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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으로, 금강으로 흘러가는 것을 그는 아찔한 현기증과 더
불어 실감하곤 하였다. 그런데 이제 이곳으로 와서 살게 되었다. 물론, 잠시 동
안의 불안한 거처에 불과한 곳이겠지만. 오유끼. 그녀는, 모찌즈끼의 젊은 여자
였다.
"망월이라. 아하, 애달픈 이름이로다."
일본인 관사가 많은 일본인 거리, 눈 내리는 고사정의 요리집 문등에 번지는 부
우연 불빛을 바라보며, 함께 갔던 주사가 고개를 꺾고 한탄조로 하던 말이 떠오
른다. 그것은 무슨 암시라도 되었던가. 강모는 그날의 술상 머리에서 오유끼를
만났던 것이다. 내가 너를 만난 것은 흉이냐, 길이냐. 인간이 태어날 때, 하늘에
서 살성이 비치면 열두 가지 살 중에 어느 화살인가를 맞게 된다지. 그래서 조
실부모하거나, 불구의 몸이 되거나, 가산을 잃고 식구가 흩어지며 고질 신병을
앓게 된다. 그러나 복록이 무궁한 사람에게는 길성이 비친다. 한평생의 부귀공명
을 예언해 주는 그 별은 누구의 머리 위에 뜨는 것이다. 겁살,재살,천살,지살,언
살,월살,망신살,장성살,반안살,역마살,육해살,화개살. 인간의 한 생애에 재앙과액운
은 많기도 한다. 인생이 하늘로부터 명을 받아,피할 길 없는 열두 가지 제살을
제 몸에 받고 겪으면서 언덕을 넘고, 골짜기를 지나고, 때로는 소용돌이에 휘말
리며, 때로는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모양이란 어쩌면 가련하고 어쩌면 어리석기
만 하다.
"사람이 아무 살도 안 띠고 평생을 순탄하게 살기는 아무래도 어려운 법이란다,
누구라도 한두 가지 살은 맞게 되어 있지마는, 그러더라도 어쩌든지 제가 미리
알고, 조심허거, 뛰어갈 거 걸어가고,소리칠 거 어루만지고,그렇게 삼가면, 설령
코 앞에 삼재 팔난이 닥칠지라도 가벼이 자나간단다."
삼재는 세상을 괴멸하는 불과 물과 바람의 큰 재난으로,화재,수재,풍재를 말한다.
그뿐 아니라, 전쟁 난리 같은 도병재와 전염병이 창궐하는 질역재, 흉년을 당하
여 굶주리는 기근재도 이에 속하여, 참으로 불길하기 짝이 없는 운성이 머리 위
에 비치는 것이다. 이 같은 운수가 한번 침노해 들어오면, 그 살마의 만 삼 년
간을 흉화로 어지럽히니 뒤에라야 빠져 나가는데,전해 오는 말로
"드는 삼재보다 나는 삼재가 더 무섭다."
고들 하는 것을 보면, 삼재 나가는 꼬리가 조용하지 않은 탓이리라. 마치 말발굽
으로 거칠게 뒷발질을 하는 것처럼 후려치고 나간다는 것이었다. 거기다가 팔난
이라면, 여덟 가지의 재난을 이름이니 곧 배고픔과 모진 추위,심한 더위,성난 불
길,큰 물, 병란,목마름,그리고 칼로 인한 재앙을 말한다. 인간의 지혜가 얼마나 영
철하여 그 같은 재난과 액운을 미리 헤아릴 것이며, 인간의 안목이 얼마나 형형
하여 앉아서 천리를 내다볼것인가. 더욱이 앞뒤를 헤아리지 못하는 중생들이야
일러 무엇 하리. 캄캄한 밤중에 뒷머리를 덮치는 이런 흉참한 일을 속수무책으
로 당할 수밖에 없지 않으랴.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미리 조심하고 미
리 피해 가면,가래로 막을 것을 호미로 막아 볼 수도 있는 일이기에,율촌댁은 강
모에게 그의 금년 신수를 일러 주며 몇 번이고 같은 당부를 하고 또 했던 것이
다. 그리고, 부적도 한 장 호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이런 것은 비 올 때 우산 쓰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몸에 지녀 급한면을 하자는
게다. 보호가 되지, 천만 다행히도 너한테 삼재는 들지 않았지만 정이월에는 팔
패가 들고, 동지섣달에는 망신살이 끼었느니라. 허나,망신이라 하면 여러 가지
살 중에서도 부끄러움이 겹친 것이 아니냐... 어쩌든지 조심해야 헌다. 네 몸을
네 스스로 지키기만 한다면 그런 일은 안 일어날 것이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재
앙이 아니라 네 몸에서 나는 재앙이니,네가 정신만 채리면 무사히 지내갈 고비
인즉, 강모야, 어미 말 명심해라. 꼭 명심해야 헌다. 그러고, 남자가 패가하고 망
신하는 것은 여지 때문인 수가 많으니."
어미 말을 명심해라. 어미 말을 명심해라. 강모의 귓속에 율촌댁의 음성이 쟁쟁
하게 울린다. 내,어느 날은 곰곰이 생각을 좀 해 보았는데, 암만해도 너희 내외
남수여화로 만난 것이 아닌가 싶었더니라. 너는 스물하라, 임술생이니 납음이 대
해요,네 아내는 스물넷 기미생 천상화라. 물과 불이 만났어. 내 생각에 같은 물
과 불이라도 산두화에 간하수라면, 산 머리에 불은 봉화불일 것이고 골짜기 물
은 벽계수이리니,상극은 상극이라도 한 산에 들면 어찌 어찌 조화가 될란지 어
쩔란지.하지만, 너희들은 바닷물에 하늘 위 불 아니냐. 바다와 하늘은 둘 다 너
무 커서 집안에 큰 마당이나 우물을 이루기엔 적당치 않다. 거기다가 하늘 위의
불이라면 구름 속의 번개라. 번개는 날카롭고 살기가 있다. 또 번갯불 치면 천둥
이 울게 마련. 천지가 깜짝 놀라 정신이 흩어지고, 사람들은 번개를 무서워하지,
그래서 너도 네 아내가 두려운가. 예로부터 남녀가 서로 만나 부부의 인연을 지
을 적에는 하늘이 살피고 땅이 도와서 연분이 되는 것이지마는, 삼생의 원수가
이 생에 만나 졌던가, 서로 상극 상충하는 부부도 많고 많지 않으냐. 그래서 그
런 못된 운수를 피하려고 궁합을 미리 보는 것인즉, 납음을 살펴 자기한테 알맞
은 사람을 만나야만 한단다. 납음이란 무엇인고. 자기의 생년 육갑에서 나오는
오행을 가지고 남녀가 상생되는 것을 맞추어 보는 것이다. 오행별로 볼 때 상생
이 있는가 하면 상극도 있느니, 서로 기운을 도와 일어나게 하는 상생이라 함은
금생수,수생목,목생화,화생토,토생금을 말하지. 금은 물을 생하고, 물은 나무를 자
라게 하며,나무는 불을 일으킨다. 그리고 불은 타고 남은 재로 거름을 만들어 흙
을 비옥하게 하며, 흙은 쇠를 품어 준다. 이 얼마나 좋은 사이이랴. 허나, 원수
같은 상극은, 금극목으로 쇠는 나무를 극하고, 도끼로 나무 찍고 톱으로 나무 자
르는 것 생각해 봐라. 짐작이 가지. 또 목극토로 나무는 흙을 무너뜨리며, 토극
수는 너도 생각해 본면 알리라만 서로 상극이 아니겠느냐. 물은 흙을 깎아 내리
고 흙은 물을 메워 물의 길을 막는 것. 서로 만나 좋은 일이 없고말고. 또 흙은
수극화도 마찬가지 이치라. 물로는 불을 끄고, 불로는 물을 말린다. 그리고, 화극
금이 서로 상극이다. 이 세상에서 쇠를 녹일 수 있는 것은 오직 불뿐인데 불과
쇠가 서로이 만나면 어찌 되겠느냐. 말로 하지 않더라도 손바닥을 보듯이 훤한
일이다. 여기에 네가 물이고 네 안이 불인즉. '남수여화'인데, 이는 화락봉서라.
