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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눅 24:25-35)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 사람들의 조롱과 멸시 속에,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셨지만, 무덤의 권세,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죽으셨던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들에게, 일시에 보이셨습니다.(고전 15:5-6)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먼저 만난 제자들이, 늦게 나타난 도마에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라고 말했을 때, 도마는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요 20:27)라고 말했습니다. 도마는 예수님이 살아 계셨을 때,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막 9:31)라는 말씀을,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들었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동고동락하며, “부활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듣기도 했지만,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의심했습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셨을 때, 믿지 않았던 사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잡아, 감옥에 가두려고, 다메섹으로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행 9:4)
하늘에서 빛이 비치고, 그 빛 가운데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사울은 너무나도 놀랬습니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하늘의 빛 가운데에서 들려오는 음성은 분명하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예수님이 살아 계셨을 때, 사울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후, 사울은 바울이 되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전하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모진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요,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 15:4,17)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것이 됩니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부활도 없을 것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가, 가장 불쌍한 자일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날마다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우리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롬 6:8)라는 바울의 말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의지함으로, 날마다 부활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되어진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에 대하여, 서로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그들이 서로 이야기할 때, 예수님이 가까이 오셔서, 그들과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함께 하는 분이 예수님인 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라고 물었을 때, 두 사람은 슬픈 표정으로, 최근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글로바와 다른 한 제자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 말을 믿지 못하고, 슬픈 마음으로, 예루살렘을 떠났습니다. 힘없이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베드로와 제자들이 갈릴리 호수가에 내려가, 다시 고기 잡는 일을 했던 것처럼,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것을 믿지 못하였기에, 글로바와 다른 제자는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내려가는 중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그들에게, 예수님은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라고 말씀하시고,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들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해가 저물자, 그들은 예수님을 강권하여, 함께 머물기를 청하였습니다.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예수님께서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바로 그때,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가 예수님인 줄을 알아보았으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서로에게,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라고 말했습니다.
글로바와 다른 한 제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눈이 가리워져 있었기에, 그들과 함께 걸어가고 있는 그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이신 줄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라는 말들을 전해 들었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내려가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들을 만나주셨습니다. 그들에게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구약에 기록되어 있는 메시야에 관한 이야기를 자세하게 풀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축복하셨습니다. 그들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들과 함께 했던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엠마오로 내려가던 발걸음을 돌려,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다시 올라갔습니다.
열한 제자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누군가,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라고 말했을 때, 글로바와 다른 한 제자도, 그들에게, 엠마오로 내려가던 길에서 된 일과 예수님께서 떡을 떼심으로, 그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했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여러분!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마음이 뜨거워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사 55:2-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또 들어야 합니다. 듣는 것, 읽는 것, 지키는 것을 무한 반복해야 합니다. 한 번 들었다고,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다고 해서는 안됩니다. 계속 들어야 합니다. 한 번 읽었다고, 성경을 덮어 버리면 안됩니다. 계속 읽어야 합니다. 한 번 지켰다고, 이제는 안 지켜도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지킬 것은 계속 지켜야 합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라는 베드로의 고백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영생의 말씀이기 때문에, 무한 반복하여, 듣고, 읽고, 지켜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엡 6:11)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전신 갑주에 대하여 설명했습니다.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 6:14-17)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전신 갑주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성령의 검인데, 그 성령의 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검은 관리를 잘 해야 합니다.
칼을 칼집에 가만히 놓아두면 안됩니다. 녹이 씁니다. 정말 필요할 때,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칼을 계속 관리해 주어야 합니다. 그냥 방치해 두면 안됩니다.
우리는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특별히,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읽을 때에, 우리 마음이 뜨거워져야 합니다. 냉랭해서는 안됩니다. 미지근해서는 안됩니다.
요한계시록 3장을 보면, 주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에게,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 3:15-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믿음이 미지근하여, 뜨겁지고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면, 토하여 버리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뜨거운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흥미가 있어야 합니다.
영어에, “Fashion”이라는 철자의 “패션”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패션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어느 특정한 감각이나 스타일, 주로 의복 등에서, 예술적 감각이 있는 일정한 양식이나 스타일”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말로, “패션”이라고 발음되어지는 또다른 단어가 있습니다. 앞의 패션하고는 철자가 다릅니다. 철자가 다른 만큼 뜻도 다릅니다. “Passion”입니다. 이 패션은 우리나라 말로, “열정 또는 흥미”라고 번역되어집니다.
2004년에, 멜 깁슨이 출연했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영화가 상영되었습니다.
그 영화를 분석한 존 파이퍼가 “더 패션 오브 지저스 크라이스트”라는 책을 저술하여, “예수님이 오셔서 죽으신 50가지 이유”를 설명했다고 하는 것을, 지난 주일에 말씀드렸는데, 그때 영화 제목에 사용되어진 “패션”이라는 단어는 두 번째 단어와 같은 철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의 “패션”은 “수난, 고난”이라고 번역되어집니다. 그러므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말은 “예수의 수난”이라는 말로 번역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옷을 입을 때에는 자기 나름대로 예술적 감각이나 스타일, “패션”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에는 열정, “패션”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흥미”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거나 읽는 것이, 수난이나 고난, “패션”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에 수난이나 고난을 당하는 것처럼 대하는 것이 아니라, 흥미를 가지고, 열정을 가지고, 임하여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우리 마음에 불이 붙습니다. 우리 마음에 은혜가 임합니다.
