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장소 : 약사암
일 시 : 2022.09.29(목) 10시,
참 가 : 강공수 김재일 나종만 박남용 양수랑 윤정남 이용환 장휘부 정원길등 9명
불 참 : 김상문(방송통신대 모임) 김영부(병원 입원) 윤상윤(부인 병원 진료 수행) 최문수(당분간 쉼)
회 비 : 90,000원
식 대 : 72,000원(애호박 찌개 4, 청국장 4, 김치찌개 1)
잔 액 : 18,000원
이월 잔액 : 247,000원
총 잔액 : 265,000원
부곡정에 모인 회원들(강공수 김재일 나종만 박남용 양수랑 윤정남 이용환 등 7명)은 10시, 우리는 아주 청명한 가을날 따가운 가을 햇볕을 느끼며 산행을 시작하였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서 산행을 하는 대열 속으로 우리도 합류하였다.
은단풍나무 숲에서 한 차례 쉬었다가 약사암까지 올라갔다. 2주전에 아주 잘게 머금었던 소국화분들이 이제는 완전한 자태로 만개하여 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약사암은 바야흐로 소국화분들의 천국이었다.
11시 반에 하산하였다.
오늘의 이야기 주제는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에 따른 진실 규명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다음 이야기는 내가 사범학교 3학년에 다니고 있을 때, 여순사건의 주동자 김지회(1925~1949, 함흥 출신)에 대하여, 상무대에 근무하던 한 육군 중사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서술할 것이므로, 김지회에 대한 설명에 혹시 오류가 있더라도 이해해 주기 바란다.
우리나라가 조국 광복(1945)을 하고 2년여의 미군정을 거쳐 1948년~1950년은 동족간의 이념투쟁으로 엄청난 국력 손실을 감수하여야 하였다.
먼저 1948년 4월 3일 제주 4·3사건이 발생함으로서 첫 번째 이념 갈등으로 수많은 제주도민들이 희생되었다. 그런 상태에서 5월 10일 초대 국회의원 선거로 국회가 구성되고, 간선제 대통령선거로 대통령에 이승만이 선출되어 8월 15일 꿈에도 그리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하지만 민생은 일제 강점기와 별 차이가 없었다. 이승만의 비호 아래 친일세력들이 나라를 점거함으로서 특히 친일 ‘순사’들로 구성된 대한민국 경찰들은 일제강점기의 ‘순사’들 보다 더 가혹하게 국민을 다루었다. 당시에는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이나 광복군 출신들은 대부분이 좌익이념을 가진 자들이 많았었다. 그래서 좌익 이념이 정의처럼 간주되어 좌우익의 대결이 극심한 시절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광복이 되었어도 이번에는 대한민국의 친일파 출신 경찰들이 좌익이념을 가진 독립운동과 광복군 세력들을 못 살게 구니까, 이들 좌익세력이 막강한 권한을 가진 경찰들의 감시망을 피해 국방경비대로 들어갔으니, 여수에서 창설된 국방경비대 제14연대에는 그런 좌익이념을 가진 세력들이 많이 입대(入隊)하였다.
그러던 중 10월 정부에서 ‘제주 4·3 사건’을 진압하라는 명령이, 이 14연대의 여수 주둔 부대장(김지회 중위)에게 내려졌다. 알려진 데로 김지회 중위는 남로당원으로 남파되어 국방경비대 사관학교 3기생 출신 좌파 장교라고 하였는데, (확실치는 않지만) 내가 상무대 근무 육군 중사로부터 들은 바로는, 김지회(金智會)는 자기와 같은 함흥출신으로 아주 온순하고 정의감에 불타는 청년으로, 오로지 국민을 위한 군대의 표상으로 참군인 이었다고 증언하였다. 그런데 김지회 부대의 부중대장 격인 특무상사 지창수는 철저한 좌익이념을 가진 남로당원으로서 성격이 불같아서 자기가 생각한 데로 실천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같은 국민인 제주도민들이 자기들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어쩔 수 없이 일으킨 무장 폭동을 진압하러 갈 수 없다’라면서 중대장인 김지회 중위를 제외시키고, 자기 부대원들 중 좌익세력과 여수지방의 좌익 민간세력들을 충동하여 무장 봉기를 일으킨 것이 바로 ‘10·19 여순사건’이라는 것이라고 하였다. 중대장인 김지회 중위는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어쩔 수 없이 무장봉기한 부대의 수괴가 되어 버린 것이라고, 함흥 출신의 그 상무대 육군 중사는 나에게 설명하였다.(그 말이 참인지 나는 확인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발생한 ‘여순사건’은 1948.10.19.부터 10.26.까지 일 주일동안 동부6군(여수 순천 보성 곡성 구례 광양)을 삽시간에 점령하였다가, 광주에서 진압하러 온 반란 진압 국방경비대(대장 송호성 준장)에 의해 진압되고, 1949년 말쯤 백운산과 지리산으로 숨어든 잔당들(파르티잔→빨치산→빨갱이)이 소탕됨으로서 끝이 난다.
