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23:17~35)
(17절)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라."
세상과 만물의 속성처럼 화려하고 곧바로 몸에 자극을 제공하는 것은
대부분 지속적으로 취할 때는 해로움으로 귀결된다.
그것이 필요한 기능 만큼만 취할 수 있는 통제력이 발휘되면 좋으련만
죄악은 그 이상으로 지속적으로 취하게 만든다.
결국 쾌락이나 욕망으로 표현되는 죄악에 중독된다.
그러니 시작은 매혹적이었으나 결과는 비극적이니 부러워해서는 안 된다.
세상은 기준이 흔들려,
그것을 두둔하거나 인정하는 그릇된 풍토를 정착시켰지만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만큼은 정확히 그 사실을 인식하고 태도를 취해야 한다.
옳바른 태도는 하나님을 가장 존중하는 것이다.
그것을 다른 표현으로 '경외'하는 것이다.
영어로 경외는 the fear of God로 되어 있어 단순 해석으로는
두려움이지만, 두려움을 포함한 그 이상의 어떤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하나님이 우주의 주인됨과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영향력을 인정할 때 느껴지는 두려움과 위대함, 놀라운 은혜에 대한
감사가 섞인 어떤 지점의 표현이라는 생각이다.
(35절) "쾌락에 빠져서 그 정도가 심각해지면, 때리는 자극을 가해도 느끼지 못하고
환각을 느껴는 등, 육체와 정신이 망가지며 오히려 눈 떠 있는 동안 그 쾌락을 더 취하려는 생각과
행동만을 하게 된다."
매우 두렵고 경각심이 생기는 본문 말씀이다. 죄악의 속성을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한다.
마약이나 알코올, 그리고 다른 여타의 쾌락에 대한 중독이 어떤 행동을 하게 하는지는
많은 정보를 통해 잘 알고 있다.
사람이 사람의 범주를 벗어나 마치 좀비처럼 행세하게 되는 지경의 사람들이 꽤 많다.
그러나 어찌 그런 사람들만 죄악, 쾌락의 중독자라고 할 수 있을까?
겉은 멀쩡하고 약물 등의 중독은 아니지만
심령이 욕망과 욕심으로 중독되어 도저히 고치기 힘든 지경에 이른 자들이 또한 많다.
특히 돈과 재물에 대한 욕심, 권력에 대한 욕심은
그 강도로 비교한다면 마약이나 알코올 등의 물리적인 중독보다 결코 뒤지지 않을 것이다.
겉은 멀쩡한 듯 보이나 심령이 중독된 모습으로
하나님을 따르는 신자들도 꽤 많다.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천국의 시민으로 입성하기 위해서는 꼭 버려야 할 것이다.
우리 앞에 놓인 선택지는 다른 배려 없이 노골적으로 말하면,
결국 성령에 취할 것인지, 쾌락에 취할 것인지 2개 중 하나인 것 같다.
비록 지금은 이미 중독되어 비틀거리는 상태여도
지금이라도 성령에 취하는 길을 택한다면
비록 육신이 완전하게 회복되지 않아
절뚝거리는 모양이라도 -그래서 사람들의 지탄을 받는다 해도-
성령으로 취하는 길 위에 서 있어서
최소한의 안도감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