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 블랙은 본 구절을 '그리스도인 들은 그리스도의 생애와 같이 희생적인 삶을 살 수 있을 만큼 성장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공유하게 된다'고 해석한다. 머레이도 이 해석에 동의한다. 이 해석은 '연합한'이라는 형용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쉽퓌토이'가 '함께 심겨진' 또는 '함께 자라난'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그러나 본장 어느 곳에서도 그리스도와 성도의 연합이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삶에까지 자라난다는 의미를 암시하고 있는 구절은 없다. 따라서 본절의 '쉼퓌토이'는 이미 바울이 앞에서 언급했던 것과 같이 성도가 세례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되었음을 구체적으로 표현해 주는 용어일 뿐이다.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
'되리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소메다'가 미래 시제인 것은본절에서 바울이 장래에 일어날 성도들의 신체상의 부활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많은 학자들은 생각한다). 헬라어의 미래 시상은 앞으로 일어날 어떤 일을 언급하는 것이지만, 그 외에도 경우에 따라서는 논리적으로 또는 불가피하게 일어날 현상을 나타내기도 한다.
후자의 의미를 살려 '에소메다'를 RSV는 '확실히 되리라'고 해석하였다. 또한 몇몇 주석가들은 본절의 미래 시제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합함으로써 당연히 초래되는 결과적 사실을 암시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본절은 이상에서 언급한 두 가지 견해를 모두 포괄한다고 봄이 타당하다.
그러나 심사 숙고해야 할 사항은 바로 앞절에서 언급된 그리스도의 부활이 몸의 부활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가 부활했던 것과 똑같이 우리도 그렇게 부활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 대신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그에게 속한 자들에게 허락되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과 연관시켰다. 그 삶은 장래 뿐만 아니라 현재에 속한 것이다.
[롬 6:6]"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우리가 알거니와 - 여기서 '우리'는 바울과 유대인이 아니라 바울 자신과 그의 복음을 들은 자들을 가리킨다. 여기서 그의 복음을 들은 자들을 단순히 로마에 있는 성도들만으로 한정시킬 필요는 없다. 즉 바울은 진술하고자 하는 대상으로 복음에 대한 경험적 지식을 가진 자들 모두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우리 옛 사람 - 바울은 '사람'을 두 종류로 구분하여 '옛 사람'과 '새 사람'이라고 칭한다. '옛 사람'은 영적인 죽음 아래서 신음하며 본질적으로 마음이 악하여 죄에게 종 노릇하는 사람이며(6절), 하나님에게서 떠난 사람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것 즉 '새 사람'에 대해서 바울은 이미 1:18-3:18에서 자세하게 언급하였다.
'옛 사람'에 머물러 있는 자들은 죄를 지어도 그 죄로 인해 아무런 갈등을 느끼지 않으며, 바람에 밀려 다니는 돛단배와 같이 죄의 세력에 따라 이리 저리 끌려다닌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 이 표현은 3절에 기록된 바와 같이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와 합하였다는 뜻이다.
동시에 이 말은 우리가 죄와 죽음이 지배하는 낡은 질서에서 떠나 의와 평안이 있는 새로운 삶의 영역으로 들어갔다는 의미도 된다. 결국 이 말씀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는 더 이상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생활하는 삶의 변화를 가리킨다.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
옛 사람이 죽은 것과 죄의 몸이 멸하는 것은 같은 의미이다. 그리고 이러한 체험을 한 사람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한다. 비록 성도가 현재의 삶 속에서 죄를 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으나 신분상으로 이미 죄의 몸은 죽은 상태에 놓여 있다.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건은 반복적인 사건이 아니라 성도에게 단일회적인 사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권면한 것은 무슨 의미인가 ?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새 생명을 소유하게 되는 연합의 체험으로 '거룩한 백성'으로 불릴 수 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성도의 현재적 삶은 항상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 속에 머무르고 있다.
이에 바울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4)고 권면했던 것이다. 이 권면은 한 마디로 신분에 걸맞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라는 의미가 된다.
