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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살롬에게 쫓길 때의 다윗의 기도
(시편 3:1~8)
* 본문요약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겨 도망할 때의 다윗의 기도입니다. 다윗은 자기를 대적하여 치는 자가 어찌 그리 많은지 탄식하며 호소합니다. 그러나 여호와는 자신을 지키시는 완벽한 방패시며, 영광이시라고 노래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응답하시리라 확신하며 천만인이 그를 에워싸 진 친다 하더라도 주의 보호하심을 믿고 편안히 누워 자고 깬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아직 두려움을 완전히 벗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주께 다시 한 번 자신을 구원해주시고 복을 내려주실 것을 간구합니다.
찬 양 : 464장(새 406) 곤한 내 영혼 편히 쉴 곳과
455장(새 370) 주 안에 있는 나에게
* 본문해설
1)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
2)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하나이다. (셀라)
3)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시니이다.
4) 내가 나의 목소리로(큰 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거룩한 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
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6) 천만의 대적이 나를 둘러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7)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님은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시는(부러뜨리시는) 분이시니이다.
8)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
- 셀라(2절) :
셀라는 시인이 강조하고자 하는 부분에 붙인 음악적인 용어. ‘셀라’의 어근인 ‘살랄’의 의미가 ‘일으키다, 높이다’의 뜻이므로, 예배 때나 성가대가 찬양할 때 이 부분을 큰 소리로 높여 부르거나, 음을 한 옥타브 높여 부르는 것과 같은 음악적인 용어입니다.
- 나의 방패(3절) :
원어에는 방패(마겐) 앞에 ‘~의 주위에’라는 뜻의‘바아디’라는 전치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둘러싼 방패’가 더 바른 번역입니다. 하나님은 사방의 공격을 막아주는 완벽한 방패라는 뜻입니다.
- 뺨을 친다(7절) : 뺨을 친다는 것은 부끄러운 수치를 준다는 뜻
- 이를 꺾는다(7절) : 그의 모든 무기를 빼앗아서 힘이 없는 무력한 존재로 만든다는 뜻
* 묵상 point
1. 시편 3편의 역사적 배경 : 압살롬에게 쫓기는 다윗
시편 3편은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길 때 지은 시’라는 표제가 붙어 있습니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황망하게 쫓기며 도망하였으나, 결국 하나님께서 이 환난으로부터 자신을 구하여주실 것임을 믿으며 고백한 시입니다. 이때의 상황은 사무엘하 15~17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 묵상 : 시편 3편을 통해 절망 속에서 기도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결국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다윗은 압살롬의 반란군을 물리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만, 도망할 때의 다윗의 심정은 자신의 측근들을 제외하고 이스라엘 전체가 다 자신을 배반하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시편 3편의 기도를 드릴 때의 다윗의 심정은 절망 그 자체였습니다. 한 치의 앞도 보이지 않는 완벽한 절망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다윗의 심정을 이해한다면, 절망과 아픔을 당할 때 기도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2. 다윗의 탄식의 기도
1)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1절)
“이스라엘 인심이 다 압살롬에게로 돌아갔나이다”(삼하 15:13) 이것은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 일을 처음 다윗에게 보고한 내용입니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압살롬이 다윗의 핵심 측근이며 모사였던 아히도벨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인 후, 상황도 알지 못하는 각 지파의 지도자 200명을 초청하여 모인 자리에서 느닷없이 나팔을 불면 압살롬이 왕이 되었다고 소리치게 한 것입니다. 다윗에게 보고한 자는 이 장면만 보고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이 압살롬에게 향하였다고 보고한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상황이야 어찌 되었든 간에 다윗은 이 말을 진짜로 알아듣고 깊은 절망에 빠집니다.
2) 사람들이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2절)
그대로 있다가는 압살롬의 반란군에 자기뿐 아니라 자기를 도운 사람들까지 모두 다 죽게 될 것이라 생각한 다윗은 버선발로 도망하듯 급히 도망합니다. 겨우 요단 강가에 도착한 다윗 일행은 심신이 지쳐 피곤해 있었으나, 압살롬 진영에 있던 다윗의 친구 후새로부터 압살롬이 오늘 밤에 다윗을 죽이려할지 모른다는 전갈을 받고 그 밤에 요단 강을 건너는 두 번째 피난을 합니다.
