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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통한 자녀교육
다산은 먼저 자신의 귀양으로 위기에 처한 자녀들에게 ‘문명세계를 떠나지 말아라’라는 편지로 ‘한양 입성’이라는 특명을 내린다. “만약 벼슬길이 끊어져 버리면 빨리 서울에 붙어살면서 문화의 안목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다산은 자신의 유배와 형들의 불행한 일로 인해 집안이 위기에 처하자 자녀들에게 ‘서울사수’라는 응급처방을 내렸던 것이다. 나아가 다산은 두 아들에게 서울 주변(수도권)을 떠나서는 안 되며, 가능하면 서울 한복판으로 들어가 살아야 한다고 당부한다.
“지금 내가 죄인이 되어 너희들에게 아직은 시골에 숨어서 살게 하였다만, 앞으로는 오직 서울의 십리 안에만 가히 살아야 한다. 또 만약 집안의 힘이 쇠락하여 서울 한복판으로 깊이 들어갈 수 없다면 잠시 서울 근교에 살면서 과일과 채소를 심어 생활을 유지하다가 재산이 조금 불어나면 바로 도시 복판으로 들어가도 늦지는 않다.”
당시 한양은 외국문물과 정보접근 등에서 다른 지역과 비교가 되지 않는 곳이었다. 시대에 뒤지지 않기 위해서는 가능한 서울에 살 필요가 있었다. 자칫 시골에 은둔해 산다면 재기의 기회조차 잃을 수 있다. 그래서 지금 당장은 어렵겠지만 앞으로 어떻게든 서울로 들어가 살아야 한다는 ‘서울입성’을 주문한 것이다. 다산은 교육에서 환경의 중요성을 파악하고 자녀교육에 적용했다고 볼 수 있다.
유배당한 처지에 있던 다산으로서는 ‘서울사수’라는 지침은 공격적인 가문 경영에 해당할 것이다. 자신의 유배를 비관하거나 혹은 ‘자손보호’를 명목으로 정치적으로 화를 당하지 않게 고향에서 안분자족하며 살 것을 권고했을 수도 있었지만 다산은 그렇지 않았다. 두 아들에게 과거시험을 볼 수 없더라도 학문을 통해 성인이나 문장가는 될 수 있다고 독려하는 편지를 보낸 것이다.
“혼인길이 막혀 비천한 집안과 결혼해 물고기의 입술이나 강아지의 이마 몰골을 한 자식이 태어나면 그 집안은 영영 끝장이 난다. 이래도 학문을 게을리 할 작정이냐.” 다산은 두 아들에게 다소 ‘세속적’인 비유를 동원하면서 학문에 힘쓸 것을 강조했는데, 다소 세속적인 비유지만 오히려 더 아버지로서의 정을 느낄 수 있다.
다산은 불우한 환경과 악조건에서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아 자신을 일으켜 세운 이들에 대한 이야기도 두 아들에게 들려주었다. 이 중에서 다산 자신을 학문의 세계로 이끈 등대 역할을 한 성호 이익을 역경을 극복하고 학자로 성공한 모델로 꼽았다. 다산은 성호 이익을 자신이 본받아야 할 ‘역할모델’로 삼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