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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고도 새로운 계명
함석헌
씨알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이 9월 29일 새벽 4시입니다. 이 달의 편지를 쓰자고 지금 앉은 사람은 결코 충실하고 부지런한 종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줄을 스스로도 잘 알고 스스로를 책망합니다. 그러나 또 노상 게을러서만 그런 것도 아님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전화로, 편지로, 이달 호 아직 아니 나왔느냐고 물으실 때는 가슴이 철렁철렁 내려앉습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또 말 못하는 입술이 경련을 일으키리만큼 감격합니다.
그믐날 와서 그달 호 원고를 쓰는 사람은 장사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장사라면 죽어도 못하겠습니다. 그믐날 쓰느니만큼 사실은 하루도 편지 안 쓴 날은 없습니다. 여러분께 부치지를 못했을 뿐이지. 마음이 연약해서, 3년을 벼르다 쓴다 해도 그 소리밖에 더 될 것 없는 자기인 줄을 알면서도, 정말 붓을 대려면 이 부족한 마음이라도 적어도 전부를 묶어 바치고 싶은 심정이 솟기 전에는 아니되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결코 새 소리를 할 것이 있어서 쓰는 것 아닙니다. 낡고 지치고 더러워진 이 마음에도 어느 순간엔 불이 붙을 수 있는 것만 같아서 하는 거지.
잘됐으면 사보지, 못됐으면 사볼 것 없지 그러지 마십시오! 그러면 내 마음은 죽습니다. 예수님은 바른말 하다 포학의 세력에 목을 잘리는 요한을 보며, “요한은 한때 타서 비치는 등불이었다. 너희가 그 안에 있기를 즐겨했지” 했습니다. 그 말씀하시는 심정이 어떤 심정인가 생각해 보십시오. 골고다까지 나가신 것은 영웅적인 용기라기보다는 그 팔락거리는 등잔 하나를 꺼져버리게 해서는 아니 된다는 그 애절한 한 마음 때문일 것입니다.
씨알의 소리는 오늘의 팔락거리는 등잔입니다. 나 스스로가 직접 관계됐으므로 말하기는 어렵습니다마는 인간적인 인사말을 떠나서 한다면 그렇습니다. 이 등잔이 꺼져서는 아니됩니다. 모진 바람 불고 사나운 짐승 날뛰는 어두운 골짝에 초막 하나를 지켜가는 것은 결코 큰 돈이나 권력이 아닙니다. 호롱불 하나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호롱불은 또 무엇으로 지켜집니까? 지어미 지아비 사이에서 그 호롱보다도 더 약하게 가물거리는 사랑의 호롱불 때문 아닙니까? 호롱불이 꺼질 때 초막은 무너져 승냥이 굴이 될 것이요, 가슴과 가슴 사이의 사랑이 식는 순간 호롱은 꺼지고 골짜기는 지옥이 돼버릴 것입니다. 씨 여러분 여러분의 기도로 이 시대의 호롱에 기름을 대십시오. 팔락거리는 등잔 같은 한줌만한 갈랄라이야 무식쟁이들 속에 시대 구원의 소망을 부치면서 예수는 마지막 부탁이 사랑이었습니다. 내가 너희게 새 계명을 준다. 새 계명이지만 또 낡은 계명이다. 서로 사랑하라 그랬습니다. 역사의 맨첨 부터 있었으니 낡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간에 이 나로 인해서야 살아나니 새것입니다. 널리 세상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아닙니다. 진리의 부탁을 받은 사도들 자기네끼리의 사랑입니다. 끼리끼리를 좋아하는 당파주의가 아닙니다. 구경(究竟)은 모든 사람을 다 사랑하잔 것이지만 우선은 그것 위해 세계구원의 진리의 호롱불을 끄지 않기 위해서입 니다.
겨울이 오고 있습니다. 이 등잔을 꺼서는 아니됩니다.