이때 다윗이 하나님께 드린 기도가 바로 이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대적하여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하나이다.” 그리고 여기에 (셀라)를 붙였습니다. 이 부분이 강조된 이유는,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기는 것보다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말하는 소리들에 더 마음이 상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있다면 이보다 더한 고난도 얼마든지 당하겠지만,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면 단 하루도 살아갈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내가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고들 합니다”하고 하소연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 묵상 : 절망은 상황을 실제보다 훨씬 나쁘게 보게 합니다.
다윗이 압살롬이 반란을 했다는 보고를 처음 받았을 때 압살롬의 상태는 아직 군대 진영도 갖추지 않은 때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에게는 군대가 있었고, 무엇보다도 그가 사울에게 쫓길 때부터 그와 함께 동고동락했던 600명의 아둘람 공동체가 있었습니다(삼하 15:18). 그러므로 다윗이 상황을 좀 더 살폈더라면 바로 그날 압살롬의 반란군은 진압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상황을 잘못 판단하고 도망하는 바람에 압살롬이 군대의 진용을 갖출 기회만 갖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절망감은 상황을 실제보다 훨씬 나쁘게 보게 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동안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이 많이 있었으나 아직 그렇게 살아있지 않습니까? 절망감에 빠졌을 때 죽을 것 같은 두려움에 몰입되지 마십시오. 그 시간에 하나님께 상황을 아뢰고, 자신의 실제 상황이 어떠한지를 차분히 생각해보십시오. 많은 경우에 쥐새끼를 사자로 착각합니다.
3. 의인이 당하는 고난과 환난
1) 시대가 악하면 의인이 고난을 당합니다.
시편 3편이 다윗의 이러한 역사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만, 시편 1~2편에 이어 이 시가 시편 3편에 편집된 이유는, 의인이 당하는 고난과 환난에 대한 말씀을 하려는 것입니다. 시편 1편에서 여호와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복 있는 자라고 했습니다. 시편 2편에서는 그러한 의인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왕으로 세우실 것이며, 그가 그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들을 철장으로 다스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악하면 의인이 고난을 당합니다. 시편 2편은 의인을 핍박하는 악인들이 결국 멸망을 당하리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으나, 그들이 망하기까지는 그 악한 자들이 권세를 잡고 악을 행하는 시대가 됩니다. 이렇게 악이 권세를 잡은 때에는 비록 잠시 동안이라 하더라도 의인이 환난과 고통을 당하는 때가 됩니다.
2) 이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지켜보고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비록 악이 기승을 부리는 때가 있다고 하더라도 악의 권세는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잠시 후에는 그들이 이 땅에 있었는지 기억조자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다가 환난과 고통을 당할 때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께서 그들이 환난 중에도 주님을 믿는 신앙의 자리를 잘 지켰음을 보고 계십니다.
4. 환난 중의 다윗의 고백 : 하나님은 나의 방패시라
1)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3절)
반란군에 쫓기는 다윗, 그것도 그 반란군의 수괴가 바로 자신의 아들 압살롬이라는 사실에 다윗은 깊은 절망감에 빠집니다. 한 치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완벽한 어두움이 밀려옵니다. 그러나 그 깊은 절망의 한복판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합니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시니이다.” 하나님은 내 주변을 완벽하게 막아서 적군이 사방 어디에서 쳐들어오든 간에 나를 막아주실 완벽한 방패이십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영광을 내려 주시는 분, 적군 앞에서 내 머리를 들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욥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믿음으로 그 고난을 이겨낸 것과 같이, 다윗도 깊은 절망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하며 힘을 얻습니다.
2) 환난 중에 편안히 누워 자고 깨는 다윗(5절)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할 때 다윗은 누워 자고 깨는 평범한 일상의 행복을 노래합니다. 그날 밤에 두 번이나 황망하게 피난을 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다윗이 평안하게 안심하고 자고 깨는 일을 이처럼 귀하게 여기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절망의 한복판에서도 평안히 자고 또 평안히 일어나게 하시는 분, 그가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3) 천만의 대적이 나를 둘러 진 친다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6절)
그러므로 천만의 대적이 다윗을 둘러 진을 치고 있다 할지라도 다윗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공격을 완벽하게 막아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평안히 자고 평안히 일어나는 자가 됩니다.
