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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신년 특강 제3강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말씀/롬15:1-13
요절/롬15:6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여러분! 생뚱 맞는 질문일 수 있겠지만, 여러분은 교회가 하나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과연 교회가 하나 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의 생각이 10이면 10, 100이면 100, 1000이면 1000 다 다른데 어떻게 하나 될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은 교회 내에 하나 되지 못하고 갈등하는 모습을 다룹니다. 사도바울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도록 권면하고 있을까요? 우리 각자와 우리 교회는 이런 문제들 앞에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먼저, 여러분! 교회가 무엇일까요? 물론 예배 공동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지체들의 모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신앙 고백하는 공동체 등 다 맞는 말입니다. 이런 교회의 구성적인 측면에서 특징을 생각해볼 때, 교회는 다른 성장배경, 직업, 나이, 교육 수준, 성별, 빈부, 이념, 성격, 기질, 가치관, 정치 성향, 인격과 믿음의 성숙도가 각기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서로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어린아이들부터 청소년, 중년, 장년까지 다양한 세대들이 모여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이처럼 구성면에서 서로 다른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다른 성향과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각기 생각과 관점을 주장하고 고집하다 보면 갈등과 다툼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 갈등들의 원인은 믿음의 본질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부수적이고 지엽적인 문제로부터 시작되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말씀의 로마 교회도 음식 먹는 것과 절기들을 지키는 것에 대한 견해 차이로 갈등이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이 점점 커져 서로 편을 나누고 비방하고 다투게 되는 심각한 문제로 발전하게 됩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에도 이런 모습들이 여전히 교회 내에 존재합니다. 우리는 교회 내의 이런 문제들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1절을 보십시오.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바울은 믿음이 강한 자와 믿음이 약한 자로 나눕니다. 로마 교회 안에서 믿음이 강한 사람은 우상의 제물로 바쳐진 음식을 먹는 것과 절기를 지키는 것에 대해 자유한 마음을 가진 이방인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은 유대인 신자를 가리킵니다. 유대인 신자들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지만, 그들은 유대인으로서 지켜왔던 관습과 전통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우상의 제단에 바쳐진 고기를 시장에서 구입하게 될까봐 아예 고기를 먹지 않고 채소만 먹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또 유대 절기와 안식일을 다른 날보다 더 큰 날, 중요한 날로 여겼습니다. 이런 데서 오는 이방인 신자와 유대인 신자 사이의 차이는 점차 발전해 교회 분열 양상이 된 것입니다.
단순히 생각해보면, 예수님 믿고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이 모인 교회는 사랑으로 하나 되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 대한 첫사랑이 뜨거울 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힘든 문제가 되고 이로 인해 다툼과 갈등이 생기게 됩니다. 마치 신혼부부가 신혼 초에는 사랑의 묘약을 먹어 배우자가 멋있고 예뻐 보일 때는 배우자의 모든 것이 다 좋아 보이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배우자의 허물이 보이고 약점이 보이고 이것들을 감당하지 못해 다툼이 생기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개인이나 공동체가 성숙으로 나아가기 위해 지나는 과정이고 성장하기 위한 성장통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성장통 속에서 믿음이 강한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바울은 믿음이 강한 사람들이 믿음이 약한 사람의 약점을 담당해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교회는 세상과는 달라야 합니다. 대다수 사회에서는 ‘약육강식’의 죄된 본성이 지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강한 자들은 인정받고 존경받지만 약한 자들은 무시당하고 배척당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믿음이 약한 사람들이 강한 믿음의 소유자로 성장하기까지 돕고 섬기며, 우여곡절을 겪고 좀 실수하더라도 품어주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연약한 형제와 동역자들을 바라볼 때, 저런 연약함과 약점 때문에 저 형제는, 저 동역자는 ‘안돼!’ 이렇게 생각하기보다 나의 사랑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섬기기에 두 배로 힘든 사람은 사랑 곱빼기가 필요한 사람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이처럼 믿음이 강한 사람들은 자신을 부인하고 약한 사람들에게 마음을 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히 가르치면서도 동시에 본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연약한 사람들이 실패할 때도 실망하지 않도록 격려해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처럼 연약한 자들을 반짝 섬기다 말기보다 지속적으로 감당해주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사람들의 연약함과 약점에 대해 판단하기는 쉬워도 깊이 이해하고 참고 인내하며 담당해주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바울은 시편 말씀을 인용해 예수님이 죄인들을 어떻게 참아주셨는지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이 세상에서 자기를 드러내시고 영광 받는 길을 가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이 만일 자기를 기쁘게 하고자 했다면 얼마든지 그들의 요구대로 세상의 권세와 영광을 받는 길을 가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연약한 죄인들을 담당하시고 이들 안에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믿음을 굳게 세우는 길을 가셨습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이 땅에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않으시고 섬기러 오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담당하기 위해 많은 비방을 받으셨고, 마침내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요즘 시대는 개인주의적이고 참 이기적인 시대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기쁘게 하고 자기 유익만을 위해 이기적으로 사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세상이 대부분 그렇기 때문입니다. 