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씨에게
어제 밤
‘순조 기축년 자경전 야진찬’ 재현·복원 공연을 관람하기 위해
창경궁 문정전에 갔었습니다.
‘순조 기축년 자경전 야진찬’이란
순조의 왕세자인 효명세자가
부왕인 순조의 탄신 40년, 등극 30년을 축하하기 위해
1829년 2월 창경궁 자경전에서 마련했던 연향을 이름인데
이번 공연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박은영 교수가
당시의 의궤를 바탕으로 복원해
창경궁 문정전에서 재현, 공연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번 공연의 형식은
관람자가 순조와 효명세자의 입장이 되어
궁중 차와 음식을 맛보며
궁중 연향의 주체가 되는 공연입니다.
순조 30년, 1829년 2월의 어느 날,
신하들이 모두 물러간 밤에
창경궁 자경전에서는 매우 특별한 연회가 열렸습니다.
대리청정을 하고 있던 효명세자가
부왕인 순조의 탄신 40년과 등극 30년을 축하하기 위해
신하들과 어울리는 공식적인 연향(기축년 진찬)과는 별도로,
세자와 임금 단 둘만을 위한 잔치를 마련하였던 것입니다.
자경전 안팎으로는 화려한 등이 켜지고,
계단 위에는 악사가 동서로 나뉘어 앉아 음악을 연주하며,
뜰에서는 무희들이 춤을 추었습니다.
효명세자는 아버지를 위해
궁중 무용 중 가장 정제되고 아름다운 춤 4가지인
포구락, 무고, 춘앵전, 검기무를 선보이며
술 한 잔과 차 한 잔을 바쳤는데
이것이 바로 '순조 기축년 자경전 야진찬'이었던 것입니다.
순조는 정조의 둘째 아들로,
1800년에 왕세자에 책봉되고,
그해 6월 11살의 나이에 임금이 되었습니다.
왕이 어리다는 이유로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안동 김씨를 중심으로 한 벽파가 정치를 주도했지만,
순조는 1803년부터 직접 정치에 나서 그들을 물리치고,
모범적인 정책과 더불어 암행어사 파견,
국왕 친위부대 강화 등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을 펼쳤습니다.
그러나 건강이 상하고,
유례없는 기근과 홍경래의 난 등의 어려움 속에서
세도정치가 자리를 잡게 되자,
순조는 오랫동안 계획한 대로 아들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며 일선에서 물러났습니다.
효명세자는 예술적인 재능이 뛰어났습니다.
시를 잘 지어서,
현재 전해지는 시만 400편이 넘는데,
그의 업적은
특히 궁중연회와 관련된 음악과 춤에서 두드러집니다.
효명세자는 대리청정 3년 동안
해마다 부왕과 모후를 위해 큰 연회를 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연향을 위해서
궁중 음악에 사용되는 노랫말을 직접 짓거나,
춤을 만들었으며,
연향이 끝난 뒤에는 의궤로 남겼습니다.
그가 궁중 연회에 주력한 이유는
부모에 대한 효심은 물론,
유교의 근본인 예악을 강조함으로써
왕실의 위엄을 회복하기 위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순조 기축년 자경전 야진찬은
이런 현실 속에서 마련된 자리였던 만큼,
예사로이 보아 넘길 수 없습니다.
나라의 명운을 짊어진 효명세자가
똑같은 길을 걸었던 부친과
단 둘만의 자리를 마련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요?
그 자리에서 두 사람은
어떤 마음,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을까요?
안타깝게도 효명세자는
이 행사가 있은 후 1년이 지나
그의 꿈을 펼치지 못한 채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만일 그가
요절하지 않고 왕위를 계승하였다면
조선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기에
그의 죽음이 너무나도 안타깝습니다.
어제의 공연은
매우 인상적인 공연으로서
품격과 예술성을 갖춘
매우 우수한 공연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