꽃이 떨어지고 여름을 만난 격이다. 수화가 상극이매, 부부가 서로 불순하고 자
손이 불효하며 일가 친척이 화목티 못하여 자연 백년을 서로 근심해야 한다더
라. 재산이 태산과 같다 하더라도 어느새 새어나가 재물을 탕진하고, 부부 서로
이별수가 있으며,혹 자손을 두어도 기르기 어려운 운수라. 부부가 항상 귀산같이
여기며 싸우니, 서로 죽이여 명이 짧아지리라, 했다. 이보다 더 참담한 꼴이 어
디 있을꼬. 아아, 끔직하여라. 토성 여인 또한 좋지 않아서, 남수여토면 만물봉상
이라. 만물이 서리를 만난 격이지. 물과 흙은 상극으로, 항상 재난과 액운이 끊
이지 않아 곤핍하고, 부부가 같은 집에 살아도 상서롭지 못해서 가내 화목을 바
라기 어려운데다가, 자손은 불효하고, 살림은 흩어져 티끌이 되니 우마와 재산의
흔적을 찾기 어렵도다. 관재와 재난이 앞길을 가로막아, 만사에 구설이 분분하니
조용할 날이 없구나. 부부 이별하여 독수공방을 면치 못하든지 남평의 상고를
당할 격일진저. 그렇지만 금성의 여인을 만난다면 크게 길하니. 남수여금은 삼객
봉제라. 나그네가 반가운 동생을 만나는 격이다. 금생수 하매 부부 서로 화합하
며, 부귀할 것이고, 옥과 구슬로 지은 집에서 백년을 해로하는 쾌란다. 자손은
창성하고 생애는 점점 흡족해, 일가 친척의 웃음 소리 넘치는데, 전답과 금은보
화를 어디에 다 두오리오. 목성의 여인도 좋지. 남수엽목은 교변위용, 상어가 변
하여 용이 된 격이야. 수생목하니, 이런 남녀의 결합은 자손이 번창하는 것이 나
뭇가지 우거짐 같고, 서로 자라서 무성함에 그늘이 도타워 남에게는 덕이 되며,
스스로 부귀 장수 복락이 그치지 않으리라 했다. 재산은 불어나 흥왕하며 노비
와 전답이 그즉하여 영화가 무궁하고, 공명을 떨쳐 거룩한 이름은 세상을 비추
니, 평생에 기쁜 일뿐이라. 부부의 금슬인즉 어찌 아니 좋으리오. 끝으로, 수성의
여인도 대길하다. 남수여수는 병마봉침. 병든 말이 침을 만난 격이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있겠는가. 이제는 완치 쾌차하게 되리라. 물과 물이 모이면 여울이 냇
물 되고, 냇물이 강물 되며, 강물은 바다를 이루듯이 기쁜 일이 날로 쌓이어, 지
위는 더욱 높아지고 덕망은 점점 깊어져 만인의 존경르 받을 뿐만 아니라, 세사
의 재물이 모두 이 골로 모여 끝이 없도다. 부부 서로 자나깨나 잊혀지지 않는
것이 처음의 만남과 같느니, 효성이 지극한 자손이 집안에 만당하고 생기 가득
한 일생은 안락을 다 할리라. 너희 아버님은 마흔여덟, 을미생이라. 사중금이시
고, 나는 마흔셋, 경자생으로 벽상토여서, 금생토, 토생금, 서로 상생이란다. 남금
여토로 만나면 산득토목, 산이 흙과 나무를 만난격이니 얼마나 부요하냐. 평생토
록 좋은 집에서 부부가 해로 화락하고 자손이 번성한다 했다. 비단옷에 옥식이
가득하매 부러울 것이 없느니. 명예가 사해에 진동함을 만인이 칭송하리란다. 또
할머님은 올해 일흔둘, 경오생이시니 노방토로서, 비록 궁합을 맞추는 것은 아니
나, 모자지간에도 토생금, 금생토, 앞서 말한대로 상생하여 좋으신가 싶더라. 양
모 양자 사이가 저리 지극하기는 어려우니라. 자애와 효심이 고금에 없는 정경
을 보자면, 과연 두 분이 합이 들기는 단단히 드신 모양 분명하다. 모자지간만
그러한 것 아니라 나하고 고부간에도 좋으시다. 만일 이괘로 남녀가 만난다면
남토여토 아니냐? 이는 개화만지라. 가지마다 꽃이 핀 격인즉 양토가 상합하니,
자손이 창성하고 효도를 잘하면 무병장수할 것이란다. 부귀한 풍류객이 되어 고
루거각에 앉아 영화를 누리는데, 해마다 경사롭고 일마다 이로우니, 녹봉이 갈수
록 두터워지리라... 듣는 귀도 오죽이나 보드라우냐. 이렇게 좋은 인연도 없는 것
이 아니건만, 너희는 어쩌다 그렇게 만났을꼬. 그런 것 다 쓸데 없다고, 선비의
집안에 인륜지대사를 잡술에 의존할 것이냐고, 아버님 엄중히 꾸중하시고, 문벌
보아 성씨 보아 정하니 이렇지. 내 너희 내외의 정경이 하도 보기에 딱해서, 지
난번에 사주 잘 보는 조생원이 사랑에 아버님 뵈오러 왔길래, 남모르게 부탁해
서 적어 놓은 괘가 여기 이렇구나. 아무 말도 안하고 내 혼자 속으로만 알고 있
으려다가, 기왕에 이러한 운수라면, 이제부터라도 명심 각골해서 어쩌든지 무사
히 극복하는 쪽이 더 낫겠다 싶어 너한테 하는 말이다. 하기는, 사주 속같이 기
묘한 것이 없어서, 궁합에는, 상극 중에 오히려 상생하는 명이 있나니. 사증금같
이 모래 속에 묻힌 쇠나 차천금같이 비녀와 팔찌를 만드는 쇠는 너무나 강한 금
이어서 불은 만나야 성취할 수 있듯이. 벽력화.천상화는 물을 만나야 복록과 영
화가 성취할 수 있다더라. 이 둘 다 번갯불이니, 물 먹은 구름이 모여야 번개를
치고, 번개 쳐야 큰 비가 오는 이치를 보면 속뜻을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래서,
그렇게만 본다면 너희 둘, 괜찮은 것 같지만, 천하수와 대해수는 불보다 흙을 만
나야 더 좋다는구나. 망망대해 외로운데 흙이라면 섬이나 육지를 말하지 않으랴,
반가운 맘 그지없고 음양이 상합하련만. 네 안은 너 만나서 큰 덕을 보겠으나,
너는 네 안 만나 어찌 풀어 나갈는지. 아깝고, 애돌와라. 아들아, 내 아들아, 금
쪽같은 내 새끼야. 너는 임술생 개띠라, 생년에 천예가 들었단다. 참 이상도 하
지. 네가 난데없이 악기를 들고 와 동경으로 음악공부를 하러 가련다 했을 때,
온집안이 발칵 뒤집여 소동이 나고, 이 어미도 무한히 놀랐다마는, 너한테 '연천
예'가 들어 그러했던가. 속말로 팔짜 도망은 못한 더다니, 맞는 말인가. 아나, 한
번 읽어 보렴. (연입천예: 연에 천예서이 드니) (지모과인: 지혜와 꾀가 뛰어나도
다) (목교수기: 눈이 정교하고 손재주가 있으니) (일일홍재: 날로 재물이 늘어가
리라) (의식유족: 옷과 밥이 풍족하니) (안과세월: 편안히 세월을 보내리라) (백
년금궁: 백년의 금술궁이) (부조지탄: 고르지 못하니 한탄스럽다) (약불연야: 그
렇지 아니하면) (조자난양: 일찍 둔 아들을 기르기 어려우리라) (순유춘풍: 순하
면 춘풍이요) (역리추상: 거스르면 가을의 서리로다) 내가 너희 이씨 문중에 시
집와서 이날까지, 너의 누이 손위로 둘 있는 것, 하나는 상하고 하나는 잃었다
만, 금지옥엽 너를 얻고 모든 시름 다 풀리어, 저 앞엣말 하나도 과한 데 없이
살아왔단다. 헌데 이 무슨 괴이한 일인가. 네가 혼인하고 취처하여 새사람 들어
오고는 자고 새면 근심이 석 삼이니. 집안이 화락하지 못하면 자연히 몸과 마음
은 건공중에 정처없이, 바깥으로만 나돌게 되는 것을 어미가 왜 모르겠느냐. 바
깥이란 으레히 바람이 많으 법. 그 바람은 여자로 해서 일으키는 경우가 태반
아니냐. 음풍에 한 번 휘말리면 망신하기는 잠깐이라. 강모야, 내 아들아. 부디
마음을 다스리고 몸을 조심하거라. 아무리 조신한 여염의 아낙일지라도 그 운수
에 망신살이 뻗치면 도리 없나니, 바람에 옷자락만 펄럭여도 샛서방을 보았다고
소문이 나는 법이란다. 아가, 너의 올 신수가 사나워 그 몹쓸 망신살이 들었느리
라. 조생원이 적어 준 것이다. 펴 보아라. (망신입명: 망신살이 명에 들어오니)
(색정신지: 남녀간의 정욕을 삼가라) (관재구설: 관가의 재앙과 구설이) (간간유
지: 간간이 있을 것이로다) (수다노력:비록 노력은 많아도) (불신불성: 힘을 못
펴고 이루지 못한다) (장생동대: 만일 장생을 한 가지로 띠었으면) (귀인지격:귀
인의 격이로다) 어머니, 어머님. 그만하십시오. 이미 그 모든 경계의 말씀이 부질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나의 몸은 흙덩어리에 불과한데, 굽이치는 운수는 급류의
물살입니다. 흙이 어찌 물을 이기겠습니까? 이미 저의 허리를 깍아 먹고 있는
것을, 이제 한순간이면 중허리가 무너지며 내 몸뚱이느 내려앉고 말 것입니다.
