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서 우러나온 고마움
1957년 그해 추석은 유난히 썰렁했다. 수제비라도 제대로 배불리 먹으면 다행인 시절이었다. 대학에 입학하여 철없이 한 학기를 보내고 다시 9월이 되어 모였다. 여름을 보내고 시골에 내려갔다가 돌아온 친구들은 얼굴이 그런대로 피어 있었다. 하숙집에서 콩나물 무침에 질려 있다가 집에 돌아갔으니 당연한 것이었다. 9월 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추석이 왔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고향을 찾아 내려가고 다시 서울은 텅 비었다. 나는 친구들이 고향으로 갔기에 무료하게 집에 있었다.
추석 바로 전날 저녁이었다. 남쪽 바닷가가 고향인 친구가 전화를 했다. 나는 고향 집에서 전화를 하는 줄 알고 “부모님도 편안하시지?” 하고 물었다. 그는 갑자기 목이 메는지 ‘흑’ 하더니 말을 끊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고향에 내려갈 차비가 없었던 것이다.
친구에게 서울역에서 만나자고 하고 어머니에게 친구가 고향 갈 차비가 없어서 못 내려가고 있다는 말을 하고는 얼마의 돈을 얻어 역으로 갔다. 그는 역 광장 시계탑 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유난히 교복이 커 보이는 그는 나를 보자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는 것이었다. 대학에 입학해서 겨우 한 학기 어울려 다녔지만 아직도 서먹한 기분이 없는 것도 아니라서 마음에 큰 부담이 되는 듯했다.
나는 차표 살 돈을 주었다. 입석을 겨우 살 수 있었지만 그는 내 손을 잡고 웃으며 “고맙다”라고 하고는 개찰구를 빠져나갔다. 1주일이 지나 다시 학교는 우리들의 세상이 되었다. 그런데 친구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집으로 간 친구들이 조금 늦게 나타나는 것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라서 무심코 또 1주일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학교에 왔다. 그런데 얼굴이 까맣게 타서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우리는 그날 밤 그의 귀경을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명동에 나가 생맥주집에 들어갔다. 몇 잔의 맥주를 마시자 그는 “가을걷이가 남아 있어서 늙으신 부모님을 도와 추수를 했더니 가을 햇볕이 보통이 아닌데” 하면서 까맣게 탄 얼굴을 만지는 것이었다.
그날 밤 명동에서 나와 뿔뿔이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그가 내 손을 잡으며 “지난번엔 고마웠어. 어머니에게 말했더니 이걸 가져다주라고 해서 가져왔으니까 그냥 받아줘” 하며 불쑥 주머니에서 한지로 곱게 싼 것을 꺼내 내 손에 쥐어주고는 버스에 뛰어오르는 것이었다.
집에 와서 내 방에 앉아 펴보니 흰 명주를 차곡차곡 접은 것이었다. 어머니에게 가서 보여드렸더니 “목도리구나” 하였다. 할머니가 외출하실 때면 곱게 머리부터 뒤집어쓰고 나가던 하얀 머플러가 그것이었다. 어머니는 흰 명주를 몇 번이나 만져보고는 “이것은 다른 것과 달라. 그 집에서 얼마나 정성을 들여 명주실을 뽑고 베틀에 앉아서 짠 것이겠니.
마음에서 우러나온 고마움의 표시니까 네가 고맙다는 편지라도 해야지” 하는 것이었다. 나는 어머니의 말을 따라 친구 어머니에게 친구도 모르게 편지를 보냈다. 얼마 후에 친구 어머니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철자법도 옛날식이었지만 객지에 가서 고생하는 아들을 마음으로 도와주어 고맙다는 간절한 사연이 담겨 있었다. 내 어머니도 그러려니 하니까 마음이 뭉클해서 한동안 눈이 아른거렸다.
친구는 겨울 방학이 끝나고 다음 해 봄이 되어 다시 만났을 때 그의 어머니와 내가 편지를 주고받은 사실을 알고는 내 손을 잡고 한참이나 놓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평생 친구가 되었다. 그 시절 이야기다.
문학평론가 박 동 규 님은 1939년 경북 월성군에서 박목월 시인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서울대 문리대 국문과와 동 대학교에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은 님은 1962년 <현대문학>에 평론으로 등단했으며, 현재 서울대 명예교수 및 월간 시전문지 <심상>의 편집 고문으로 재직 중입니다.
지은 책으로 <한국현대소설의 비평적 분석> <현대한국소설의 성격> 등의 논문집과 <글쓰기를 두려워 말라> <신문장 강화> 등의 문장론집, <별을 밝고 오는 영혼> <아버지와 아들> <내 생애 가장 따뜻한 날들> 등의 수필집이 있으며 현대문학상, 황조근정훈장 등을 수상했습니다. |
첫댓글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
감동..^^
정말 마음이 중요하군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