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630 달리다굼 시 130; 삼하 1:1, 17-27 ; 고후 8:7-15; 막 5:21-43
“용기를 나에게 달라”, “용기를 내시오” 어릴 적부터 줄곧, 종종, 자주 들어오던 말입니다. 사람은 이름이 한몫한다고 하는데,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에게 정말 용기가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런 와중에 가장 용기가 있었던 시절을 떠올려봅니다. 신앙과 관련한 용기 같습니다. 20대 중반이었습니다. 암 투병으로 유명을 달리하려는 외삼촌에게 손을 얹었습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었던지, 사람들이 있든 말든 큰소리로 정말 외삼촌이 일어날 것처럼 소리칩니다.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라”, 얼마 지나지 않아 죽어가는 송아지를 붙들고 또 같은 소리를 지릅니다. 결과는 외삼촌과 송아지 모두 생사를 달리했습니다만, 제 인생에서 가장 용감한 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동시에 돌아보면 편협한 신앙관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고, 그 공을 가로채려는 욕망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 만약 기적이 일어났더라면 지금쯤 이상한 사람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기적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 기적이고, 하나님의 은혜인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의 기적을 보았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어린 딸이 죽음 직전에 있습니다. 아비의 다급한 심정이 전해진 것인지 예수는 두말하지 않고 딸에게로 갑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여있는지 군중을 헤쳐나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여차여차 시간이 지체되자 그만 딸이 죽고 말았습니다. 순간 아비인 회당장의 마음이 무너집니다. 자칫 원망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길을 막은 사람들, 예수를 붙잡은 사람들 등등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 무너져내렸습니다. 그때 예수는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라며 위로합니다. 그것이 위로가 되었을지는 각자 다를 것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위로, 어떤 이에게는 희망, 어떤 이에게는 비아냥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결과에 따라 혹은 믿음의 분량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그렇게 지체된 시간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죽은 아이의 손을 잡으며 “달리다굼” 일어나라고 합니다. 아이는 곧 일어나 걸어다녔다라고 하는 오늘 본문의 기적을 목격합니다.
예수의 달리다굼 기적과 저의 달리다굼의 기적은 무엇이 다를까요? 예수에게서는 사람이 살아나고, 저에게서는 사람이 죽은 것일까요? 비교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일차적이고 일반적 견해입니다. 신성모독이라고 까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주목은 생명의 존엄에 관한 것입니다. 살아나고 죽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롯이 생명의 신비, 곧 하늘의 영역,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다만 우리는 생명에 대한 존중에 있을 따름입니다. 살아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죽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이고, 고백입니다. 달리다굼이라고 명령했음에도 살아나지 않는다고 실망할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통해 존엄함을 깨닫는 것입니다. 딸을 살리고자 하는 아비의 마음,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아비를 위로하고자 하는 예수의 마음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사무엘 하 본문은 이런 맥락에서 읽을 때 이해가 갑니다.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은 다윗에게 가장 악랄한 적입니다. 사울의 눈에 다윗은 시기와 질투의 화신입니다. 어떻게든 다윗만 없앤다면 모든 부와 명예와 권력은 자기 몫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가장 먼저 처치해야 할 적입니다. 그럼에도 다윗에게는 영원한 왕이라는 마음이 있었던 것일까요? 끝끝내 사울의 죽음을 안타까워합니다. 사울을 추모하는 조가를 지어 백성들이 부르게까지 합니다. 가장 악한 적의 죽음은 가장 기쁜 소식이지만, 다윗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나 봅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다윗의 마음은 인간의 존엄에 대한 것일까요?
고린도 후서 본문에 바울의 말을 되새겨 봅니다.
“지금 여러분의 넉넉한 살림이 그들의 궁핍을 채워 주면, 그들의 살림이 넉넉해질 때에는, 그들이 여러분의 궁핍을 채워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평형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하기를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았다" 한 것과 같습니다.” 하늘나라가 이런 것 아닐까요? 달리다굼의 신앙이 이런 것 아닐까요?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마음, 혹 그렇지 못해서 아쉽고,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위로하는 마음, 여기에 하나님 나라가 있지 않을까요? 이런저런 잣대로 사람을 평가하기보다, 순수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먼저 바라보고자 하는 마음, 오늘 우리의 주목은 여기에 있기를 원합니다. 침묵!
40630 시 130; 삼하 1:1, 17-27 ; 고후 8:7-15; 막 5:21-43
시 130
1 주님, 내가 깊은 구렁 속에서 주님을 불렀습니다.
2 주님, 내 소리를 들어 주십시오. 나의 애원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3 주님, 주께서 죄를 지켜 보고 계시면, 주님 앞에 누가 감히 버티어 설 수 있겠습니까?
4 용서는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므로, 우리가 주님만을 경외합니다.
5 내가 주님을 기다린다. 내 영혼이 주님을 기다리며 내가 주의 말씀만을 바란다.
6 내 영혼이 주님을 기다림이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 간절하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 간절하다.
7 이스라엘아, 주님만을 의지하여라. 주님께만 인자하심이 있고, 속량하시는 큰 능력은 그에게만 있다.
8 오직, 주님만이 이스라엘을 모든 죄에서 속량하신다.
삼하 1:1, 17-27
1 사울이 죽은 뒤에, 다윗이 아말렉을 치고, 시글락으로 돌아와서, 이틀을 지냈다.
17 다윗이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하여, 조가를 지어서 부르고,
18 그것을 '활 노래'라 하여, 유다 사람들에게 가르치라고 명령하였다. '야살의 책'에 기록되어 있는 그 조가는 다음과 같다.
19 이스라엘아, 1)우리의 지도자들이 산 위에서 죽었다. 가장 용감한 우리의 군인들이 언덕에서 쓰러졌다.