그런 것도 모르시고... 이미 일은 일어날 대로 일어나 버리고 말았는데 ... 어머니
께서는 아무것도 모르시고...그다지도 구구한 여러 말씀으로 다짐을 하고 또 하
시오니, 꼭두각시처럼 처량하십니다. 어머니. 수명을 타고났으면 귀인의 격이라
한다지만, 오래 살면 무엇 하며, 설혹 귀인이라 한들 또 무엇 하리. 구구 절절이
자신의 모습과 짓거리를 있는 대로, 마치 명경으로 들여다본 듯이 적어 내놓은
조생원의 달필이 눈앞에 선연히 떠오른다. 그렇다면 강모가 오유끼를 만난 것은
흉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네는, 아무리 흉액일지라도 피할 도리가 없었던
운명의 가로막대였는지도 또한 모를 일이었다. 머리부터 길목을 가로막고 기다
리던 그네는, 고사정의 요리집 '모찌즈끼'에서 손님으로 온 그를 천연스럽게 맞
이하였을 터이니, 율촌댁이 강모를 앉혀 놓고 골백번씩 다짐한 말들도 한갓 부
질없는 바람 소리에 불과한 것이었으며, 남의 사주를 손바다처럼 들여다보는 조
생원의 경계도 쓸모 없는 휴지 한 조각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되고 만 셈이었다.
그날은, 강모가 근무하고 있는 부청 학교과에서 결산회식을 가진 날이었다. 강모
는 고보를 졸업하고느 바로 부청에 취직이 되었던 것이다. 물론, 숙부 기표의 주
선으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기표는 자신의 아들 강태도 전주 부청에 심어 놓았
으며, 바로 뒤이어 강모 또한 과는 다르지만 같은 청사에서 일하게 서두렀다. 그
때 연일 연야 계속된 정리 작업으로 지쳐 있던 직원들은, 결산이 끝난 날인 만
큼 처음부터 들떠서 야단스럽게 모찌즈끼의 대문을 밀고 들어갔다. 그리고 그들
은 앉자마자
"여자."
라고 소리쳤다. 오래 기다릴 것이 없이 이윽고 술상이 들어오고, 화려하게 머리
를 빗은 여자 몇 사람이 따라 들어와, 무릎을 꿇고 인사를 하였다. 모쯔즈끼는
이급 요리점으로, 뚱뚱하고 작달막한 일본인이 경영하고 있는 집이었다 .그곳은
유다르게 술맛이 좋다거나, 요리 솜씨가 뛰어난 집은 아니었지만, 모찌즈끼의 여
자만큼은 소문이 난 터 였다.
"모쯔즈끼로 가자."
하고 말할 때는
"새 여자가 들어왔을지도 모른다."
는 공공연한 속뜻이 숨겨져 있을 정도였다. 그곳의 주인은 검붉은 일본 남자였
다. 도무지 일본에서 무엇을 하다가 조선까지 건너오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지
만, 아마도 걸식을 하던 부랑배 아니면 사람 장사를 한 것이 틀림없다고 수군거
리기도 했다.
"그놈 눈구녁을 좀 보아. 실배암같이 간교하단 말씀이야."
"듣고 보니 그렇구만. 그 누루꾸룸안 희자위에서 혓바닥이 날름거리는 걸 나두
봤지."
"아무러면 어떤가. 우리한테야 나쁠 게 없잖어? 한 바퀴 그놈이 조선 팔도를 휘
이 돌고 오면, 방방 곡곡에 파묻혀 있던 이쁜 일색들만 걷어오지 않던가배?"
"허기는 .굴비 두름이 따로 없더라."
언젠가 그는, 보리쌀 한 말에 젊은 처녀를 사 가지고 온 일도 있다고 했다. 길고
긴 봄날의 햇볕이라도 손아귀에 움켜쥐고 베어 먹어야 할 만큼 허기진 보릿고개
때의 일이었다. 그는 해마다 봄철이 되면, 마치 사냥의 때를 기다리던 포수처럼,
허리에 전대를 띄고 며칠씩 길을 떠났다. 그가 도는 곳은 일정하지 않았다. 서해
안과 남해안, 그리고 가원도의 산골짜기, 지리산 기슭이며, 전마선을 타고 가는
손바닥만한 섬조각에도 그는 갔다. 그러나, 그가 특히 좋아하는 곳은 남도 일대
였다. 삼남에 연이은 흉년과 기근이란 무슨 숙명이나 업보와도 같이 끈질겼다.
나찰이 그보다 더 악착 같을 것인가. 몸이 검고 눈이 푸르고 머리털이 붉을며,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그 악한 귀신도 일찍이 본 바 없으니 굶주림보다는 덜 무
서웠던 것이다. 여기저기서 부황난 사람이 죽어갔고, 살가죽이 누렇게 붓고 들뜬
한 무더기 가솔이, 바가지를 옆구리에 하나씩 차고 다리를 절룩이며 어디론가
동냥을 떠나갔다. 발을 둘둘 감은 다 떨어진 헝겊 쪼가리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누런 황토 먼지를 풀석거리게 하였다.
"가만 둬도 죽든지 거러지가 되든지 둘 중에 하납지요. 기왕에 그리될 바에야 저
를 따라오는 것이 백번 낫습지요."
모찌즈끼의 주인은 두툼한 붉은 입술을 번들거리며 웃었다.
"굴뚝의 연기 냄새만 맡아도 저는 그 속에 앉아 있는 사람 냄새를 분별할 수 있
습지요. 틀려 번 일이 없어요."
"바람만 스쳐 가도 사람 냄새가 나고말고요."
"덜 익은 처녀의 풋비린내는 말씀입지요, 봉창을 철벽같이 해 놔도 그게 묘한 거
예요. 저절로 공중에 퍼지는 걸입쇼."