4) 주님은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시는 분(7절)
하나님께서는 결국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실 것입니다. 원수의 뺨을 치신다는 것은 원수들에게 모든 수치와 부끄러움을 내리신다는 것이고, 악인의 이를 꺾으신다는 것은 악인이 가진 모든 무기를 빼앗아서 그들을 무력하게 만드시리라는 것을 말씀합니다. 이 말씀 그대로 바로 그 후에 일어난 전투에서 압살롬의 반란군은 패하고 다윗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 묵상 : 마귀의 무기를 빼앗으신 예수님(7절)
이 말씀은 또한 예수님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마귀의 무기는 모두 빼앗겼습니다. 마귀가 사람을 공격할 무기가 없어졌습니다. 이제 마귀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만 사람을 유혹하여 스스로 죄에 빠지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마귀를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주님의 은혜 아래 있는 자가 되십시오.
5. 기도와 간구
1)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7절)
그러나 아직 환난은 끝나지 않았고, 다윗의 마음에 불안감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께 일어나 나기를 도와달라고 기도합니다.
2)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8절)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오직 여호와께만 있으니, 주의 복을 주님의 백성들에게 내려달라고 간구합니다.
● 묵상 : 신앙고백과 간구, 찬양과 기도를 반복하는 다윗
이렇게 시편에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는다는 신앙의 고백을 하다가 도와달라는 간구의 기도를 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다가 자신이 힘이 드니 속히 구원해달라는 간구의 기도가 반복됩니다. 주께 대한 신앙고백을 하다가 갑자기 불안감에 빠지는 것은 우리가 아직 연약한 육신을 입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절망과 좌절감이 생긴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좌절감에 몰입되어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시편에서 배워야 할 신앙의 바른 자세입니다. 절망과 좌절감이 생겼을 때에는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하고, 그러다 주께서 나를 도우시리라는 믿음을 주실 때에는 다윗처럼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반복하는 자가 되십시오.
* 기도제목
1. 절망감에 빠졌을 때 그것에 몰입되어 파멸에 빠지는 자가 되지 말게 하옵소서.
2. 다윗처럼 우리도 기쁠 때는 찬양하고, 답답할 때는 기도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3. 이렇게 좋든지 나쁘든지 간에 항상 주와 함께 동행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출처: 가애교회 글쓴이: 송호영
부르짖는 기도의 축복
(시 3:1-8)
이 시간 “부르짖는 기도의 축복”이라는 제목으로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목회하면서 간혹 이런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꼭 소리 내서 부르짖어야 하나요?” 하는 질문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어떻게 대답해 주시렵니까? “부르짖는 기도란 성경에 없는 것이니 하지 마세요. 하나님 귀먹지 않았어요” 하시렵니까? 아니면 “부르짖는 기도는 성경적이니 필요 적절하게 활용하세요.”라고 대답하시렵니까? 답을 말씀드리면 후자입니다. 항상 부르짖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부르짖는 기도가 필요할 때 부르짖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부르짖는 기도를 무수히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부르짖는 기도란 무엇일까요? 성경의 예는 많지만 다윗이 경험한 말씀으로 오늘 시편 3편을 통해서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본문은 다윗이 부르짖는 기도로 위기를 극복하는 장면입니다. 본 다윗의 시편은 크게 두 단락으로 나뉩니다. 먼저는 부르짖지 않았을 때 있던 일과 다음은 부르짖은 후에 있었던 일입니다.
부르짖지 않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1. 대적들이 일어나 득세하였습니다.
1절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 본시는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난을 피해 다닐 때 지은 시입니다. 그 때 당한 답답함과 괴로움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믿고 믿은 사랑하는 아들이 아버지의 왕좌를 차지하겠다고 군대를 이끌고 잡으러 다니니 이 얼마나 비극적인 일입니까? 온 나라의 사람들이 압살롬의 편에 섰으니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모두가 다윗의 대적들뿐입니다.