귀하고 복된 주일,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릴 때, 입술로만 “우리의 마음과 정성을 주님께 드립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의 예배 가운데에서, 우리의 마음과 정성을 드리고자 하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은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갈까? 오늘은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릴까? 오늘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말씀을 주실까? 나에게 어떤 은혜를 주실까?
미지근하고 냉랭한 마음이 아니라, 흥미와 열정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올 때,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받았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할 때, 눈이 가리워져서,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가리워져 있던 눈이 밝아져,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할 때, 마음이 미지근하여, 의심이 가득하여, 믿지 못하는 것이, 의심과 불신이 사라지고, 오직 믿음으로,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흥미와 열정을 가질 때,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어리석은 자들이 아니라, 우리의 눈이 밝아져,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는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시 119:130)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말씀인 성경 말씀을 들을 때, 빛이 비치어, 우리의 우둔함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미련하고 어리석음이 사라지고, 지혜와 명철을 얻게 될 것입니다.
시편 119편을 보면,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11절)
“주의 율례들을 즐거워하며 주의 말씀을 잊지 아니하리이다”(16절)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16절)
“진리의 말씀이 내 입에서 조금도 떠나지 말게 하소서 내가 주의 규례를 바랐음이니이다”(43절)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103절)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105절)
시편 기자는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148절)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우리의 가장 귀한 시간을 주님께, 아낌없이 내어드려야 합니다.
시편 19편을 보면, 다윗은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7-10절)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다시 살리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둔하고 미련한 자를 지혜롭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눈을 밝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시편 기자가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 42:1)라고 고백한 것처럼, 그런 갈급함으로, 그런 열정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찾고 또 찾아야 합니다. 듣고, 또 들어야 합니다. 보고 또 보아야 합니다.
보아도 또 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흥미와 관심과 열정을 쏟아야 합니다.
여기저기, 벚꽃들이 만발하였습니다. 무심천에도 아름다운 벚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청주에서 조치원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조천이라는 하천이 있습니다. 그 위 다리를 건너면, 이쪽은 청주요, 저쪽은 세종의 조치원이 됩니다. 그 조천 변에 아름드리 벚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무심천보다도 더 길게, 더 아름답게 피어 있었습니다.
벚꽃을 구경하기 위하여, 서울 여의도 윤중로, 진해 군항제, 신탄진의 연초장, 무심천, 조치원의 고복 저수지, 오창호수공원, 오송호수공원, 충추댐이나 대청댐 둘레길을 찾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관심과 흥미와 열정이 있으면, 아무리 멀고 멀다고 해도, 아름다운 벚꽃 구경을 하기 위하여, 시간을 내고, 마음을 드려, 찾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여야 합니다.
솔로몬은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 대저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심이며”(잠 2:4-6)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을 새번역으로 읽어보면, 좀더 쉽게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은을 구하듯 그것을 구하고, 보화를 찾듯 그것을 찾아라. 그렇게 하면, 너는 주님을 경외하는 길을 깨달을 것이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터득할 것이다. 주님께서 지혜를 주시고, 주님께서 친히 지식과 명철을 주시기 때문이다.”
흥미와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할 때, 은을 구하듯 구하고, 보화를 찾듯 찾으면, 하나님께서 친히 지식과 지혜와 명철을 주셔서, 하나님의 경외하는 길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을 더 많이, 더 깊게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은혜를 받은 일에 대하여, 흥미과 관심과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뜨거운 마음으로 대할 때, 뜨거운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을 떠나, 방탕한 삶을 살고 있었던 어거스틴은 어느 날, 자신의 죄를 통회하며, 울고 있을 때, 이웃집 아이들의 “들고 읽어라. 들고 읽어라”라는 노래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노래 소리였지만, 어거스틴은 “들고 읽어라”는 그 노래 소리를 듣고,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성경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 펼쳐진 로마서 13:12-14절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하나님을 떠나 방탕한 삶을 살고 있었던 어거스틴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은 그 말씀을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라”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이 말씀을 읽게 된 어거스틴은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했던 베드로처럼, 그 길로 지금까지의 방탕한 삶을 청산하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인생에 어쩌다 한 번, 그냥 스쳐 지나가는, 무의미한 말씀이 아니라, 내 마음의 과녁에 정확하게 꽂히는 은혜의 화살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 안에서 울려 퍼질 때, 가리워져 있는 믿음의 눈이 활짝 열리게 됩니다.
미련하고 어리석게 살아왔던 삶들을 청산하고, 뜨거운 마음으로, 흥미와 열정으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예수님으로, 날마다 부활의 삶을, 승리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여러분! 뜨거운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림으로, 찬송함으로,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날마다,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부활이요 생명이 되신 주님!
우리 안에 자리잡고 있는 미지근함과 냉랭함이 사라지고, 주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이 샘솟듯 일어나게 하여 주옵소서. 뜨거운 마음으로 은혜 받게 하시고, 받은 그 은혜, 그 사랑을 전하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