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6: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본절은 본장이 은혜와 죄의 관계를 설명하는 5:20, 21 내용을 이어 받고 있음을 나타낸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 5장에서 바울이 주장한 내용은 '죄에 거하는 문제'가 아니라 '죄를 깨닫는 문제'였다. 율법을 통하여 그동안 감추어져 있던 죄가 드러나게 됨에 따라 인간의 회개는 더욱 깊어지며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느끼게 된다.
그 당시 이러한 바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죄에 거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자들이 많이 있었으며 오늘날에도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자들은 기독교 진리의 깊은 내면을 깨닫지 못하고 다만 '수박 겉핥기'식의 표면적 지식을 가지고 애매하고 오해하기 쉬운 문제에 관심을 쏟는다.
여기서 '죄에 거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에피메노멘 테 하마르티아'는 두 가지로 분석된다. 첫째, 이 문구가 현재 능동태 가정법을 띤 것은 그 내용이 실현 가능성이 없음을 나타낸다. 둘째, 이 문구는 '죄와 더불어 산다'는 의미로 죄와 더불어 전혀 투쟁하지 않을 뿐 아니라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러한 상태에 빠진 자들은 자기 욕구 충족을 위해 그리스도를 섬기는 체하는 자들이다. 다시 말해 이런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꾸는 자들이다. 사실상 칭의의 교리 자체를 조금이라도 오해한다면 그것은 죄에 대한 저항(抵抗)을 약화시키게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구원의 전과정이 인간의 행위를 배제시키고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를 강조하게 됨으로 구원 교리도 역시 죄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약화시킨다. 이러한 이유로 성도는 자유와 방종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어 부도덕이 판을 쳐도 교리적으로 그것을 제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롬 6:2]'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라는 1절의 가상적인 질문에 대한 단호한 부정의 대답이다. 바울은 악을 그리스도의 은혜로 가장하고자 하는 사악한 생각이 매우 모순됨을 경고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죄를 허용하는 면허장이 아니라 성도의 의를 회복시키는 특허장이다.
한편 바울은 이와 다소 다른 문맥에서 본문과 비슷한 어투로 대적들의 주장을 공박한 바 있다. 바울이 칭의론을 가르치던 당시, 그의 가르침이 율법의 윤리적 요구에 대한 무관심을 조장함으로써 자유 방임 사상을 만연시키지나 않을까 하고 우려했던 사람들이 때때로 그러한 종류의 반론을 제기했던 것 같다.
만약 그렇다면, 바울의 답변은 짧은 기간에 나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수년간의 깊은 명상 끝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본다. 죄에 대하여...더 살리요 - 바울은 이제 성도의 편에서 논증을 전개한다. 죄에 대하여 죽은 성도는 더 이상 죄의 세력에 지배받지 않는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피흘리셨고 이 속죄로 말미암아 성도는 하나님과 화목(和睦)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을 경배하는 거룩한 삶을 살게 되었다. 그러므로 만일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에 죄가 더욱 왕성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역을 터무니없는 것으로 전도시키는 행위이다.
혹자는 본절의 '죄에 대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 하마르티아'를 '죄로 인하여'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는 타당하지 않다. 그러한 해석은 본절의 문맥상 바울이 의도하는 주장과 정반대되는 것이다. '죄로 인하여 죽었다'함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고 죄와 더불어 사는 삶을 말하는 것이요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죄악된 삶을 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삶을 산다는 의미인 것이다.
한편 바울은 본절에서처럼 성도가 '죽었다'는 선포를 종종한다. 이러한 성도의 죽음은 죄에 대한 죽음이요, 율법에 대한 죽음인데 실제적으로 죄의 종이었던 우리 옛 사람의 죽음이다. 이에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라고 고백했다. 이와 같은 체험적 고백이야 말로 시공을 초월하여 그리스도와 동시성을 갖는 것이다.
성도가 죄에 대하여 죽은 자의 신분을 갖고 있으면서 또 죄에게 종노릇한다는 것은 분명히 모순이다. 그러나 여기서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해서 죄의 세력을 전혀 의식하지 않게 되거나 죄를 결코 범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7장에서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죄와 투쟁하게 된다는 사실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죄의 세력권을 벗어났다는 의미가 아니라 죄가 초래하는 엄청난 불행들에 대하여 죽었으며 죄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이다.