혹시 대적이 많아 마음이 산란하고 상한 사람 이런 사람은 안 계십니까? 평안하지 않고 이런 일 저런 일로 세상 살기가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하나님 섬기면 평안하다는데 평안이 없습니다. 기도하면 평안하다는데 평안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핍박을 받고 매를 맞으면서도 기쁨이 충만한데 그런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신앙 안에서 사는데도 마음의 괴로움뿐이라면 왜 그런지 알아야 합니다. 부르짖는 기도의 부족 때문입니다. 다윗은 아들이 반란을 일으킬 때 잘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너무나 부끄럽고 슬프고 그리고 아들과 싸우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당하고 말지 아들과 싸우려는 아버지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피하기만 하고 부르짖지 못했습니다. 그랬더니 온 나라에 자기를 배반하는 대적들로 가득차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부르짖어 보세요. 사단은 물러갑니다. 상한 마음과 괴로움도 물러갑니다. 문제가 심하다면 묵상만 하려고 하지 말고 부르짖으시기 바랍니다. 가정을 위해 기도하세요. 교회를 위해 기도하세요. 사회와 나라를 위해 기도하세요. 부르짖으세요. 하나님께서 악의 세력 다 물리쳐 주시고 평안함을 주실 것입니다.
부르짖는 기도는 강력한 포화와 같습니다. 2차대전의 승패가 어떻게 났습니까? 노르만디 상륙작전의 성공입니다. 노르만디 해안에 연합군 수만명이 상륙할 때 어떻게 했나요? 독일군 병력들이 해안에 포진해 있을 때 상륙한다면 집중 포화를 맞아 실패합니다. 그런데 함대과 비행기로 폭격해서 노르만디에 주둔해 있는 독일군을 초토화시켜 상륙작전에 성공했습니다. 6.25전쟁 때 인천상륙작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먼저 함포로 적군을 초토화시킬 때 성공했습니다. 이처럼 기도로서 이 세상 악한 영들에게 포화를 가해야 합니다. 기도 없이 민족복음화 세계복음화는 불가능합니다. 한국교회에 기도가 살아난다면 세계복음화는 하나님이 하십니다.
기도하는 한 사람은 기도하지 않는 한 민족보다 더 강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미국의 최신예 폭격기 F22와 F16이 시뮬레이션으로 가상 공중전을 했습니다. F22기 1대가 F16 144대를 격추시켰습니다. 여러분 F16기나 F18기도 세계 최강 전투기입니다. 그런데 144대가 완전히 격추 당했습니다. F22 1대면 세계 제 2위의 스텔스기 F35 10대 이상을 카버합니다. 이론상으로는 F35 10대 가진 것보다 F22 1대 가진 것이 낫다는 말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미국이 F22를 판매하지 않아서 차세대 전투기로 F35를 도입하려고 하는데 그러나 이걸 가지고는 일본을 방어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F22와 같은 강력한 기도의 용사가 많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삶에 우리의 모임에 우리의 집회에 부르짖는 기도가 살아나길 원합니다.
2. 부르짖지 않을 때 도움을 받지 못했습니다.
2절 “많은 사람이 있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함께 하시는 증거가 나타나지 않자 사람들이 실망하는 장면입니다. 백성들은 다윗 편에 설 것인가? 반란을 일으킨 아들 편에 설 것인가? 특히 신하들은 그런 고민에 휩싸였습니다. 이것은 생존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대세를 살펴봅니다. 그런데 아들은 형통한데 다윗에게는 하나님의 도움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온 나라는 압살롬을 따릅니다.