새 소식
사람마다 만나기만 하면 주고받는 인사말이 “무슨 새 소식이 있습니까?” 합니다. 그만큼 가슴들이 답답한 것입니다. 가슴이 왜 답답합니까? 숨을 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바람이 썩었기 때문입니다. 바람은 천지에 가득 찬 바람, 자유자재하는 바람인데 왜 썩습니까? 방문을 굳게 닫았기 때문입니다. 숨을 왜 쉬지 못합니까? 목을 졸리우기 때문입니다. 옛날 초(楚) 회왕(懷王)이 송옥(宋玉)이란 신하를 데리고 난대궁에 앉았는데 바람이 획하고 불어오니 왕이 옷을 헤치고 바람을 받으면서 “어, 시원한 바람, 이게 내가 백성들과 같이 받는 것이로구나!” 했습니다. 그러자 송옥이 말하기를 “아닙니다. 이것은 임금 홀로 가지시는 숫바람(雄風)입니다. 어디 서인(庶人)들이 감히 같이할 수 있습니까?” 했습니다. 그것은 옥(玉)이 임금을 보고 찔러서 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얘기를 자기의 쓰는 결재정기(快哉亭記)에 끌어다 넣는 소철(蘇轍)이 말하기를 “바람에 숫바람 암바람 있을 리 없지만 사람에는 받고 못 받는 차이가 있으니 이것은 사람의 만든 변(變)이라”고 했습니다. 소위 영웅이니 거물이니 하는 것들의 하는 일이 스스로 대자연에 한때 장난을 해서 서민으로 하여금 부는 바람도 받을 수 없이 만들어 놓고는 “우리 다 같이 즐깁시다” 하는 식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부는 바람도 자유로 쐴 수가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정말 변인데, 변이 생기면 정말 큰변 난 것입니다.
내가 위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라고 했습니다만 사실은 우리를 두고 하는 말이지, 세상에는 별로 새 소식을 기다리지 않는, 즉 답답을 느끼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 편에서 보면 세상은 잘 돼 사실은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수가 많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문제사실수에 있지 않고 참에 있습니다. 어느 것이 참이냐? 답답하단 것이 참이냐? 일 없이 잘 사노란 것이 참이냐? 속아서는 아니됩니다. 참은 전체에 있습니다. 한 구석이라도 잘못이 생기면 전체가 잘못 된 것입니다. 그러면 잘 사노라던 사람도 잘 살 수가 없어참이냐맙니다. 옛날 중국에 초수삼호(楚雖三戶)나 망진자(亡秦者)는 필초(必楚)라는 말이다. 진시황(秦始皇)이 폭력으로 초(楚)를 쳐서 망 돼 하고 점령해 버렸지만, 초가 다 망 이냐눿 세 집만이 남는다 해도 나중에 진나라를 멸망시킬실은 우반드시 초나라 사람일거다 하는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진이 초(楚)를 먹, 초은 초가 원한 것이 아니라 폭력으로 했으니 거짓 일이 참에초(楚) 사람이 제 나라 찾자사실은 우참이니 참이우반드시 이길실은이라사실;를 먹, 힘이냐? 참이냐? 참이야말로 이기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대부분이 복종해도 그것이 옳다는 증거가 못됩니다. 소수라도 억울하게 눌린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큰 변이 일어나고야 맙니다. “답답하다!” 하는 것은 그 소수가 살아남기 위해 애를 쓰는 숨소리입니다. 역사의 운명은 거기 달렸습니다.