[롬 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바울은 여기서 죄에 대하여 죽는 것을 세례받음과 결부시키고 있다. 여기에 언급된 세례는 단순한 의식이나 성례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설명하는 은유적 의미를 갖는다. 세례에 대한 은유적인 표현은 다른 구절에서도 본절과 비슷한 연관성을 지닌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예컨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는 것을 계기로 모세에게 속하여 세례를 받게 된 경우가 그러하다. 그들은 처음으로 모세와 연합하였고, 모세의 지도권을 인정하였으며, 또한 그들이 모세에게 의존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스도께 속하여 세례를 받는다는 것 또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연합하여 함께 죽었다는 의미이며, 함께 죽었다는 것은 죄에 대하여 죽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해야 할 점은 세례 자체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사역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이것은 성도의 신령한 체험이라느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카톨릭 교회는 세례와 성찬 자체에 그리스도와의 신비적인 연합이 있는 것처럼 가르침으로써 교리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죄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성도들이 그의 죽으심에 세례받아 연합되었다는 것은 성도들 역시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의미이다. 즉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더불어 함께 죽은 자된 성도들은 죄에 종노릇하던 옛사람이 죽었으므로
계속 죄에서 종노릇하는 신분에 머물려고 하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세례에 담긴 영적인 의미를 부각시킴으로써 바울은 많은 죄를 지으면 지을수록 더욱 처절하게 회개하게 되며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깊이 느끼게 된다고 하는 가르침의 잘못을 지적해 주고 있다.
[롬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 이 접속사는 1-3절까지의 진술에 대한 결론을 유도해 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특히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도 연합한 자들이라는 3절의 진술을 본절에서 더욱 진전시키고 있음을 암시한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함께 장사되었나니 - 침례교도들은 본 구절이 물에 잠기게 되는 침례에 대한 영적 의미를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본절은 고전 15:3, 4과 같이 침례에 대한 영적인 의미를 부각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되심이 갖는 영적 의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에 대한 증거는 5절 이하에서 계속되는 바울의 설명에서 더욱 분명하게 밝혀진다. 따라서 바울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되심
그리고 부활하심을 '세례'라는 용어와 결부시킨 것은 성도와 그리스도의 영적인 연합과 인격적인 연합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인식해야 할 점은 세례받음 자체가 그리스도와의 생동적인 연합을 성취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바울은 비록 잠깐 동안의 일이지만 세례를 받을 때 물속에 몸을 잠그는 일을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는 일로 묘사하였다.
여기서 '장사된다'함은 자연적인 출생으로 맺어지는 아담과의 관계에 의해 지배되던 옛 사람(엡 4:22;골 3:9)의 종말을 상징한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활을 하기 이전의 거듭나지 못한 본성과 행동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의미한다(갈 5:24;골 2:12).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
어떤 사람들은 '영광'을 '장엄한 권능'으로 해석한다.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 속에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영광'이란 용어를 '하나님의 장엄한 권능' 정도로 해석하는 것은 '영광'이란 단어가 지닌 의미를 만족스럽게 드러내었다고 볼 수 없다.
본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도가 새 새명 가운데 사는 것에 대한 수단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도가 새 생명 가운데 사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의 근거가 된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영광'이란 용어 자체가 지닌 포괄적인 뜻을 드러낼 수 없게 된다.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
바울은 그리스도와 성도의 연합이 '죄에 대하여 죽는 것'만이 아니라 나아가 '새 생명 가운데 사는 것'까지 포함됨을 가르치고 있다. 이 말은 성도가 단순히 죄의 영역에서 벗어난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보다 적극적으로 의(義)의 영역에서 살게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는 말씀과 잘 조화를 이룬다.
그리고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한다'는 말은 '새 생명의 원리에 의해 지배를 받으며 그 가운데서 산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므로, '은혜를 더하게 하기 위해 죄가운데 거하자'라고 가르치는 자들은 분명히 바울의 복음을 오해한 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