북한의 김일성이 죽었을 때 김일성의 죽음을 전후로 한 스토리가 있어 관심을 끌게 하더군요. 어느 정도 사실인지 모르지만 김일성을 죽인 사람은 김정일이라고요. 칼로 죽인 것은 아니지만 아버지가 심장병이 발했을 때 주치의도 분리시켜 놓고 방치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남한과 통일을 급속히 진행하는데 그것을 김정일이 좋아할 리 있겠습니까? 자기 실권이 사라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 북한의 실권자들이 대부분 김정일의 편에 섰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장 안전하다고 보았습니다. 이처럼 다윗에게 하나님의 도움이 나타나지 않으니 사람들은 압살롬을 따랐습니다. 그 원인은 부르짖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의 부흥의 역사를 보면 소리가 있었습니다. 기도하는 소리가 터를 울렸습니다. 지금도 살아있는 교회들을 보면 기도소리가 있는 교회들입니다. 그래서 한국교회의 부흥은 소리에 있었고 한국교회의 쇠퇴 역시 소리에 있었습니다. 소리가 있을 때는 부흥했지만 소리가 약해질 때 쇠퇴하였습니다. 그런데 모임이 조용해졌습니다. 예배가 조용해졌습니다. 그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소리 내는 기도를 유치하게 생각합니다. 이 시대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통성 기도할 줄을 모릅니다. 비정상입니다. 성경은 부르짖는 기도를 말씀하는데 내 맘대로 성경을 고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율법에 얼른 이해가 되지 않는 법 하나가 있습니다. 신22:23-24에 여자가 성읍에서 강간을 당하면 강간한 남자와 처녀를 함께 죽였습니다. 왜 남자만 죽이지 않고 여자까지 죽였을까요? 남자가 범죄했는데 왜 여자까지 죽였느냐는 말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율법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처녀는 성읍 중에 있어서도 소리 지르지 아니 하였음이요. 그 남자는 그 이웃의 아내를 욕보였음이라” 여자가 충분히 소리 질러 피할 수 있었음에도 소리 지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합니까? 기도에 대한 교훈을 줍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면 하나님이 도와주실 텐데 기도하지 않고 우리 심령이 세상에 물들어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순결을 잃어버린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 책임이라는 말입니다. 내 잘못입니다. 항상 부르짖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부르짖는 기도가 필요할 때 부르짖어야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것은 당하느냐 여부를 결정짓는 사항입니다.
이처럼 다윗은 참으로 어려운 가운데 몰리고 몰리며 쫓기고 쫓기다가 비로소 부르짖기 시작합니다. 3절에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 이렇게만 외쳤는데도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달라집니까?
부르짖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3. 부르짖을 때 하나님의 응답이 나타났습니다.
4절에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부르짖는 기도가 환경을 역전시켰습니다. 시50:15에 "환난 날에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했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어둠의 세상을 개혁할 수 있었던 것은 힘찬 찬송과 기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리고 성도 소리로 무너졌습니다.
하갈과 그 아들 이스마엘이 광야에서 목말라 죽어갈 때 방성대곡하며 부르짖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물을 주셨습니다. 삼손도 블레셋과 싸울 때 목이 갈하여 잡힐 위기에 부르짖었더니 하나님이 우묵한 곳을 터치셔서 물을 주셨습니다. 부르짖는 기도가 회복 될 때 우리의 삶은 상상할 수 없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극복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소년과 노인의 차이가 있는데 소리에 있답니다. 노인은 소리 내기를 싫어합니다. 시끄러운 소리도 싫어합니다. 너무 조용한 것도 좋아하지는 않지만 시끄러운 소리는 정말 싫어합니다. 이것을 극복해야 합니다. 내 영혼이 살기 위해서라도 늘 소리를 내야 합니다.
4. 부르짖을 때 하나님의 붙드심을 느꼈습니다.
5-6절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 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 다윗이 부르짖고 나자 먼저 변한 것은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붙드심을 느꼈습니다. 천만 인이 둘러치려 하여도 조금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붙드심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부르짖을 때 성령의 충만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부르짖는 기도는 성경의 명령이며 약속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3)했습니다. 사30:19에도 “시온에 거하며 예루살렘에 거하는 백성아 너는 다시 통곡하지 않을 것이라 그가 너의 부르짖는 소리를 인하여 네게 은혜를 베푸시되 들으실 때에 네게 응답하시리라” 하셨습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도 부르짖을 때 모세를 보내 구원해 주셨습니다.
5. 부르짖을 때 승리를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7절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여기 꺾으셨다는 말씀이 이해가 되십니까? 승리를 얻기 전에 승리의 확신이 온 것입니다. 사사기를 보세요.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부르짖음에서 하늘의 구원이 시작되었습니다. 문제가 있을 때마다 부르짖었던 이스라엘, 그러나 믿음 없는 사람들은 부르짖지 않고 원망하기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눅18:7) 하셨습니다. 그만큼 소원을 품고 부르짖으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제자들에게 부르짖는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신앙생활은 성경 말씀대로 하는 것입니다. 적당한 소리로 발성의 기도를 시작하십시다. 초대교회의 모습을 회복합시다. 우리 모두 다윗과 같이 부르짖는 기도를 통해서 어려운 문제가 해결되고 하나님의 놀라운 응답을 받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agas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