모찌즈끼의 주인은 야마시다 주임이 내미는 술잔을 두 손으로 받으며 그런 말을
했었다. 지난번에 왔을 때의 일이었다. 그때 강모의 눈에는, 걸붉은 그 남자의
열 손가락이 낙지발처럼 보였다. 지어 부칠 땅도 없거니와, 땅이 있다 해도 공출
로 보리쌀 한 톨 남겨 놓을 수도 없는 처지에서, 그대로 죽어가거나 동냥아치가
되는 것보다는, 그래도, 유녀로나마 목숨을 부지하는 쪽이 더 낫기는 나은 것일
까.
"오늘은 누구냐? 얼굴 좀 보자."
야마시따는 호기롭게 소리치며 좌중의 젊은 여자들을 돌아보았다.오유끼는 야마
시따와 강모의 사이에 앉았다. 그네는 얼굴을 공손하게 숙이며 무릎을 꿇고 두
손을 앞으로 모아 절을 했다. 수그린 고개의 뒷목이 깊이 파아고, 앞쪽의 깃은
가슴의 흰 살이 거의 드러나보일 만큼 아래까지 내려와 있었다. 오유끼는 황금
빛 공단 바탕에, 화려한 꽃무늬가 수놓인 보라색 오비를 매었다. 그 오비의 ㅂ깔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연지의 탓이었는지, 그녀의 입술에도 보랏빛이 돌았다. 그
래서 추워 보이기도 했다. 얼굴로 보아서는 아직 어린 여자가 분명한데, 표정은
측은할 정도로 어른스러웠다. 강모가 오유끼의 모습을 일별하며 미처 시선을 거
두지 않은 그 순간에, 투박한 손 하나가 불쑥 침벌하듯 시야로 튀어 들어왔다.
야마시다의 손이었다. 손은 오유끼의 기모노 앞에서 흡반처럼 붙더니 깃을 헤치
며 안쪽으로 미끌어져 들어갔다. 강보는 얼굴이 붉어졌다. 무슨 못 볼 것을 보았
다든가 하기에는 이미 농탕해져 버린 자리였다. 다만 그가 상기된 것은, 방해를
받았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그런 것도 모르고 야마시따는 아예 오유끼를 감싸
안더니 흰 목에 붉은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추었다. 오유끼는 야마시따보다는 더
어른인 양 그가 하는 짓을 내버려 둔다. 별반 거역하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받아
들이는 것 같지도 않은 몸짓으로 조그맣게 앉아 있는 그녀에게 강모가 이름을
묻는다.
"오유끼입니다."
야마시따에게 잡힌 몸을 풀며 그네가 대답한다. 힐끗 강모를 돌아본 야마시따는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무어라고 큰 소리로 농을 지껄이며 오유끼를 강모 쪽으로
떠밀어 넘겼다. 강모는 엉겁결에 그네를 받아 안았다. 그네는 따뜻하게 감겨 왔
다. 그네에게서는 복숭아 냄새가 났다. 후끈 더운 기운이 끼치면서 입술에 까스
라기가 일어난다. 혀끝이 안으로 말려들어 말이 목젖 너머로 넘어가 버린다. 강
모는 당황하여 오유끼를 밀어내려고 했다. 그런데도 오유끼는 반대였다. 오히려
할을 감아 강모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네의 살이 닿는 곳이 뼛속까지 저르르 우
리면서 녹아내리는 듯한 노곤함에 어지러웠다. 오유끼는 한 마리의 계집이었다.
강실이나 효원이 같은, 막막하고 사무치는 존재가 아니라, 뭉클 손 안에 잡히는
실물인 것이다. 조금 전에 야마시따가 마음대로 만지며 노닥거렸으나, 어디에도
흔적이 남지 않은 오유끼, 바로 그 전에는 또 누군가가, 또 이 다음에 어느 이름
모를 사람이 어루만지고 희롱하고 떠나간다. 아무나찾아올 수 있고, 아무에게도
죄를 묻지 않는 여자, 희롱이 죄를 묻지 않는 오유끼. 짓밟은 값을 돈으로 치를
수 있는 계집. 밟히려고 작정하고 이렇게 나와 앉은 사람. 서러운가, 오유끼.
"오유끼...좋은 이름인데...? 나가이 가후의 여인이로구나."
강모는 나지막이 숨소리로 말했다. 오유끼는 강모의 턱 밑에서 고개를 갸우뚱하
며 미소를 지었다. 말의 뜻을 알 수는 없었으나 손님이 하는 말에 대한 인사이
며 교태였다. 그네의 눈빛은 신열이 돌아 붉게 물든다.
"너, 그 여자를 아느냐?"
알 리가 없는 줄 번연히 알면서도 물어 본다. '오유끼'는 그 허무한 냉소주의자
나가이 가후의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 여자였다. 일찍이 히로쓰 류우로의 문하에
들어가 습작을 한 그는 일본 고래의 춤과 피리, 만담 등을 공부하다가, 1903년에
는 미국으로, 또 4년 후에는 불란서로 마음껏 떠돌던 사람. 나가이 가후는 세기
말 문예에 도취되어 그 아름다움을 글로 썼다. 그은 에도 예술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으며, 향락 퇴폐를 문단에 불러일으킨 사람이기도 하다. 어쩌면 그의 향락기
주의는 인생에 대한 소극적인 반항이었는지도 모른다. 무너지고 스러지는 것들
에 대한 애절한 사랑과, 무너지게 하고 스러지게 하는 것들에 대한 무력한 증오
가, 차라리 그를 냉소적인 시인으로 만들고 말았을 것이다. 퇴폐와 윤락의 밑바
닥에, 닿으면 나가이 가후는 느끼었다. 그래서 에도 문화를 찬미하고, 그 자신의
나날을 향락에 내던지며, 화류계에서 소재를 취하여 시문을 썼던 것이다 .강모는
그를 좋아하며 즐겨 읽었다. 그 중에서도 묵동기담. 아마도 그것은 틀림없이 작
가 자신의 이야기이리라. 오유끼는 그 소설 속의 여자이다. 사창, 거리의 여인.
그러나 순진하고도 열정적인 오유끼. 동경 뒷거리의 인정과 풍속이 서글프게 물
들어 있는 배경에 나타난 한 문사는, 허무의 세계에서 그림자처럼 배회한다. 그
는 보잘것 없는 창부 오유끼에게 끌리는 마음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차츰 진정
으로 그를 사랑하게 되는 그녀와 끝내 동화되지를 못한다. 진창에 날리는 흰 눈
은, 꽃잎처럼 내려앉아 짓밟히며 진창이 되고 만다. 질척거린다.
"결국 인생에는 달콤한 조화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그저 생에 대한 그
리움이거나 한낱 꿈에 불과할 뿐."
이라고 쓸쓸히 체념하고 마는 주인공. 그 주인공은 바로 나 자신이다. 그렇다면
'오유끼'는 바로 너이냐? 너는 책 속에서 걸어 나왔느냐? 강모는 실소한다. 그리
고 안겨 있는 오유끼의 흰 손목을 잡는다. (손목을 잡는 것만으로도 죄가 되는
사람이 있다. 바라보아도 안되는 사람이었지. 그래서였던가. 나는 그 사람의 얼
굴을 바로 본 일이 없고, 그 사람도 나를 바로 본 일 없었다. 언제나 돌아설 듯
빗기어 그 자취마저도 아련했던 사람. 그런데 나는, 손목보다 더한 것을 부러뜨
리고 말았었다. 그러고도 그 사람을 버리고... 짓밟은 그 자리에 말 한 마디 남겨
놓지 않은 재 도망치고 말았느니. 그다지도 애절하던 이름이 이제는 이대도록
두로워 꿈길에서조차 들릴까 무섭기만 하다. 그뿐이냐. 알 수 없는 손아귀에 덜
미를 잡힐까 봐 허둥지둥 기껏 숨어든 곳은 또 어디였던가. 허울은 아내였으되
마음은 가지 않던 여인에게 내 허망함을 부려 버리려 했었다. 나는 비겁한 사람.
