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물러갈 즈음 비가 내렸다 그치길 반복했다. 비가 오는 날엔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고 맑은 날에는 산길을 걸었다. 하루는 집사람 진료가 있는 날이라 병원 로비와 수납창구를 오갔다. 신경이 예민해서인지 소화력이 좋지 않아 음식을 잘 먹지 못하고 쉽게 체하여 걱정이다. 체중이 자꾸 줄어 단층촬영과 내시경을 해보아도 이상은 없단다. 집사람 몸이 어서 회복되었으면 한다.
어제가 중복이었으니 바야흐로 삼복 한가운데였다. 날씨가 무덥다고 마냥 그늘이나 실내에만 있어도 될 일 아니었다. 며칠 전 옻이 올라 나도 병원에 간 적 있다. 의사는 야외에 나갈 때는 긴팔 옷을 입고 나가길 권했다. 현대인은 살갗이 부드러워 풀잎에 살짝만 스쳐도 피부트러블이 생긴다고 했다. 그 양반은 앞으로 운동하는 선수나 구경꾼이 모두 실내에 있을 거라 전망했다.
나는 감히 한 가지 되물어 보려다 참았다. 환자가 의사에게 대드는 모습으로 비칠까 봐서다. 그대가 즐길 골프는 너른 필드에 덮개를 어떻게 씌워야하겠느냐고. 지붕을 덮는다손 해도 천연잔디는 어떻게 가꿀 수 있느냐고. 나는 이런 말을 나누고 싶었다만 꾹 참고 처방전을 받아 문을 나섰다. 병원이나 약국 문턱을 드나들 때마다 제발 아프지 않고 지내야지 하는 마음 간절하다.
칠월 마지막 주 금요일이었다. 방학에 든 지도 보름이 훌쩍 지났다. 다음 주 부터는 봉사활동 지도와 도서관 업무로 학교에 나갈 날이 더러 있다. 어쩌면 나한테는 방학다운 느긋한 시간은 이번 주로 끝이다. 내가 버스를 한 번 더 갈아타고 내린 곳은 북면으로 화천리였다. 내감마을 논밭은 신도시 부지를 닦느라고 논밭은 뭉개졌다. 지난봄 친구와 취를 장만하느라 올랐던 산이었다.
나는 토목공사로 어수선한 내감마을을 지났다. 감나무과수원 끝까지 오르면 소목고개다. 소목고개 너머는 함안 칠원 레이크힐스 골프장이다. 고개에서 왼쪽으로 작대산을 오르는 산길이 있다만 오가는 등산객은 없었다. 고개 오른쪽이 조롱산이다. 새장처럼 생긴 야트막한 산이다. 나는 작대산보다 더 희미한 조롱산 산길로 들었다. 지난봄 북사면에서 절로 자란 생취를 제법 뜯었다.
숲 가까이 골프장 경계선이었다. 캐디를 대동한 골퍼가 라운딩을 하는지 멀리서 사람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물이 졸졸 흘러내리는 개울을 건너기 직전 장끼 한 마리가 퍼드덕 날아올랐다. 장끼나 노루는 인적 드문 숲에서 버틸 때까지 버틴다. 사람이 가까이 접근했을 때 비로소 날아오르거나 달아난다. 이때 놀라기는 짐승이 아니라 사람이다. 짐승은 미리 준비된 동작이었다.
장끼가 날아오른 뒤 숲은 다시 고요했다. 봄날 친구와 취를 뜯느라고 다녀간 이후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겨울에도 혼자 올랐던 산이었다. 사실 등산로가 제대로 확보되지 않은 여름산은 혼자 다니면 위험이 따른다. 그럼에도 나는 모험을 걸었다. 내가 산길에서 뱀보다 더 무서운 옻나무다. 뱀은 보지 못했는데 옻나무는 길목마다 있어 벌써 살갗에 스치고 말았다.
나는 속으로 제발 옻이 타지 않길 바랐다. 이번에 다시 옻이 타면 산에 오르는 것을 자제하고 근신하련다. 옻을 심하게 타는 사람은 잠자다 꿈속에 스님만 봐도 옻을 탄다고 한다. 길을 가던 스님이 옻칠한 지팡이를 손에 들었기에 옻이 탔다는 얘기다. 나는 그 정도는 아니지만 옻에 민감한 편이다. 살짝 스쳐도 사나흘 뒤 피부가 가렵다. 여름 산에 들면 옻 때문에 전전긍긍한다.
아카시나무와 오리나무 숲을 헤쳐 산꼭대기에 올랐다. 그리 높지 않은 산이었다. 산마루는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가져간 도시락을 비우고 일어서면서 참나무 등걸에 돋아난 영지를 두 개를 발견했다. 나는 조롱산은 낮아 참나무가 적어 영지가 없는 줄 알았다. 등산로가 제대로 없는 북사면 비탈을 내려섰다. 산기슭을 빠져나와 바위틈으로 흐르는 개울에 손을 담그고 땀을 씻었다. 10.0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