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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봉화군 재산면 갈산리는 본래 덕산 부곡의 땅이었는데, 고려 충선왕이 경화 옹주의 시가가 있는 곳이라 해서 재산현으로 승격시켜 복주목 안동의 속현으로 두었다. 그 후 광무 10년(1906년)에 봉화군 재산면에 편입되었다.
이곳 건사골(개내골, 건사마골) 신자촌은 우련전(우련밭) 신자촌에서 동북쪽 곧은정으로 깊은 계곡을 따라 1.5km쯤 가다가 좌측으로 약 500m 가면 일월산 줄기인 장군봉(1135km) 밑의 계곡에 자리 잡고 있다. 도로는 좁지만 시멘트로 된 농로이기 때문에 차량 진입은 무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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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련밭에는 1801년 신유박해 전인 1798년경에 충청도 면천 고을 솔뫼에 살던 김종한(金宗漢, 보명 漢鉉, ?~1816, 안드레아)과 부근의 건사골에는 1801년 신유박해 때 피난온 이윤집 가정 등 몇몇 신자 가정들이 피난 와서 살기 시작하였다. 이윤집은 고향이 어디인지 모르며 다만 박해 당시 예비신자였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봉화 지방 사람이 아닌가 생각된다. 《순교자비망기》(243쪽)에는 그는 건사골의 이 베네딕도 어머니의 둘째 남편으로만 나온다. 천주교에 입교한 후에는 세례성사는 받지 않았지만 예비신자로서 독실히 천주교를 믿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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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5년 을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안동 포졸들에 의해 4월 23일(음) 우련전에 살던 김종한이 체포된 후, 그 부근에 있던 건사골의 이윤집도 체포되었다. 김종한은 다른 증거자들과 함께 20개월 동안 감옥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던 중 마침내 1816년11월 1일(음) 대구 관덕정에서 7명이 순교하였다. 그와 함께 우련밭에서 잡힌 예비신자 이윤집도 배교하지 않고 꿋꿋하게 신앙을 증거하였으며 마침내 굶주림과 쇠약으로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신자들이 잡혀간 후 이곳 건사골 교우촌은 없어지게 되었다. 그 후 이곳에는 외교인들이 들어와 살았다.
▒ 고려 충선왕
충선왕(忠宣王, 1275~1325)은 고려 제26대왕(재위: 1298년, 복위: 1308~1313)이다. 충렬왕과 원나라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의 아들이다. 정비(正妃)는 원나라 진왕(晋王) 감마라(甘麻刺)의 딸 계국대장공주(계國大長公主)다. 1308년 아버지 충렬왕이 죽자 고려왕에 복귀하여 정치의 쇄신에 열의를 보였으나 고려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원나라 생활을 즐기며 전지(傳旨)를 통하여 국정을 행하였다. 충선왕의 본성이 담박하고, 불(佛)을 좋아하고 글을 즐기며 그림도 잘 그리는 등 정치와 권력에는 애착이 적어 주로 원나라에 머물러 있었다.
■ 찾아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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