허깨비. 어느 것 한 가지도 떳떳하게 행하지 못하고 누리지도 못한다. 나는 왜
살고 있는가. 누군가는 한 사람이 능히 열 가지 일을 하건만, 나는 한 가지도 제
대로 하는 일이 없다. 그런데도 나에게 바라는 바는, 백 가지 천 가지가 넘는다.
이 무슨 고달픈 운명인가. 그저 나 하나 소리 없이, 내생긴 대로, 막힌 데 없이,
걸린 데 없이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허나, 오유끼. 너의 이름이 오유끼라
고 했느냐? 내가 네 손목을 잡는 것쯤이야 죄 될 리도 없으려니와, 너 역시 내
모가지를 조이지는 않을테지? 너는 계산하면 그만이니까.) 자욱한 안개는 숨겨진
넋을 짓누르고, 우뚝한 태산은 사람의 숨통을 짓누른다. 오로지 누르고, 누르고,
누르는 것들. 강용한 자들의 악력은 질긴 나무의 뿌리처럼 억세다. 모가지를 틀
어쥐고 놓아 주지 않는다. 그럴 뿐만 아니라 덜미를 잡힌 재 버둥거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덤벼들면 덤벼드는 꼴을, 주저앉으면 또 그 주저앉는 형상을 낱
낱이 들키면서, 이리저리 피해 다니는 내가 나도 싫다. 진저리난다.
"오유끼."
오유끼가 대답 대신 눈빛으로 웃는다.
"노래를 불러라."
강모는 노비에게 명령하듯 짧게 말했다. 오유끼는 다소곳이 이마를 숙여 절을
하고는 샤미센의 줄을 고른다. 그네의 흰 손가락이 강모의 가슴에 닿는다. 강모
는 머리를 털어낸다. 자완무시와 떡국, 은어 요리들이 어지럽게 상 위에서 뒤섞
이고, 함께 앉은 사람들은 이미 샤미센의 가락 따위에는 귀를 기울이고 있지 않
았다. 그들은 거나한 취기를 옆자리의 젊은 여자에게 부리며 허리를 끌어안고
낄낄거린다. 방안에는 자욱한 담배 연기가 전등 불빛을 가리워 모든 것이 몽롱
하게 보인다. 귀밑에서 들리는 희롱의 소리도 아득하고 멀어, 꿈결인가 저승인가
싶었다. 그런 와중에서 오유끼는 홀로 샤미센을 퉁기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 가락을 듣고 있지는 않았다. 그네도 누가 들으라도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았
다. 가락은 저 혼자서 금빛으로 번쩍이다가 유순해지고, 그러다가 또 혼자서 명
랑한 물 소리를 냈다. 물 소리가 귀를 젖제 한다. 그는 오유끼와 더불어 달빛 아
래 서 있었다. 용소에 부서지는 검푸른 달빛은 물배암처럼 소용돌이를 휘감고
있었다. 그것은 신비롭고도 광기 어린 빛깔이었다. 청동으로 빚은 것 같은 오유
끼가 강모에게 손짓을 한다. 무너질 듯한 암벽의 검은 그림자와 짙푸른 육도목
수풀이 어우러져 숨막히는 향기를 입김으로 뿜어낸다. 그리고 오유끼와 강모는
푸른 달빛 속에서 벗은 몸으로 시리게 찬 물살에 곤두박질치고 자멱질을 하고,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웃고 웃었다. 속이 허해질 만큼 웃었다. 웃음은 바람
인 모양이었다. 하품처럼 웃음을 토해 냈다. 눈귀에 눈물이 배어났다. 귓가에서
는 샤미센의 음률과 물 소리와 웃음 소리가 서로 엉키켜 젖은 눈물에 반죽이 되
고 있었다.
"너...,나하고 살래?"
새벽에 눈을 뜬 강모는 어슴푸레한 허둠 속에서 오유끼에게 물었다. 오우끼는
그 말에 별로 놀라지 않았다. 다만 나이답지 않게 그늘진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주인이 있어요."
"주인?"
"저는...팔린 몸입니다."
오유끼는 가까스로 웃으며 모찌즈끼의 주인 남자 이름을 말했다. 그리고 한참
동안 묵묵히 천장을 바라보았다.
"올가미를 벗어날 수가 없어요."
그네의 목소리는 낮았다. 강모의 머리 속에는 입술이 두툼하고 번질거리는 남자
의 천박한 면상이 떠올랐다. 낙지의 빨판 같던 붉은 손가락이 공중에서 열 개의
울거린다. 그것은 오유끼의 목덜미에 흡착되어 감겨들었다. 오유끼는
비명도 없이 그 빨판이 붙은 다리에 목을 감기운 채 진을 빨리우고 있었다. 어
찌 보면 빨판은 야마시따의 입술이기도 했다.
"도망을 치지."
"평생 ㅉ기면서 살게 되겠지요."
"얽매여서 사는 것보다는 낫지 않다?"
"그렇지도 않아요. 저는 다시 이런 데로 가게 될 걸요. 어디서나 마찬가지예요.
먹고 살 길이 없답니다."
"굶는다는 말이냐?"
"죽고 말겠지요. 거리에서."
"다른 일을 하면서 살아갈 수도 있는데?"
"저는 이미 물이 들어 버렸어요. 지워지지 않을 텐데요, 뭐....그냥 이 웅덩이에서
썩어 버리고 말 거예요."
"너는 아직 꽃도 피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썩을 궁리를 하고 있단 말이냐."
그때 오유끼는 체념과 포기에 길든 늙은 기녀처럼 말했다.
"피지 않고 시드는 꽃도 있지요."
꽃. 썩어들어가고 있는 꽃의 다리. 이리도 저리도 갈 수 없는 자리에서 서서히
뭉그러지고 있는 살과 뼈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오유끼의 낮은 한숨 소리. 그
는 순간 그 꽃뿌리를 다가봉 아래 굽이치며 흘러 시퍼렇게 소용돌이 일으키는
용소에 담그어 주고 싶은 격렬한 충동을 느꼈다. 물살에 씻기는 흰 다리가 푸른
물그림자에 어려 한 마리의 물고기처럼 헤엄치는 것이 보였다.
"정이라면 내 어쩌지 못하겠다만."
돈이라면 내가 너한테 줄 수가 있다. 너를 풀어 주고 싶다.
"풀어 주고 싶다."
그는 진심으로 간절하게 속삭였다. 마치 자기 자신의 비밀이라도 털어놓는 것처
럼. 오유끼는 믿지 않는 것 같았다. 팔려 올 때는 보리쌀 한 말이나 치마 저고리
한 감 값이었으나 이제는 짐짝보다 무거운 빚무더기가 등을 짓누르고 있는데.
어떻게 그것을 털어내 버릴 수가 있을까. 다만 오유끼는 잠깐 미소를 띄웠다.
"자주 오세요."
그것으로 고마운 일이었으므로 그네는 그렇게 말했다.
"나랑 살자."
그러나, 그 말에는 대답을 안하고 그네는 엉뚱한 질문을 한다.
"몹시 속이 상하셨던가 봐요?"
"언제?"
"어제."
"왜?"
"많이 취하셨어요. 쥐어 짜면 주루루 술국이 쏟어지게. 술자리 파할 때까진 그냥
앉아 계시기는 했는데요. 일어서질 못하시데요."
"토했어?"
"많이."
그러고는 무어라고 말을 이으려다 그만둔다. 어슴푸레하던 방안의 빛이 어느 사
이 희어졌다. 그래서 오유끼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또 어쨌는데?"
"아니예요."
"무슨 일이 있었구나. 말을 해라."
그러나 그네는 아니라고만 하며 돌아 눕는다. 성급하게도 이 여자는 꽃값을 계
산하려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밤새도록 소릴 지르셨어요."
"소리?"
그럴 리가.