소식이란 말은 사람의 살아가는 일의 변천을 말하는 것인데 한문의 소식(消息)에서 나온 것입니다. 소(消)는 줄어들고 스러지고 없어지는 것이고, 식(息)은 불어나고 강해지고 크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우주에 있는 음양의 변천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 우주는 힘의 우주, 기(氣)의 우주입니다. 즉, 에너지입니다. 그런데 그 에너지가 작용할 때는 서로 반대되는 듯이 뵈는 두 가지로 작용합니다. 그것이 음(陰) 양(陽)입니다. 꼭 같은 하나인 에너지지만 생명을 가진 우리게는 양기는 좋은 듯이 느껴지고 음기는 나쁜 듯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소(消)란 그 음기가 줄어드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식(息)은 반가운 양기가 살아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음∼양지위도(∼陰∼湯之謂道)란 말이 있게 됩니다. 천지만물은 이 음(陰)에서 양(陽)으로, 또 양에서 음으로 쉬지 않고 돌아가는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군자는 이 소식영허(消息盈虚)하는 도(道)의 이치를 깨달아서 천행(天行), 곧 하늘걸음을 해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바꾸어 하면 물질과 정신의 관계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근본의 참은 하나인데 그것이 우리에게 느껴질 때는 물질과 정신의 두 가지 서로 반대되는 듯이 뵈는 두 힘으로 느껴집니다. 물질만인 생명도 정신만인 생명도 없습니다. 그러나 살아가는 이 인간에게는 정신은 살리는 것으로 물질은 죽이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그래서 답답을 느끼는 것은 그 정신적인 힘의 부족을 느끼는 데서 옵니다. 씨이 자기 속을 차게 기르려 할 때 그 속을 채우는 이란 곧 이 정신의 힘 입니다. 새 소식은 그러기 때문에, 결국 정신적 힘의 자라나는 것을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새 소식을 기다릴 때에 반드시 생각해야 할 것은 새 소식은 기다려서만 오는 것 아니라 스스로 새 소식을 지어낼 생각을 해서만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정신은 스스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새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것은 곧 하늘나라가 온다, 가깝다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본뜻은 그저 우리에게 좋은 소식을 주어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것을 받게 하잔 것이 아닙니다. 이 의미에서 소위 복음주의, 특별히 우리나라의 복음주의는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하늘나라는 결코 다 돼있는 기성품이 아닙니다. 정신에 그런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온전히 물질적인 생각입니다. 과연 예수님은 주기도에서 하늘나라가 임하게 해달라 했고,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했습니다. 그러나 땅이라니 땅의 어디입니까? 우리 마음 없이는 땅 없습니다. 또 내 마음이 없는 땅에 무엇이 임했다기로 그것이 하늘나라가 될 리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는 분명히 하늘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것이 아니라했고, 인자의 날은 언제 온다고 할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하늘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 했습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말입니다. 이 안이라는 말은 우리 속이란 뜻도 있고 우리들 가운데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의 자아는 몸에 있지 않고 속마음에 있으며, 또 자아는 개인만 아니라 같이 살아가는 공동체 속에 있습니다. 개체적인 영혼만 아는 사람은 하늘나라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하늘나라는 결코 개개 영혼의 집단체가 아닙니다. 그것은 순전히 물질적인 사고방식을 못 면한 생각입니다. 예수님의 하늘나라는 헤매는 외로운 영혼 하나만이라도 내버려두고는 성립이 되지 않는 하나의 생명, 전체적인 정신의 나라입니다. 그것은 시간 공간의 제한을 초월하는 나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때가 오지만 지금도 그때다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늘나라는 현재 이 시간에 있는 것입니다. 하늘나라 가깝다는 것은 일년 후, 한 시간 후에 오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늘나라는 영원한 현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결국 시간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은 결국 시시각각으로 내 마음, 우리 마음속에 살려서만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정말 가까운 것입니다. 누구나 믿기만 하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있다가 언제 이기는 것 아니라 이제 여기서 순간마다 벌써 이기고 있는 것이요 누구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이러한 나라에, 이러한 해방에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기쁜 소식은 가만있어 들어서 들리는 것이 아니고 내가 곧 그 소식이 되려해서만 들려지는 소식입니다. 나는 나폴레옹을 싫어합니다마는 한 가지 점에서만은 그를 칭찬합니다. 코르시카 섬의 상놈에서 나서 유럽을 흔드는 제왕이 된 것은 좋으나 그 놈은 근본이 없다고, 없이 보는 여러 나라 임금들이 언제 모여서 연회를 하는 자리에서 한 번 모욕을 주려고 “폐하의 조상은 누구시지요?” 하고 물었더랍니다. 그랬더니 그 땅달보가 서슴지 않고 하는 대답이 “나는 이제부터 조상이 되렵니다” 했다는 것입니다. 과연 배짱이 있습니다. 아마 그것 때문에 한 동안은 한동안이지만 나가는 역사에 능히 방해를 놓았던 것입니다. 악이라도 그런 무엇이 있지 않고는 아니 됩니다. 무엇입니까? 스스로 하는 정신입니다.
