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어가는 것 / 김애련
우리는 노인에 입문하기 위해서 많은 것을 투자한다. 병원에 가져다주는 돈도 만만찮다. 그리고 이곳저곳이 낡아버려 고쳐가면서 써야 한다. 더불어 건망증도 하나둘 늘어간다. 방금전에 들은 내용도 다시 묻는다. '늙으면 입은 다물고 지갑은 열어라'고 하지만 우리는 반대되는 생활을 한다.
나이는 시간과 함께 달려가고 뜻은 세월과 더불어 사라져 버린다. 우리는 늙어가는 것을 아예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의상도 젊은 사람이나 늙은 사람이나 똑같이 쫄쫄이 바지를 입는다. 뒤에서 보면 할머니인지 아줌만지 아가씬지 구별하기 힘들 때도 있다.
샘물은 퍼낼수록 맑아지는 법이다. 우리 역시 나이를 먹고 익어갈수록 조금은 품위를 가졌으면 한다. 생활은 우리의 소중한 경험이다. 지나간 날들이 후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 세월이든 시간이든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차곡차곡 쌓여 가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무게에 나는 놀란다.
나이가 들면 아는 게 많아질 줄 알았는데 나이가 들면서 알고 싶은 게 많아진다. 뿌린다고 다 열매가 되지는 않는다. 열심히 산다고 잘사는 것도 아니다. 누군가의 말처럼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쌓이는 먼지를 닦아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물’은 연못이 될 때 소리가 없다. 한 개의 결실을 이루기까지 비바람에 시달리는 날들도 많았지만, 그 비와 바람과 햇빛을 받으며 익어온 날들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하루 24시간, 1년 365일이 똑같이 주어진다. 그러나 같은 1분이라도 쓰는 사람에 따라서 그 가치는 엄청나게 달라진다. 1분은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시간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목숨을 빼앗는 시간이 될 수도 있다. 앞으로 많은 시간이 남은 듯 보여도 지금 이 순간 나를 스쳐 가는 시간은 한 번밖에 없다. 그것은 기회이자 찰나다. 찰나와 순간처럼 보이는 시간이 쌓이고 쌓여 결국에는 우리 인생을 만든다.
우리 역시 그렇다. 온갖 세파에 시달리면서도 여기까지 오지 않았는가. 이렇게 잘 익어가는 일도 아무나 하는 것은 아니다. 도중에 하차하는 사람도 많다. 인생에서 가장 착각하는 부분이 바로 시간이다. 무심한 세월은 나를 중년으로 만들고 이제는 할머니로 만들어 버렸다.
물살을 거슬러 헤엄치려면 힘과 용기가 필요하다. 그 과정은 엄청난 고난의 연속이다. 그러나 그것이 두려워 물살에 몸을 내맡기고 마냥 떠내려가는 것은 얼마나 나약한 행동인지 모른다. 세월이 갈수록 열정은 식어가지만, 새로운 열정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고 고난을 이기도록 해준다. 열정이 없으면 아무 데도 쓸모없는 노인이다.
나이 든다고 모든 것을 잃어 간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때론 가랑비로 소나기로 작달비로 시간을 흠뻑 적시며 지나간 숱한 경험은 젊음이 가지지 못하는 지혜가 되지 않은가. 우리 후손들에게 슬기롭게 살아가는 지혜와 멋지게 익어가는 모습을 보여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