[롬 6: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 여기서 하나의 난제가 있다. '죽은 자'가 그리스도를 지칭하는가 아니면 그리스도를 믿고 그와 함께 십자가의 죽음을 체험한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가 하는 문제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비록 본절이 단수로 언급되었으나 그리스도가 죄에서 벗어날 이유가 없다는 이유로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또 다른 근거는 본 구절이 일종의 일반 명제로서 할라카에 언급된 랍비적 가르침이라는 사실이다. 바울이 유명한 유대인 교법사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교육받았고 랍비의 지식과 유대인 전통에 정통했던 점을 미루어 보아 본절이 어떤 특정한 사람을 가리키기보다는 일반적인 명제로 언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유사하게 베드로도 일반 명제 형식을 빌어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실제적인 예로 스코틀랜드에서는 사형 집행을 받은 사람은 '의롭게 되었다'고 선언한다고 한다. 한편 '죽은 자'와 연관해서 혹자는 '성도'는 죄를 지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이미 죽으신 그리스도와 같이 성도는 모든 죄와의 관계에 있어서 죽었으므로 죄에 대해 무감각한 상태에 있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나 성도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죄에 대하여 무감각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죄의 세력, 죄의 영역에서 벗어났다는 뜻이다.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
본절은 칭의의 순서적 과정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우리의 죄씻음이 이루어짐을 믿고 회개하는 자에게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해방이 이루어지고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다. 칼빈은 본절이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한다고
지적하면서 재판관의 판결로 사면을 받은 죄수가 그 순간 기소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듯이 성도가 죄의 노예 상태에서 자유의 몸이 되는 것도 매우 실제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설명하였다. 한편 유대인들은 본절을 '사람이 육체적으로 죽으면 그것으로 율법의 의무에서 해방을 받는다'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사람이 죽는다고 하더라도 그는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날에 자기의 죄를 책임져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롬 6: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본절은 내용상으로는 3절과 5절의 내용을 반복한 것이지만 무엇보다 그리스도와 성도의 연합이 인격적이고 생명적인 연합일 뿐 아니라 영원한 연합임을 보여주고 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 육체적 죽음이 아니라 3절에 언급된 바,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써 죄에 대하여 죽는 것을 가리킨다.
바울이 여기서 다시 이 말씀을 반복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성화의 생활이 부과됨을 강조하고자 함이다.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 여기서 '살 줄을'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제소멘'은 1인칭 복수 미래형으로서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우리가 살 것이다'이다. 이는 5절 주석에서 언급한 것처럼 단순히 장래적인 소망 곧 부활의 소망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한 성도는 또한 그리스도의 살으심과 연합하여 반드시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예하게 된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곧 성도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새 생명을 얻게 되니 이 땅에서 소유케 된 생명은 장래에 일어난 구속 사건의 모든 결과들을 포함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쉰제소멘'은 장차 그리스도의 재림시 일어날 성도의 부활에만 제한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합하여 죄에 대하여 죽은 성도가 이 땅에서 영원한 나라의 생명을 소유하며 산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땅에서의 영원한 생명은 그리스도의 재림시 부활 생명과 긴밀한 연관을 맺는다.
한편 본절에 '믿노니'로 번역된 헬라어 '피스튜오멘'은 1인칭 복수 현재 직설법으로 단순한 믿음이 아니라 확실성 있는 견고한 믿음을 가리킨다. 이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은 성도는 반드시 그리스도와 함께 살 것을 절대적으로 확신함을 나타낸다.
[롬 6:9]"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 '다시...아니하시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케티'는 '절대로...아니다'는 의미로서 부정을 나타내는 헬라어 단어로서는 가장 강력한 의미를 내포한다. 이러한 의미를 살려 KJV는 '우케티'를 '더이상...않다'로 RSV는 '결코...아니다로 번역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것은 자의적이며 절대적인 일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는 아무런 흠과 티가 없으셨으나 인류 구원을 위한 성업을 이루시기 위해 스스로 십자가를 지셨고 또 다시 살아나셨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타의에 의해 죽으시고 살아나셨다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위도, 능력도 없을 것이다
. 그러나 '다시 죽지 아니하시는', 즉 '결코 죽지 아니하시는'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를 위한 구원의 보장이 되신다.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다 -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신 후 부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망이 그를 주장한다면 성도의 신앙은 진실로 헛된 것을 좇는 꼴이 될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으나 부활하심으로 사망 권세를 이기신 사건에 있다. 이 사건이 참이어야만 성도가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의 연합을 하여 살게 된다는 확신이 참이 될 수 있다. 사망이 그리스도를 주장하지 못한다면 그와 연합한 자들에게도 역시 주장하지 못한다.
이러한 주장이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났다'고 하는 일반 명제에 대한 근거가 된다. 한편 본절이 자칫 그리스도께서 사망의 지배를 받은 적이 있었다는 어감을 줄 수 있다. 본래 그리스도의 신성 자체는 결코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는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입고 이 땅에 오심으로 사망의 세력권 안에서 활동하게 되셨다. 그리고 죄인이 되시어 사망의 원리를 따라 자발적으로 십자가를 지셨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본절에서 이미 그리스도께서 한번 사망의 지배하에 있었던 것처럼 '다시'라는 표현을 사용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