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척이는 밤, 돌아눕다가 우는 소릴 들었다
처음엔 그냥 귓밥 구르는 소리인 줄 알았다
고추씨 같은 귀울음소리,
누군가 내 몸 안에서 울고 있었다
부질없는 일이야, 잘래잘래
고개 저을 때마다 고추씨 같은 귀울음소리,
마르면서 젖어가는 울음소리가 명명하게 들려왔다
고추는 매운 물을 죄 빼내어도 맵듯
마른 눈물로 얼룩진 그녀도 나도 맵게 우는 밤이었다
『가뜬한 잠』 창비(2007)
만남은 대개 우연으로 시작할 테지만 대충 사랑하고 대강 갈라서는 이별이라면 이런 ‘고추씨 같은 귀울음소리’가 들릴 리 만무하다. 자신의 몸 안에 오래 세 들어 살았거나 불로 지진 것 같은 지독한 사랑을 남겼을 때만이 이별 뒤에도 자꾸만 몸을 돌아눕게 하고 밤을 뒤척이게 한다. 이윽고 그 여인이 달그락달그락 울음소리를 내고 있다.
그런데 실은 여자의 울음소리가 아니라 남자 자신의 매운 울음소리였으리라. 여자들은 남자와 헤어지고 머리를 자르거나 화려한 옷을 사 입거나 하는 외모변신 등의 국면전환을 꽤함으로써 이별을 이기려 한다지만 남자에겐 술 마시는 정도 말고는 딱히 극복기재랄 것이 없다. 그러니 ‘잘래잘래 고개 저을 때마다 고추씨 같은 귀울음소리’나 들을 수밖에.
사랑이란 감정은 가슴에서 오는 게 아니라 엄밀히 말하면 뇌하수체에서 온다. 만약 사춘기 이전에 뇌하수체에 종양이 생겨 수술을 받았다면 평생토록 결코 사랑에 빠질 일은 없을 것이다. 사랑이 시작될 때 넘치는 열정은 뇌 속 도파민을 샘솟게 해 뇌세포를 중독 시키고, 상대방의 행동과 습관에 맞춰 대뇌피질의 회로도 변경된다.
사랑하는 이와의 신체접촉은 뇌에서 세로토닌과 옥시토신의 농도를 높이면서 결국 사랑에 풍덩 빠지게 한다. 그래서 사랑에 빠진 뇌는 마약을 하는 사람과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고 하지 않은가. 하지만 이런 열정은 오래가지 않는다. 상대방 취향에 맞게 편성된 뇌세포가 사랑의 자극에 익숙해져 점차 무뎌갈 때쯤이면 감성에서 이성의 판단영역으로 그 무대가 옮겨져서 정상치에서 벗어난 호르몬 농도도 원래대로 돌아온다.
말하자면 이성적인 ‘통빡’으로 보면 뜨거운 채로 마냥 머물 수는 없는 것이다. 뜨거웠던 커피가 식어가듯 열정은 서서히 식어가서 급기야 이별을 맞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사람은 누군가에게 버림받으면 그 사람에게 더욱 집착한다는 사실이다. 실연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오히려 상대를 더욱 사랑할 수도 있다니 아이러니다. 이별 뒤의 다양한 통증과 후유증의 양상이 나타나는 것도 다 그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거절을 당해 더 이상 관계를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은 단지 기분 나쁨에 그치지 않고 가슴에 화상과도 같은 큰 상처를 남긴다. 시에서 ‘마른 눈물로 얼룩진 그녀’는 자신이 거절했거나 자신을 거절한 여자일 가능성이 높다. 아니면 이성적 영역으로 돌아와 거듭 생각해봐도 속물 아닌 정말 순정하고 계산 없는 착한 여자였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