반면, 형제와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 땅에서 연약한 죄인들을 섬기신 예수님의 삶이 너무 초라해 보이고, 사회에서 광도 안 나고, 실패한 삶을 사셨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이 사신 삶을 기뻐하시고 예수님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같은 삶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위해 계획하신 가장 위대하고 큰일입니다. 주님이 섬기신 그 삶을 통해 수 많은 영혼들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고 하나님의 영광이 크게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말이 쉽지, 그것은 참 어렵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약점들을 담당할 때 종종 그들에게 좋은 반응과 감사를 기대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호의와 도움이 기대한 반응과 감사가 아닌 무시와 비난으로 되돌아오기도 합니다. 그럴 때는 포기하고 싶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섬긴 시간들이 얼만데” 이런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릅니다. 그러나 그때 우리는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에서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성도의 삶은 자기 유익을 구하기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연약한 사람을 믿음에 굳게 세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연약한 우리를 믿음 안에 굳게 세우시므로 이에 대한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연약한 영혼들을 영접하고 사랑하고 인내하며 믿음에 굳게 세워나가고자 할 때 감당해야 할 아픔과 수고가 있습니다. 때로는 이런 사랑과 섬김의 수고를 행하다 피곤해지고 낙심이 될 때도 있습니다. 이때 우리에게 힘과 위로가 되는 게 있습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4절을 보십시오. 그것은 다름 아닌 성경 말씀입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들을 통해 인내를 배우고, 위로를 얻고, 소망을 갖게 됩니다. 나의 선한 의지와 결심만으로 연약한 사람들의 약점을 감당하고 섬기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연약한 사람을 섬길 인내와 위로와 고난과 아픔, 또 비방과 조롱을 받으면서도 주님이 맡기신 길을 가게 하는 소망은 말씀으로부터 나옵니다.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욥의 인내와, 요셉과 다윗의 숱한 고난과 많은 신앙 조상들의 믿음의 삶을 통해 그들이 인내와 고난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그들의 인생을 어떻게 연단하셨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셨고, 열매 맺게 하셨고, 마침내 그런 인내와 고난을 통해 하나님이 그들을 얼마나 귀하게 쓰셨는지 보게 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고난과 아픔 중에도 큰 위로를 받고 고난의 의미를 배우고 인내의 중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또 이를 통해 우리 안에 이루실 하나님의 소망을 붙들고 믿음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에서 우리가 주님의 본을 따라 연약한 형제를 인내하며 소망 가운데 섬기는 삶을 살게 하는 모든 은혜의 공급처입니다. 아멘!
이제 바울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5,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이것은 모든 성도들이 서로에 대해 예수님의 마음을 품도록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그렇게 할 때 그들은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일까요?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합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2:3,4).”
그리스도의 마음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다른 사람을 돌보며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타락한 본성은 우리 자신을 남들보다 낫게 여겨, 자신에게는 장점들을 크게 보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약점들을 크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면, 다른 사람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지극히 주관적이고 편견을 가지고 대하게 됩니다. 판단, 정죄의식, 미움으로 시달립니다. 속이 시끌시끌, 부글부글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을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진정한 가치와 장점을 볼 수 있고 그들의 행복에 진정한 관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 되는 삶을 살기 위한 열쇠는 우리 각자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배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습니다. 대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빌2:6-8). 그리스도의 마음은 세상 지도자들의 마음과 반대입니다. 세상 지도자들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 권력을 이용하고 다른 이들을 짓밟는 경우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의 자신의 영광과 특권을 포기하시고 다른 이들을 섬기셨습니다. 평범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30년간 육신의 부모를, 3년간 제자들과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영혼들을 섬기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33년간의 짧은 인생을 마쳤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삶을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보면 다른 사람들을 섬기느라 고생만 하다 젊은 나이에 요절한 슬픈 삶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시키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게 하시고 왕 중의 왕, 주의 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작년 가을 UBF 세계대표이신 란워드 목자님은 아프리카 지부들을 심방하면서 많은 선교사님들 가운데 그리스도의 마음이 충만한 것으로 인해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선교사님들은 청년의 때, 세계에서 가장 살기 어려운 아프리카의 선교사로 가기 위해 좋은 직장을 그만두고 살기 좋은 고향 땅 한국을 떠났습니다. 현실적인 물질 자립의 어려움, 불안정한 정치 상황, 전기나 수도, 생필품 등의 열악한 사회 인프라, 자녀 교육과 장래 문제 등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아프리카 영혼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섬기고 사랑할 때 아프리카에 수많은 가정 교회들이 세워졌습니다. 아프리카 현지 영혼들이 선교사님들을 존경하고 신뢰하는 것은 선교사님들의 인간적인 조건이나 능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이방 땅의 나그네가 되어 아프리카 영혼들을 섬기는 선교사님들의 겸손과 희생적인 삶 속에서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아프리카에도 현지 목자님들이 세워져 제자양성 역사의 주역들로 앞장서서 섬기고 있습니다. 