25세의 김지회 중위는, 꽃다운 나이의 간호부 조경순(1930년, 19세로 제주도출신, 장로교 목사 조남수의 딸)과 연인으로 사귀었으며, 함께 지리산으로 들어가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그녀는 잡히고, 김지회는 1949년 3월 토벌군에 의해 사살되었다고 한다.
‘10·19 여순사건’이 진압되는 과정에서 좌우익 간의 대립으로 같은 지역 주민들끼리 서로 살육하는 비극이 발생하였고(손양원 목사의 아들 희생), 국방경비대와 경찰은 부역자를 색출한다면서 수많은 양민들을 살육하는 일이 발생하였다.(‘백두산 호랑이’로 불리기를 좋아하였던 김종원 대위의 양민학살 만행 등)
이어서 1948년 12월 이승만은 악명 높은 ‘반공법’을 만들어, 자기의 반대세력을 빨갱이로 몰아 처형하는 도구로 삼았다. 이후로 우리나라의 역대 독재자들은 모두 이 반공법을 전가의 보도로 활용하여, 무고한 사람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정적들을 숙청하고, 정국을 전환을 꾀하였다.
1950년 6월 25일에는 더 비극적인 동족상잔의 한국전쟁이 터졌다. 우리 보성과 순천 등의 상황은 조정래의 태백산맥에서 자세하게 묘사되었다.
그해 여름, 광주 동명동에는 내 백부님이 살고 계셨다. 형님댁에 살면서 광주체신청에 다니던 내 숙부님은 일제 강점기에 지주의 막내아들이었지만 당시에는 부르조아 지식계급(인테리겐자)들도 거의가 좌익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이 좌익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모두 전향시켜 ‘보도연맹’에 가입시켰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터지자 이들 보도연맹원들이 남침한 북한 인민군들에게 동조할 것을 염려하여, 우리 정부는 각 지역의 이들 보도연맹원들을 예비 검속하여 모두 집단 감금하였다. 보도연맹원인 나의 숙부도 광주교도소에 수감 당하였다. 경찰은 퇴각하면서 이들을 지산동 골짜기로 데리고 가서 모두 총살시켜버렸다. 이것이 바로 불법적으로 이루어진 국가 폭력에 의한 민간인 희생인 것이다.
2000년경에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보도연맹원들의 유족들이, 전국 각지에서 ‘보도연맹원 합동 위령제’를 거행하고, 정부의 보상을 촉구한 결과, 20대에 과수댁이 된 나의 숙모님은 몇 년 전에 국가로부터 일률적으로 1억 5천만 원의 보상을 받게 되었다.
또 내 고모님은 보성군 율어면에 살고 있었다. 거기는 소설 ‘태백산맥’에서 조정래 작가가 ‘남한 유일의 해방구’(완전한 인민공화국 통치지역)라고 이름 붙였던 곳이다. 국군이 수복한 후, 어느 날 아침 경찰들이 들이닥쳐 마을 사람들을 모아 놓고, 고모님 부부를 비롯한 강압에 의해 부역한 사람들을 재판 없이 유무죄를 가리지 않고 모두 총살시켜버렸다. 고모님의 어린 자식 2남 1녀는 하루아침에 부모 잃은 고아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것도 부당한 공권력 행사로 인한 민간인 살해 사건이어서 이번 과거사 정리 기본법에 의해 국가의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가 노래 부를 정자에는 김재일과 정원길이 와 있었다. 금주의 노래를 부르기 전에, 먼저 전에 불렀던 ‘귀뚜라미 우는 밤’을 복습으로 불러보았다. 그리고 1967년 17세의 부산 여고생 정훈희가 상경하여, 모 호텔 나이트클럽에서 악단장인 숙부의 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던 것을, 가까이에서 듣고 있던 스타 작곡가 이봉조(가수 현미의 남편)의 눈에 띄어 ‘안개’, ‘무인도’, ‘꽃밭에서’ 등으로 세계적인 가수로 성장한 이야기를 강공수가 설명해 주었다.
금주의 노래는 이종택 작사, 이봉조 작곡, 정훈희 노래가 노래한 ‘꽃밭에서’를 선정하여 불렀다. 이 노래로 정훈희는 1979년 칠레 가요제에서 ‘최우수 가수 상’을 받은 바 있다.
첫댓글 피맺힌 한국전쟁전후 최근세사를 일목요원하게 정리해준 아석 양수랑의 쾌거가 존경스럽다.조정래소설 태백산맥 열권을 다시 읽어가기시작했다. 작금의 국내 남북 대결상을 크게 우려하면서.... 춘강 박남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