20 이 소식이 가드에 전해지지 않게 하여라. 이 소식이 아스글론의 모든 거리에도 전해지지 않게 하여라. 블레셋 사람의 딸들이 듣고서 기뻐할라. 저 할례받지 못한 자들의 딸들이 환호성을 올릴라.
21 길보아의 산들아, 너희 위에는 이제부터 이슬이 내리지 아니하고, 비도 내리지 아니할 것이다. 밭에서는 제물에 쓸 곡식도 거둘 수 없을 것이다. 길보아의 산에서, 용사들의 방패가 치욕을 당하였고, 사울의 방패가 녹슨 채로 버려졌기 때문이다.
22 원수들을 치고 적들을 무찌를 때에, 요나단의 활이 빗나간 일이 없고, 사울의 칼이 허공을 친 적이 없다.
23 사울과 요나단은 살아 있을 때에도 그렇게 서로 사랑하며 다정하더니, 죽을 때에도 서로 떨어지지 않았구나! 독수리보다도 더 재빠르고, 사자보다도 더 힘이 세더니!
24 이스라엘의 딸들아, 너희에게 울긋불긋 화려한 옷을 입혀 주고, 너희의 옷에 금장식을 달아 주던, 사울을 애도하며 울어라!
25 아, 용사들이 전쟁에서 쓰러져 죽었구나! 요나단, 어쩌다가 산 위에서 죽어 있는가?
26 나의 형 요나단, 형 생각에 나의 마음이 아프오. 형이 나를 그렇게도 아껴 주더니, 나를 끔찍이 아껴 주던 형의 사랑은 여인의 사랑보다도 더 진한 것이었소.
27 어쩌다가 두 용사가 엎드러졌으며, 무기들이 버려져서, 쓸모 없이 되었는가?
고후 8:7-15
7 여러분은 모든 일에 뛰어납니다. 곧 믿음에서, 말솜씨에서, 지식에서, 열성에서, 3)우리와 여러분 사이의 사랑에서 그러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이 은혜로운 활동에서도 뛰어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8 나는 이 말을 명령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의 열성을 말함으로써, 여러분의 사랑도 진실하다는 것을 확인하려고 하는 것뿐입니다.
9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부요하나, 여러분을 위해서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가난하심으로 여러분을 부요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10 이 일에 내 의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지난해부터 먼저 실행하기 시작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원하여 한 그 일을, 끝마치는 것이 여러분에게 유익합니다.
11 그러므로 이제는 그 일을 완성하십시오. 여러분이, 자원하여 시작할 때에 보인 그 열성에 어울리게,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그 일을 마무리지어야 합니다.
12 기쁜 마음으로 자기의 형편에 맞게 바치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기쁘게 받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없는 것까지 바치는 것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13 나는, 다른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고, 그 대신에 여러분을 괴롭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평형을 이루려 합니다.
14 지금 여러분의 넉넉한 살림이 그들의 궁핍을 채워 주면, 그들의 살림이 넉넉해질 때에는, 그들이 여러분의 궁핍을 채워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평형을 이루는 것입니다.
15 이것은 성경에 기록하기를 4)"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았다" 한 것과 같습니다.
막 5:21-43
21 예수께서 배를 타고 맞은편으로 다시 건너가시니, 큰 무리가 예수께로 모여들었다. 예수께서는 바닷가에 계셨는데,
22 회당장 가운데서 야이로라고 하는 사람이 찾아와서 예수를 뵙고, 그 발 아래에 엎드려서
23 간곡히 청하였다. "저의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오셔서, 그 아이에게 손을 얹어 고쳐 주시고, 살려 주십시오."
24 그래서 예수께서 그와 함께 가셨다.
큰 무리가 뒤따라 오면서 예수를 밀었다.
25 그런데 열두 해 동안 혈루증으로 앓아 온 여자가 있었다.
26 여러 의사에게 보이면서, 고생도 많이 하고, 재산도 다 없앴으나, 아무 효력이 없었고, 상태는 더 악화되었다.
27 이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서, 뒤에서 무리 가운데로 끼어 들어와서는, 예수의 옷에 손을 대었다.
28 (그 여자는 "내가 그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나을 터인데!" 하고 생각 했던 것이다.)
29 그런 다음에 곧 출혈의 근원이 마르니, 그 여자는 몸이 나은 것을 느꼈다.
30 예수께서는 곧 자기에게서 능력이 나간 것을 몸으로 느끼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아서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31 제자들이 예수께 "무리가 선생님을 에워싸고 떠밀고 있는데, 누가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십니까?" 하고 반문하였다.
32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렇게 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셨다.
33 그 여자는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알므로, 두려워하여 떨면서, 예수께로 나아와 엎드려서 사실대로 다 말하였다.
34 그러자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안심하고 가거라. 그리고 이 병에서 벗어나서 건강하여라."
35 예수께서 말씀을 계속하고 계시는데,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따님이 죽었습니다. 이제 선생님을 더 괴롭혀서 무엇하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36 예수께서 이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서, 회당장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37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 밖에는, 아무도 따라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38 그들이 회당장의 집에 이르렀다. 예수께서 사람들이 울며 통곡하며 떠드는 것을 보시고,
39 들어가셔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떠들며 울고 있느냐? 그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셨다.
40 그들은 예수를 비웃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을 다 내보내신 뒤에, 아이의 부모와 일행을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다.
41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달리다굼!" 하고 말씀하셨다.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거라" 하는 말이다.)
42 그러자 소녀는 곧 일어나서 걸어 다녔다. 소녀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사람들은 크게 놀랐다.
43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그들에게 엄하게 명하시고,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