그런데 복음이란다고 그저 믿고만 있다가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주여, 주여” 하는 자들보고 “내가 너희를 도무지 모른다!” 했습니다. 십자가에 희생이 되면서 자기가 스스로 해방의 기쁜 소식이 된 그 소식을 어떻게 세상나라에서 주는 별 달고 안락한 생활하다가 받겠단 말입니까? 하늘나라를 정말 제 속에 이미 체험했다면, 부활을 정말 믿는다면 우리도 능히 스스로의 죽음을 참음으로 해방의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反者道之動
왜 가슴이 답답합니까? 의와 악의 싸움에서 이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숨을 못 쉬어 답답하다 했습니다마는 숨 못 쉬는 원인을 남에게만 돌리면 잘못입니다. 물질에서는 밖이 있지만 정신에는 밖이 없습니다. 자유하는 마음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숨을 못 쉬는 근본책임은 내가 져야 합니다. 사회악의 책임을 남에게만 돌리는 것은 정치에서나 하는 소리지, 나라를 제 속에 가지는 씨은 그런 소리해서는 아니 됩니다. 일이 어려워져서 가슴이 답답한 것은 참을 원하시는 하나님이 우리게 자격을 길러주시려고 시련 속에 넣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낙심을 해서도 아니 되지만 또 지기 싫다는 마음에 실력도 없이 될 수도 없는 저항을 되풀이만 자꾸 해도 아니 됩니다. 됩니다. 아까운 희생을 더 낼 뿐이요 결국은 사랑으로써 안아서 이기자는 저쪽을 점점 더 마음이 굳어지게만 만들 뿐입니다. 국가주의에서야 뭐라거나, 우리게는 미운 사람이 하나라도 있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게는 대화할 수 없는 대적이라곤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비폭력 투쟁의 위대한 혼들은 우리게 그것을 가르쳐줍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금에, 우리 생각이 옳은 줄 알면서도 우리가 이기지 못한 이때에, 할일은 회개입니다. 회개란 돌이켜 생각하는 것, 근본적으로 고쳐 생각하는 것입니다. 근본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 혼에 있습니다. 우리 혼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이기지 못한 것은 우리 혼이 자유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나 간디가 보여 주는 것은 사람의 혼이 참 자유하는 자리에 갈 때는 그 힘이 무한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어떤 크고 조직적인 폭력도 자유하는 혼 앞에는 못견딘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한 것은 물론이요 또 그것이 참인 것을 우리가 알지만, 간디도 같은 증거를 했습니다. 그는 진리파지운동은 강자의 운동이지 결코 약자의 운동이 아니라고 거듭거듭 말했습니다. 힌두 스와라지 속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만일 자유하게 된다면 인도는 자유입니다. 이 생각 중에 스와라지의 정의가 들어 있습니다. 스와라지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다스릴 줄 알 때에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 손안에 있습니다.… 그런 스와라지는 각자가 체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에 빠진 놈이 남을 건질 수는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종이면서 남을 자유하게 놔준다는 것은 빈말뿐입니다.”
