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이 죽자 블레셋 사람들은 그가 팠던 우물들을 막아 버렸다. 하지만 나중에 이삭이 이곳에 자리를 잡고 살게 되었을 때 그는 그 우물들을 다시 팠으며 그것들의 이름을 자기 아버지가 그 우물들에 붙인 이름으로 불렀다. (창 26:18) 그는 블레셋 사람들과 대립하게 되자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다 마침내 르호봇에서 널찍한 장소를 발견하였으며 나중에는 다시 브엘-세바로 올라갔다. (창 26:22, 23) 이삭의 종들이 브엘-세바에서 우물을 파고 있었을 때, 아마도 그랄의 다른 왕(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은 사람과 이름이나 칭호만 같은 사람. 어쩌면 같은 사람이었을 수도 있음)인 듯한 아비멜렉이 그의 군대 대장 비골과 함께 이삭에게 와서 평화의 계약을 맺자고 제의하였다. 그들은 잔치를 베풀고 마신 후,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서로 맹세의 말을 하였다. 바로 그날 우물에서는 물이 나왔으며 이삭은 그 우물의 이름을 시바라고 불렀다. 그 이름은 “맹세, 서약 또는 일곱”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들이 일곱 개의 물건을 두고 한 서약 즉 맹세의 말을 가리킨다
(창세기 26:19-22) 이삭의 종들이 급류 골짜기에서 파는 일을 하다가 거기서 물이 맑은 우물을 발견하였다. 20 그러자 그랄의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들과 다투기 시작하여, “이 물은 우리의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그래서 그가 그 우물의 이름을 에섹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그들이 그와 다투었기 때문이다. 21 또 다른 우물을 팠는데, 그들이 그것을 놓고도 다투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그가 그 이름을 싯나라고 불렀다. 22 후에 그는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는데, 그들이 그것을 놓고는 다투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고 부르며 말하였다.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널찍한 장소를 주시어 우리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일부 학자들은 르호봇이 브엘-세바에서 남서쪽으로 35킬로미터쯤 떨어진 루헤이베(호르바트레호보트[바네게브])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정한다. 그 이름들에는 특정한 유사점들이 있다. 이삭은 그 우물의 이름을 지을 때 이제 하느님께서 널찍한 장소를 주셨다고 말하였다. 그와 그의 목자들은 남에게 방해를 주거나 받지 않으면서도 가축 떼의 수를 증가시킬 수 있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 역시 그랄에 거주하게 되었다. 물론 나중에 그 인접 지역에서 떠나 달라고 아비멜렉이 요청하자 이삭은 기꺼이 떠났다. 다시금 물 소유권을 놓고 논쟁이 벌어졌고, 그 후 아비멜렉과 그의 주요 측근들이 이삭에게 와서 의무의 서약과 계약을 요청하였는데, 이는 필시 아브라함과 맺은 계약을 갱신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양측은 서로 평화롭게 처신할 것을 보증하는 맹세의 말을 하였다. (창 26:16, 19-22, 26-31. 창 31:48-53 비교) 그 초기 족장들은 그 땅에서 천막을 치고 있는 나그네와 임시 거주자임을 공개적으로 선언하였고, 참된 기초가 있는 도시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도시를 건축하고 만드신 분은 하느님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한다.—히 11:8-10, 13-16.
근년에 그랄 급류 골짜기는 고대 그랄의 위치로 추정되는 텔아부후레이라(텔하로르)의 남쪽 약 0.5킬로미터 지점에서 뻗어 있는 와디에슈샤리아(나할게라르)에 해당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랄 급류 골짜기 일대는 전반적으로 목축 생활을 하기에 이상적이었다. 급류 골짜기 바닥에서 구덩이를 파면 물을 쉽게 구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창 26:17-19) 족장 아브라함은 이 지방에서 외국인으로 임시로 거주하였다. (창 20:1, 2) 후에 기근의 때에, 이삭은 이 지역으로 돌아왔다. 여기서 그는 농사를 짓고 양 떼와 소 떼를 길렀다. (창 26:1, 6, 12-14) 이 급류 골짜기에서 이삭의 종들이 두 우물을 팠을 때, 그로 말미암아 그랄의 탐욕스러운 목자들과 다투게 되었다.—창 26:17-22.
여호와께서 성인이 된 이삭을 축복하셨지만 이삭은 가나안 주민들에게서 박해를 받았으며 그 주민들이 그를 대적하여 문제들을 일으켰기 때문에 이리저리 옮겨 다니지 않을 수 없었다. (창 26:19-24, 27)
그다지 우호적이 아닌 이 블레셋 나라에서,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처럼,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주장하는 책략을 사용하였다. 얼마 후에, 이삭에 대한 여호와의 축복은 블레셋 사람들의 시기의 원인이 되었으므로 이삭이 이주할 필요가 생겼는데, 처음에는 그랄 급류 골짜기로, 다음에는 척박한 네게브 지방의 변두리에 있는 브엘-세바로 옮겨야 했다. 이곳에 있을 때, 그전까지 적의를 품었던 블레셋 사람들이 이삭과 “의무의 서약” 즉 평화 조약을 맺으러 왔는데, 그들이 인정한 바와 같이 “이제 당신은 여호와의 축복을 받은 자”였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그의 종들이 물을 발견하자 이삭은 그것을 시바라고 불렀다. “그 때문에 그 도시의 이름이 이 날까지 브엘-세바[‘맹세의 우물’ 혹은 ‘일곱의 우물’이라는 의미]이다.”—창 26:7-33.
건기가 긴 땅에서는, 특히 광야 지역에서는, 초기부터 우물이 대단히 중요하였다. 고대에는 우물을 승인 없이 사용하는 것을 재산권 침해로 간주하였던 것 같다. (민 20:17, 19; 21:22) 물이 부족하였고 우물을 파는 데는 노동력이 들었기 때문에 우물은 귀중한 재산이었다. 누가 우물의 주인인가를 놓고 격렬한 논쟁과 분쟁이 생기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런 이유에서 한 경우에 족장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있는 우물이 자신의 소유임을 공식적으로 확정하였다. (창 21:25-31; 26:20, 21) 하지만 그가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들은 그의 아들이자 상속자인 이삭의 권리를 무시하고 아브라함의 종들이 판 그 우물들을 막아 버렸다.—창 26:15, 18.
(Esek) [다툼]
이삭의 종들이 그랄 급류 골짜기에서 파서 신선한 물을 얻게 된 우물. (창 26:20) 그러나 그 지역의 블레셋 목자들은 그 우물이 자기들의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양쪽이 ‘다투게’ 되어 그곳이 그러한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창 26:12-20)
. 이삭이 기근 때문에 그랄에 갔을 때 아마도 그 당시 그곳의 왕.<아비멜렉> 1번의 인물과는 다른 왕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기원전 1843년에 아브라함이 죽은 뒤의 일이었다. 이삭도 아버지 아브라함처럼 리브가가 자기 누이인 체하려고 했지만, 그 왕은 리브가가 이삭의 아내라는 사실을 우연히 알고서 그들을 보호하는 공식 포고령을 내렸다. 그렇지만 하느님이 이삭을 번영하게 하시자 이삭은 시기의 대상이 되었으며, 그래서 그 왕은 이삭에게 떠나가 줄 것을 요청하였다. 얼마 후에 이 그랄 왕은 그의 선왕이 아브라함과 맺은 것과 유사한 평화의 계약을 이삭과 맺었다.—창 26: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