"다 부서 버리겠다구, 다 소용 없다구 그랬어요. 막 으르릉거려서 무슨 말인지
들을 수는 없었는데요, 늑대가 우는 것 같던데요? 그러구는..."
강모는 의아하여 반쯤 일어나 앉았다. 뒷머리를 잡아당기는 두통이 번개를 친다.
쇠꼬챙이 같은 통증이었다. 그는 비명을 삼키며 자기도 모르게 두 손으로 머리
를 감쌌다.
"마지막엔, 차라리 날 잡아먹어라, 차라리 날 뜯어먹어라, 그러셨어요. 벗어 젖히
구는, 새빨간 몸뚱이 하나뿐이라구, 이거뿐이라구, 이게 다아라구, 마음대로 하라
구 그러시더니요... 왜 가만 있느냐구, 너이 년, 왜 가만 있느냐구... 나를 짓밟으
라구... 안 그러면 내가 널 죽여 버리겠다구 그러면서."
생각난다. 그랬었다. 내가 이 여자를 움켜쥐었다가 방바닥으로 패대기를 쳤지.
나가떨어지는 오유끼를 일으켜 세워 다시 벽 쪽으로 메다붙였다. 그리고 몰매질
하듯 후려쳤다.
"꿈인가 싶더니만, 그게 너였느냐?"
오유끼는 온몸이 멍이 든 채로 새벽녘에야 강모에게 옭죄이게 안겨 잠이 들었
다. 강모가 때린 것은 오유끼가 아니었다. 메다붙이고, 후려치고, 패대기치며, 물
어뜯으며, 짓이긴 것은 오유끼가 아니었다. 그것은 대실의 혼행에서 맞닥뜨린 태
산 같은 효원의 그림자였다. 집어삼킬 듯 우뚝하던 효원의 어깨였다. 어찌 보면
그것은 강실이이기도 했다. 무너지며 괭괭거리는 징소리가 귀에 울려, 그 소리를
몰아내려고 길길이 뛰어로를 때, 텃밭에 낭자하던 꽃대 부러지는 소리와 강실이
의 등뼈가 내려앉던 소리. 방바닥에 쓰러지는 오유끼는 안개마냥 자욱한 강실이
였다. 그런가 하면 강실이가 아니라 청암부인이기도 했다. 서리 맺힌 눈매를 서
늘하게 뜨고 있는 할머니의 허이연 머릿결이 가슴에 얹힌다. 암키와 수키와가
서로 이를 맞물고 그물코같이 단단하게 얽혀 단번에 덮어 씌울 듯 거대한 날개
를 펼치던 지붕, 괴조의 주둥이처럼 허공으로 치솟아 솟구치던 용마루가 순식간
에 자기에게로 내리꽂히는 아찔함에 강모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 날카로
운 아픔은, 수천 숙부 기표의 눈빛이 쏘는 화살을 맞은 자리가 찢기는 통증이기
도 했다. 그리고 부친 이기채의 놋재떨이 두드리는 금속성. 네 이노옴. 네이 천
하에 못된 놈, 뒤통수를 때리는 퇴침. 산산 조각이 난 채로 튀어오르던 바이올린
의 몸통. 그 몸통에 맞아 흩어진 담배통과 타구. 강모가 오유끼를 두들겨 팬 장
작은 샤미센이었다. 노래를 불러라. 덕석에 말어라. 짐승만도 못한 놈. 몰매를 쳐
라. 나는 떠나고 싶었어요. 달아나고 싶었습니다. 덜미를 잡지 마시오. 내 목을
매지 마십시오. 동경으로 보내 주세요. 생긴 대로 노래 부르며, 악기를 두드리며,
떠돌아 다니며 살게 해 주세요. 제발.
"도망가지 왜 밤새도록 맞었느냐."
강모는 가까스로 오유끼에게 묻는다. 목이 잠긴 소리다. 그는 몹시도 무안하였
다.
"우시길래."
"많이 울더냐?"
오유끼는 대답 대신 누이처럼 강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드럽고 따뜻하게, 올
히려 밤새도록 맞은 쪽은 강모였던 것같이. 강모는 그네를 와락 끌어안는다. 끌
어안은 그의 팔에 눈물이 돈다.
"내가 망령이 씌었던가 보다."
나는 지금까지 누구도 가해 가학한 일이 없었다. 네가 나를 믿을는지는 모르겠
다만. 허나 이상한 일이구나. 웬일로 아무 잘못 없는 너를 그리했을까.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세상에서 나를 받아준 다 한사람은 바로 오유끼, 너 하
나뿐이었다. 주는 시늉 하면서 갈고리로 나를 찍으려는 사람뿐인데, 애오라지 너
하나가 엉뚱한 내 갈고리에 찍혀 주었다. 내 속을 풀어 내게 해 주었다. 너는 너
를 풀어 주리라. 나한테 맞은 매를 갚아 주리라. 결국, 그는 망설이지 않고, 자신
이 관리하고 있던 공금을 덜어 냈다. 그래서 모찌즈끼의 주인에게 건네주었다.
남자는 번질거리는 붉은 입을 크게 벌려 웃으며 고개를 끄덕 하였다. 삼백 원.
그리고 그녀는 그의 것이 되었다. 유곽근처에서 일감을 얻어 빨래하고 옷을 지
어 주던 삯바느질 여인들이 여자 저고리 하나에 삼십 전, 치마는 육십 전을 받
고, 두루마기 하나를 짓는 데는 양단이나 합비단일 경우 삼 원이나 사 원을 받
았으니, 매일 빨래하고 매일 푸새하여 주야를 가리지 않고 옷을 지어도 한 달
수입이 이십 원을 넘기 어려운 형편인 것을 생각하면, 삼백 원이란 하늘 같은
돈이어서 오유끼는 강모의 말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강모는 오유끼를
모찌즈끼의 대문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그날 그네는 몹시 두려운 듯한 몸짓으
로 주춤거리며 강모의 뒤를 따라 나섰다. 그런데 묘한 일이었다. 대문을 경계선
으로 그네가 한 발을 길목으로 내디뎠을 때, 강모는 순간적으로 새로운 올가미
에 걸리고 말았다는 것을 절감한 것이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색정신지 관재구설
어머니 율촌댁이 강모의 손 안에 쥐어 주던 종이 조각에 조생원의 달필이 꿈틀
거리며 음험하게 눈동자를 번득이고 있었다. 하필이면 그대, 그 구절이 펀듯 떠
오른 것이다. 무슨 일이야 있을라고. 그까짓 삼백 원. 물론 삼백 원이 어찌 적4
은 돈이랴. 그러나 그로서는 얼마든지 다시 채워 넣을 수 있었다. 자기가 관리하
고 회계하는 금액의 일부를 우선 잠시 꺼내 쓰는 것에 불과하다. 공금을 사사로
이 쓴다는 불안이나 죄의식은 없었다. 바다처럼 질펀한 논과 밭이 등뒤에 드리
워져 있는 강모가 입을 벌리기만 하면, 돌아서지도 않아서 주머니 돈을 빌려 줄
전주만 해도 한두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자마저도 재촉하지 않는다. 장부에
적어 두는 것만으로도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여기는 때문이었다. 누구의 손자
인데 오죽할까. 그 말 한마디면 더 이상 덧붙일 말이 필요 없었다. 강모는 떠오
른 글귀를 머리에서 털어 버리고 공금을 꺼내 쓴 사실도 따라서 잊어 버렸다.
훔치는 것이 아닌데 무슨 죄가 되리. 곧 귀를 맞추어 챙겨 넣으리라. 그는 방심
하였다. 거기다가 그는 남의 것과 내 것을 칼로 자른 듯 반듯하게 셈하면서 살
아오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원하는 것은 언제나 그의
곁에 있었다. 말만 하면 되었다. 그보다 새로 시작된 생활에 골몰하여 옆을 돌아
볼 틈이 없었다고 할까. 그는 늘, 한 발은 오유끼 바깥에 내놓고 금방이라도 빠
져 나갈 궁리를 하면서 다른 쪽 발은 늪 속에 잠긴 것처럼 점점 더 깊숙이 묶여
들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몸은 기우뚱 가파른 경사를 이루어 위태로웠다. 여자
가 생겨서 쓰임새가 늘어나, 필요할 때마다 변통하여 빌어 쓰는 돈은 어느 틈에
지게 짐이 되어 더욱이나 그를 기울어지게 하였다. 혼몽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틈에 해가 바뀌면서 노곤한 봄이 이울고, 초하의 여울이 한여름 폭염으로 고꾸
라질 때, 강모는 느닷없는 감사에 걸리고 만 것이다.
