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성명＞ 역사적 책임마저 면죄부를 준 것이 아니다.(후지코시 근로정신대 최고재, 기각에 부쳐)

[이국언]

성명-후지코시 근로정신대 기각 관련.hwp

<성명>

역사적 책임마저 면죄부를 준 것이 아니다.

- 24일 도쿄 최고재판소, 후지코시 제2차 근로정신대 소송 기각과 관련해-

일본 사법부가 또 다시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절박한 권리구제의 목소리에 눈을 감고 말았다. 지난 10.24일 일본 도쿄 최고재판소는 김정주(81. 서울) 할머니 등 후지코시로 강제동원 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와 유족 23명이 2003년 일본정부와 후지코시 회사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 상고심 사건에 대해 최종 ‘기각’ 결정하고 말았다.

한마디로 이번 기각 결정은 인권의 최후 보루여야 할 사법부마저 끝내 정의 실현에 눈 감은 부당판결이자, 그 권위를 스스로 포기한 것에 다름 아니다. 아울러 이를 강력히 규탄한다.

특히 후지코시 근로정신대 소송은 일본 사법부에 한국인들이 지금까지 제기한 80여건의 일제 강제동원 관련 손해배상 청구 소송 중 지금까지 유일하게 남은 사건이었다는 점에서 통한의 심정을 금할 수 없다.

일본 사법부가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을 빌미로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모두 기각해 왔던 점, 해방 66년을 경과해 피해자들의 연령이 이미 90세를 바라보고 있는 점, 일본에서의 승소 가능성이 거의 없는 현실을 감안하면 더 이상 일본정부와 전범기업을 상대로 한 소송이 추가로 제기될 가능성마저 없어, 이로써 일본정부와 전범기업들을 상대로 제기한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소송과 관련한 역사의 한 장이 마감된 셈이다.

후지코시는 일제 강점기 12~15세의 어린 소녀들에게 일본에 가면 공부도 가르쳐 주고, 꽃꽂이를 하거나 타자를 배울 수도 있다고 속여 혹독한 노동을 강요시킨 대표적인 전범기업이다. 특히 기록에 의하면 한반도에서 무려 1089명이나 되는 어린 소녀들을 데려가, 근로정신대로 동원된 사례 중 최대의 피해자를 낳았던 기업이기도 하다.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이번 최고재판소 판결이 결코 후지코시에 면죄부를 준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알다시피 이번 최고재판소 판결의 취지는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을 구실로 단지 재판에 의해 권리를 구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다투지 않는다는 것일 뿐, 강제연행, 강제노동, 인권유린 사실이 없다고 하거나, 면죄부를 준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번 기각 결정에도 불구하고 전범기업 후지코시에 결코 그 역사적 책임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따라서 후지코시는 행여 최고재판소 판결을 오판하거나 방패막이 삼아 책임을 회피하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아울러 비록 사법적 책임을 면하게 됐지만 그 도의적 책임마저 없어진 것은 아니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피해자 구제를 위해 자발적으로 나서야 할 것이다.

이미 사법적 판단과 무관하게 화해의 길을 찾는 예도 없지 않다. 중국인 피해자들과 2차에 걸쳐 화해에 (주)니시마츠 건설이나, 결과와 무관하게 최고재판소 판결 이후 근로정신대 피해자들과 협상 테이블을 마련한 미쓰비시중공업이 그 좋은 사례다.

시민모임은 후지코시가 이번 최고재판소 결과와 무관하게 근로정신대 문제 해결을 위해 전향적 태도를 취하기를 촉구하는 바이며, 아울러 이 역사적 요구를 외면한다면 더 혹독한 시간을 맞게 될 것임을 엄중히 밝히고자 한다.

일본정부 역시 장막 뒤에 숨어 한일협정을 구실로만 삼는 태도는 옳지 않다. 거듭 강조하지만 한일협정에서 무엇이 해결되고 무엇이 다뤄졌는지 관련 문서를 전면 공개하지 않고서는 결코 피해자들을 납득시킬 수 없다.

한편에서는 일본 외무성이 보관중인 당시 한일회담 문서를 공개하라는 문서 공개 소송에 대해, “공개될 경우 외교적 불이익이 우려된다”며 재판부 바짓가랑이를 잡고 구원을 요청하면서도, 일제 강제동원 배상 소송에서는 얼굴색을 바꿔 ‘이미 끝났다’라고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것은 참으로 비겁한 행위이자, 여명이 얼마 남지 않은 일제피해자들에 대한 제2의 가혹행위나 다름없다 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일본정부는, 단 한명이라도 일제 피해자들이 살아있는 동안에 최소한의 존엄감을 회복할 수 있도록, 조속히 전후 보상 특별입법에 나서야 할 것이다. 일본이 주장하는 피랍자들의 인권은 목이 쇠도록 주장하면서도 일제 피해자 문제에서만큼은 얼굴색을 싹 바꿔 입을 닫는 몰염치한 태도는 옹졸하다 못해 측은하기 짝이 없다. 왜 한국과 일본이 ‘가깝고도 먼 나라’인지, 냉철히 자문해보는 것은 지금 일본에게 어쩌면 가장 값진 시간이 될 것이다.

2011년 10월 27일

-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