이 우주에 음과 양이 있듯이 우리의 해방운동에도 음과 양이 있습니다. 음 없이 양 있을 수 없고 양 없이 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해방운동의 양은 사회적 저항운동이요, 그 음은 개인의 자기 해방 운동입니다. 참 자유는 이들이 합작이 되어야 이루어집니다. 사회적 저항 없는 자아 해방 운동은 싹트지 못하고 마는 종자요, 자아의 해방 없는 사회혁명은 뿌리 없이 꺾어다 심은 나무입니다.
이제 우리 솔직히 자아의 해방되지 못한 것을 인정하고 깊이 생각하기를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면 화가 복이 되고 부끄럼이 영광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하늘나라가 가깝다고 하면서 회개를 부르짖은 것은 이 때문입니다.
회개를 동양 옛날 종교의 말로 하면 반(反), 혹은 부(復)입니다. 근본에 돌아가는 일입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든다면 신약 누가복음에 있는 헤매던 아들의 돌아오는 이야기 같은 것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주인이 되어 하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혹은 도(道)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완전한 방향의 전환, 혹은 중심의 바뀜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내가 철저히 무(無)에 돌아가야 합니다. 이날까지 나인 줄 알았던 것이 내가 아닙니다. 내 육신적 개체적인 나가 나를 속였습니다. 참 나인 내 혼은 그 속에 갇혀서 자유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자유라 하면서 참 자유를 몰랐고, 정의를 부르짖으면서 악의 속에 있었고, 평화를 원한다 하면서 참사랑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실패의 원인은 거기 있습니다. 만일 지난날의 우리를 가지고, 비슷하면서도 아닌 해방운동을 가지고 성공했더라면 우리 자신이 또 압박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실패케 하여 우리 속에 정결을 찾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자기를 부정하고 제 십자가를 지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러한 철저한 자기 부정을 통과하지 않고는 아직 참 자아를 모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물질의 힘밖에 아니므로 보다 큰 물질적인 힘이 오면 굴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자아를 철저히 부정했을 때, 물질의 힘을 내 속에서 완전히 부정했을 때, 새 힘이 거기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반자(反者)는 도지동(道之動)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것 아니라 도(道) 자체가 움직이는 것 입니다. 하나님의 주시는 힘이란 말입니다. 예수께서 일생 힘쓰신 것은 “내 뜻대로 마옵시고 당신 뜻대로”라는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능히 육신을 쓰고 있으면서도 “나를 본 것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고 했습니다.
그 지경을 말해서 역(易)에는 적연부동 감이수통(寂然不動 感而遂通)이라고 했습니다. 적연(寂然)입니다. 아무 소리도 없는 것입니다. 부동(不動)입니다. 내가 하기를 완전히 정지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럴 때 새 일이 일어납니다. 감동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능히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주의 안테나입니다. 적연부동(寂然不動)하는 것은 그 안테나를 하늘나라 방송 파장에 맞추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동(動) 아닌 동(動), 함 아닌 함입니다. 그러므로 적연부동(寂然不動)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말하자면 내가 영점에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진공상태가 될 때 통해지는 것입니다. 비폭력 투쟁은 그러한 확 신에 들어간 후에야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다 거짓했습니다. 그러므로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실패는 하면서도 거기서 맛본 참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키우면 됩니다. 간디도 처음엔 히말라야적 오산(誤算)을 했노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솔직 그렇게 겸손했기 때문에 그 조그만 몸속에서 몇천년 썩었던 인도의 혼을 잡아 일으켜 자립하고 일어서게 하는 운동을 지도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간디는 말하기를 자기의 한일은 누구도 할 수 있다 했습니다. 그가 거짓말할 리가 없습니다. 용기를 가질 만하지 않습니까? 그만 입니까? 예수는 아주 말씀하시기를 자기 하신 것보다 더 큰 것도 할 수 있을 것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실패했고 부끄러우면서도 보람을 느낍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에게로 돌아갑시다. 절대의 동(動)이 일어날 것입니다.
씨알의 소리 1975.9 46호
전작집; 8- 309
전집; 8- 2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