"공금유용"
"공금횡령"
거기에는 변명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일이었지만, 야마시따
가 어느 술자리에서 큰 소리로 농담하던 끝에 발설한 말이 빌미가 되었다는 것
이었다. 강모는 일이 발등에 떨어진 다음에도 무엇 때문에 혼이 나는지 얼른 실
감이 나지 않아 의아할 정도였다. 그는 구속되었다. 그리고 파면되었다. 접에는
절대로 알리고 싶어하지 않는 강모를 대신하여 결국, 강태가 나선 긴급한 연락
을 받고는, 그 길로 선걸음에 달려온 기표가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는 그를
끄집어내 주었다.
"하필이면 천하에 어디 계집이 없어서 그런 요물한테 잡어먹힌단 말이냐. 남자
일신 망신하고 패가허는 것은 순간의 일이다. 무엇이든 요령껏 다루고 거느리고
해야지, 이게 무슨 일이냐?"
쩟. 기표는 입맛을 다셨다. 그의 얼굴에 모멸의 빛이 역력했다.
"여자한테 잘못 물리면 그 못된 아가리는 사람도 삼키고 집채도 삼키고, 남자의
한평생도 눈 하나 깜짝 않고 둘러 삼키는 법이다. 계집을 다루는 데도 요령이
있어야지. 이번 일은 각골 명심해라."
아까 골목 어귀에서 기표는 다시 한번 오금을 박았다. 부스스한 까치집 머리를
이고 서서 아직도 온 정신이 안 돌아와 하깨 비처럼 넋을 놓고 서 있는 강모에
게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러고오, 할머님이 위독허시다. 오늘 내일을 기약 못허는 형편이야. 내 긴 말은
하지 않겠다. 집에 가서 허기로 허고, 내일 새벽 첫차로 같이 가자. 이번 기회에
부청이고 뭐고 다 깨끗이 청산허고, 집에 가서 아버님 일이나 마음잡고 착실히
보아 드려라. 아버님도 경황 중에 득병을 하셔서, 이거 까딱하면 쌍초상 나게 생
겼다. 기왕지사 한번 지나간 일은 그렇다고 허고, 뒷수습을 잘해 놓았으니 마음
잡고 이제부텀이라도 착실허게 살면 되지. 내일 새벽에 내가 이리로 오겠다."
강모는 물끄러미 검은 냇물만 바라보았다. 머리 속에 부연 먼지가 날아앉아 모
든 것은 그 형체가 분명하지 않았고, 모든 것은 암담하였다.
"재가 정거장으로 나가지요. 여기까지 오실 거 없습니다."
그러나 기표는 짤막하게 말했다.
"아니다. 내가 오겠다."
그리고 기표는 힐끗 강모가 살고 있는 골목 어귀를 돌아보았다. 어둠이 엉긴 그
어귀에는 아까부터 사람의 흰 그림자가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그녀는 오유
끼였다. 크으 어흐음. 마치 침을 뱉기라도 하는 것 같은 큰 기침 소리를 남기고
기표는 갔다. 기표가 사라져간 다음에도 한동안 오유끼와 강모는 각각 그 자리
에 붙박인 채 옴짝도 하지 않고 그렇게 서 있었다. 강모는 유치장에서 열하루
만에 풀려 나왔던 것이다. 어둠은 오랜만에 만난 그들의 침묵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각질로 굳어지는 침묵을 부수지 못하고, 강모는 방천에 쭈그리고 앉았
다. 그리고 여전히 냇물만을 내려다보았다. 오유끼는 강모가 돌아오지 않던 날로
부터 밤마다 골목 어귀에 나와서 그를 기다렸던 모양이다. 그런데도 막상 돌아
온 그의 곁으로 오지 못하고 골목 어귀에 그림자처럼 서 있기만 하였다. 그녀는
그가 불러주기를 기다렸던 것일까. 그러나 강모는 오유끼를 부르지 않았다. 그리
고 여지껏 이렇게 밤 냇물을 말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들어가자." 강모는 방
천에서 일어선다. 쪼그리고 앉아 있던 오유끼도 따라 일어서며 강모의 바지를
털어 준다. 캄캄한 어둠 속에 구부린 오유끼의 등허리가 여위어 보인다. 어둠 속
에서는 그래도 잘 모르겠더니 방안의 불빛 아래 드러난 강모의 얼굴은 누렇고
초췌하다. 부스스 일어선 머리카락이 땀과 먼지에 엉켜 부옇게 보이고, 그의 뒤
통수에는 새집마저 엉성하게 지어져 있었다. 불안하고 외롭다. 강모는 오유끼가
떠온 냉수를 벌컥벌컥, 소리가 나게 마신다. 오유끼는 조심스럽게 강모의 안색을
살핀다. 아까부터 감히 입을 못 여는 것이다. 그만큼 강모의 얼굴은 차갑고 초췌
하여 낯선 느낌을 주기 때문이었다. 언제인가처럼 그네의 귀에는 추운 솜털이
허옇게 일어선다.
"수천 숙부님은 내려가셨어요?"
강모가 내미는 물대접을 받으며, 오유끼는 틈을 비집고 들어오듯 묻는다.
"아니, 내일 새벽에 이리로 오신댔다."
"저..."
오유끼가 겁을 집어먹은 듯한 목소리로 말을 잇지 못하며 강모 곁에 앉는다. 강
모는 오유끼를 돌아보았다. 그 눈이, 왜...라고 묻고 있었다. 순간 오유끼는 대접
을 내던지고 강모의 목을 휘감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몹시 북받치는 서러운 울
음이었다.
"왜 그래...? 왜 울어, 오유끼?"
그러나 오유끼는 대답 대신 그의 목을 더욱 조이며 흐느낀다. 강모는 엉겁결에
오유끼의 팔목을 풀어 내려고 하였다. 그럴수록 그네의 팔은 동아줄처럼 질기게
또아리를 감는다.
"당신... 나를 버리실 거지요?"
순간, 강모의 몸에서는 공포에 가까운 소름이 일었다. 그는, 살갗을 찬 손으로
씻어내리는 소름을 털어 내지 못하였다. 오유끼의 땀에 젖은 손바닥이 강모의
입술을 더듬어 찾는다.
"그렇지요?"
마치 말이 없는 그의 입술에서 손끝으로 대답을 읽어 내리는 것 같았다. 강모의
입술은 나무조각처럼 단단하고 메말라 있다.
"나는 알고 있었어요. 언제고 당신이 나를 버릴 것이라고요... 나는 ... 아무것도
아닌 여자거든요... 당신을 만났을 때는 몸도 깨끗하지 못했어요... 나는 늘 그것
이 부끄러웠어요... 지울 수 없어서 더 그랬어요... 이제는, 이제는... 정말로 버리
실 거지요?"
그러나 강모는 여전히 말이 없다. 한참만에야 겨우
"어린애 같기는."
하고 간신히 밀어내어 말했을 뿐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런 예감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오유끼는 그렇게도 정신없이 가구를 사들였을까?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은 다가정으로 함께 온 이후에 일어난 오유끼의 변신이었다. 처음의 ㄱ
녀는 의외에도 단순하고 검소하였다. 그래서
"우리, 날 풀리거든 다가봉 기슭에 움막이든지 초막이든지 하나 구해서 얻어 살
자."
하고 강모가 이야기했을 때, 오유끼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어린아이처럼 웃었다.