이들 또한 그리스도의 심장을 품고 다른 한 영혼을 섬기기 위해 헌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의 삶 속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이 같은 그리스도의 마음이 교회를 하나 되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 된다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획일화된다기보다, 우리가 다양한 스타일에도 불구하고 삶의 목적이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으로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 하나 됨을 위해, 우리 마음 중심에 예수님을 모셔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예수님을 지휘자로 한 오케스트라와도 같습니다. 만약에, 한 연주가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자기 마음대로 연주한다면 그 오케스트라는 망쳐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격과 기질, 견해, 스타일, 사회적 지위, 은사 등 다양한 면에서 서로 다릅니다. 우리가 각기 다른 삶과 은사들을 자기 영광, 자기 기쁨만을 위해 사용한다면 교회 공동체는 로마 교회처럼 분열되고 갈등과 상처의 골이 깊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아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형제를 섬기고 감당하기 위해, 우리의 삶과 은사를 사용할 때, 우리 교회는 아름다워지고 더욱 주 안에서 하나되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교회가 될 줄 믿습니다.
6절을 다시 보십시오.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바울의 기도는 신자 개개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선하심, 권능, 자비, 구원의 은혜 등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이 우릴 통해 세상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이 발견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본체로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요13:34,35). 또 우리에게 모든 민족을 제자 삼도록 말씀하십니다(마28:18-20). 우리가 한마음으로 예수님의 말씀따라 살 때, 또 예수님의 성품을 배우고자 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 돌려 드릴 수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가 한 마음, 한 입이 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수님도 마지막 마가의 다락방 모임에서 제자들의 하나 됨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의 하나 됨을 통해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심을 세상 사람들이 믿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가 될 때,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이같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은 우리의 실제적인 삶에서부터 나타나야 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우리는 서로 받아야 합니다. 감정적으로 들이받는 것이 아니라 영접해주는 것입니다. 품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을까요?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으신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연약함과 허물과 약점을 받아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하심으로써 하나님께 영광 돌리셨습니다. 예수님은 반복해서 죄에 넘어지고 연약하고 허물과 실수와 실패를 반복하는 우리를 한 번도 물리치지 않으셨습니다. 이기적인 세리와 사마리아 여인과 나병환자와 중풍병자와 탕자와 같은 모습으로 주님께 나아갈 때, 주님은 언제나 welcome! 우리를 받아주시고 사랑으로 영접해주셨습니다. 죄 사함의 은혜와 말씀의 은혜를 공급해주시고 구원의 기쁨을 누리게 하십니다. 우리가 연약한 모습에서 건강해지고 믿음에 굳게 서서 하나님의 영광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인내하고 섬겨주십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의 은혜를 기억할 때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영접할 수 있습니다. 그들을 이해할 수 있고 용서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마음 중심에 모시지 않으면 우리의 마음은 바늘구멍보다 더 작아지지만, 그리스도를 마음 중심에 모시면 우리의 마음은 넓은 바다처럼 누구라도 받아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마음 중심에 모셔 들이므로 형제를 영접하고 섬기는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려 드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8,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진실함을 몸소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그들 후손을 통해 메시야를 보내어 천하만민이 복을 받게 하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이 약속이 얼마나 진실한가를 나타내기 위해 예수님은 유대인의 모습으로 오시고, 할례를 받으시고, 유대인의 율법에 순종하심으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보이셨습니다. 또 이방인들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와 긍휼하심을 덧입고 구원받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어느 누구든 열방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소망을 따라 유대인처럼 되셨고, 또한 이방인에게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바울은 이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관심이 열방, 세상 어느 누구라도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관심이 지금 우리에게까지 미쳐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지위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어느 누구라도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소망을 생각할 때, 구원받았음을 확신하게 되고 주님 주시는 기쁨과 평강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제는 성도들 간에 하나 되어 하나의 소망인 하나님의 나라 산 소망을 붙들고 나아가야 합니다. 같은 소망과 기쁨으로 즐거워하며 서로 받아 주므로 한 마음 한 입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영광 돌리는 공동체, 이것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우리 교회가 서로에 대한 수준과 요구를 내려놓고 서로 받아주는 마음과 사랑과 섬기는 자세로 서로를 영접하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과 기쁨과 평강이 충만한 교회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심장 가지고 예수님을 본받아 서로의 연약함을 담당해주며 하나 되기에 힘쓰므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교회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