이 배어 나왔다.
“엄마랑 이젠 집에 가자.”
“4대 독자 우리 아이, 살려 달라 하지 않아요. 아이만 찾을 수 있다면,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고, 평생 봉사하고 살 거예요. 가난해도, 부모 노릇 못해도, 불평 없이 살아온 아이, 형체 알아볼 수 없어도, 꼭 찾아 한 번만이라도, 부둥켜안아 보고 싶어요.”
“다윤이 보고 싶다. 내 딸 냄새라도 맡고 싶어.”
“축구를 좋아했던 영인이는 축구화를 사달라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못 사줬던 축구화를 사서 팽목항에 두고 영인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10년을 맞는 지금, 진심으로 공감한 사람도 많았지만 종종 너무 쉽게 위로한다고 덤볐고, 남의 아픔에 대해 아주 냉담하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는 “아직도 그 이야기냐?”며 외면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 결과 우리 사회는 이태원 등 반복되는 죽음의 사건을 겪으면서 고통당하는 사람과 그 가족에 대한 이해와 소통은커녕, 역지사지의 심정을 놓쳤다. 물론 ‘동정피로’(compassion fatigue)란 말처럼, 동정은 무한히 인출되는 감정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 곧 연민, 동정, 긍휼로 함께 하면 기적 이상의 기적을 낳는 법이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우셨다(요 11:35). 국가권력은 기억을 빨리 과거로 만들려 하고, 교회는 신앙의 이름으로 기억을 미래로 미루려고 한다. 그러나 그 참람함과 분노, 슬픔을 기억하고, 새겨야 한다. “우리는 망원경보다 눈물을 통해서 더 잘 볼 수 있다”(조지 고던 바이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