심정 같아서는 비록 겨울이라고 할지라도 그런 집을 구하고 싶었다. 오는 이, 가
는 이도 없는 산기슭에 풀잎으로 지붕을 엮은 한 칸 띠집을 짓고 아랫목이 따끈
하게 군불을 때면, 갈자리 방바닥에서 따뜻한 흙냄새가 피어오른다. 이따금 귀를
기울이면 골짝기를 피리 삼아 불고 가는 바람 소리. 얼어붙은 용소의 빙판에 미
끄러지는 눈보라의 경쾌한 몸짓은 또 얼마나 보기 좋은 것이다. 그리고 몸에서
갓 피어난 연기 냄새를 풍기며 안겨 오는, 아무 욕심없는 어린 여자와 어울려
꽃잎처럼 희롱하는 아늑한 평화.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밤과 낮을 보낸다
는 것. 강모는 오유끼에게서 그런 길들여지지 않은 즐거움을 얻고자 하였다. 또
한 봄이 오고 날이 풀리면 얼음이 녹은 냇물에 발을 잠그고, 청류벽 저쪽 숲정
이에서 불어오는 꽃바람을 들이켜리라. 여름에는 캄캄한 하늘에서 별이 쏟아지
는 밤, 시원하고 감미로운 용소의 물살에 몸을 잠그고, 하늘의 달빛보다 요요한
인광을 번뜩이며 자멱질을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봄 가뭄
이 길어지면서 냇물이 마르기 시작하고 부연 황사가 하늘을 메웠다. 다가봉의
육도목은 나무의 크기와 굵기가 몇 십 년, 몇 백 년을 넘는 것이었건만, 벼랑에
선 채로 말라 죽어 갔다. 그 잎사귀나 가지 줄기들의 생김새가 영락없이 감나무
로 속아 넘어가기 알맞았는데 그것은 입하 무렵이면 하얗게 피어났다. 벼랑으로
쏟아지는, 실로 낭자한 신록을 뒤덮는 육도화는 흡사 백설 같은데, 그 품의 높고
맑고 깨끗한 향기와 더불어 반공을 휘황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 여름에는 이상
하게도 빛 바랜 누르께한 꽃잎을 날리다가 말았다. 어른들은 누런 다가봉을 바
라보며
"무슨 변이 나도 날 것이다."
하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메마른 암벽이 돌가루를 부스러뜨리고 육도목은
누렇게 시들어 병색이 짙은데다가 냇물마저 바닥이 앙상하게 드러나고 말았다.
심지어는 용소의 물굽이조차도 기세가 잦아들어 물 밑바닥에 잠겨 있는 거북바
위의 검은 등이 드러날 지경이었다. 강모는 뙤약볕 아래 빠작빠작 말라드는 용
소의 물을 내려다보며 피할 길 없는 예감을 느꼈다.
"당신... 나를 버리실 거지요?"
오유끼는 강모의 목을 감은 채, 두려움에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한번 묻는다. 강
모는 대답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끈끈하게 땀이 배어난 그녀의 몸뚱이가 차갑
게 느껴진다. 섬ㅉ, 손목에 와서 닿던 수갑의 금속성이, 그 감촉이 되살아나서
그는 소름을 털어내듯 오유끼의 팔을 풀었다. 오유끼는 본능적으로 흠칫하며 몸
을 동그랗게 고부려 버린다. 사람의 손가락이 닿은 배추벌레처럼. 그리고
"나는 다 알고 있었어요.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요."
하고 중얼거렸다. 오유끼가 사들인 오동 기름을 먹인 화각장과 사방탁자, 의걸이
장 들이 불빛에 번들거린다. 강모의 눈에는 그것들도 금속성으로 보인다. 그는,
손목에 남아 있는 수갑의 차디찬 감촉을 거기서도 느낀다. 울고 있는 오유끼에
게서도, 쩟, 입맛을 다시던 기표에게서도 그것은 느껴진다. 여름밤의 무거운 더
위마저도 그는 시리기만 하다. 덜커덕, 철창을 잠그던 자물쇠 소리. 그 무거운
쇠통 소리. 써늘하게 가슴 살에 와서 닿던 그 소리. 그 소리를 속 시원하게 지워
줄 용소의 소용돌이는, 이미 물줄기가 잦아들어 바닥을 드러낸 메마른 입술로,
빠작빠작 타들어가는 제 가슴을 밤이 겹도록 깎고만 있었다.
14 나의 넋이 너에게 묻어
이기채가 두드리는 놋재떨이 소리가 뙤약볕 아래 쨍쨍하게 울린다. 그것은 노
여움으로 소리끝이 부르르 떨리고 있다. 익어 터지는 햇빛 속에서 후욱 놋쇠 비
린내가 풍겨온다. 강모는 사랑채 마당에 서서 누런 얼굴로 하늘을 본다. 햇빛이
눈을 찌른다. 순간, 통증으로 그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우는 시늉이 되어 버린다.
저지난 해 여름, 강수의 넋을 혼인시키던 명혼이 있던 무렵에도 이렇게 석류껍
질 벌어지듯 쩌억 소리를 내며 햇빛이 갈라졌었지. 그 햇빛이 갈라진 자리에 캄
캄한 어둠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까마득한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져 내리던
아찔함이 그대로 되살아난다. 그러나 그도 벌써 이 년 전 일이 되고 말았다.
"아이고, 내 새끼야..."
강모가 안채 마당으로 들어섰을 때, 마당에서 서성거리고 있던 율촌댁은 그의
손을 부여잡고 눈물부터 쏟았다. 예전의 그네 같으면 그럴 수 없는 일이었다. 그
가 아직 혼인하기 전에는, 사랑채의 이기채와 큰 방의 청암부인께 문안이 끝나
야 건넌방으로 들어왔던 강모를, 조금이라도 미리 보고 싶어 장지문을 비긋이
열어 놓기도 할 정도였다.
"나는 할미고, 네 아버지는 너를 낳으신 어른이니, 인사는 언제나 사랑에 먼저
드리고 오너라."
청암부인은 강모에게 그렇게 일렀다. 그러나 율촌댁은 비록 어머니 일지라도 청
암부인 다음으로 문안을 받았다. 강모가 사랑에 있을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안
채로 건너와 큰방에 들어 있을 때가 율촌댁으로서는 가장 지루했다. 청암부인은,
강모가 아직 떡애기일 때부터 무릎에서 내려놓을 틈이 없을 만큼 가까이 두고
애중히 하였다. 그래서 오히려 어머니인 율촌댁보다 청암부인과 함께 있는 시간
이 더 많았다. 웬일인지 강모도 어머니보다 할머니와 더불어 있기를 좋아하였다.
꼭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청암부인의 앞에서 율촌댁이 강모를 귀여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만큼 그네의 마음에는 언제나 강모에 대한 아쉬움이 앙
금처럼 가라앉아 있었고, 잠깐씩 밖에 마주앉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율촌댁을 서
성거리게 하였다. 급하게 잠깐 본 아들의 모습이 마음의 갈피에 끼어, 몰래 꺼내
보는 옥가락지처럼 율촌댁을 설레게도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눈치를 볼
겨를도 없었거니와 어려운 어른인 청암부인은 의식을 잃고 있으니, 좌우를 가리
지 않고 뛰어내려온 것이다.
"올라가자."
율촌댁은 옷고름으로 눈물을 찍어내며 강모의 손을 잡아끈다. 강모는 대답이 없
다. 얼굴빛이 몰라볼 만큼 초췌하였다. 이끌리어 대청으로 올라선 강모는 율촌댁
에게 절을 한다. 둥그렇게 엎드린 뒷등이 앙상하다.
"많이 여위었구나."
절을 하고 다리를 개는 강모 옆에 바짝 다가앉아 그의 뺨을 쓸어 보는 율촌댁
은, 다시 가슴에서 치미는 울음을 못 참고 고개를 돌린다. 그래도 강모는 말이
없다.
"대관절 어떻게 된 일이냐? 에미한테 속 시원히 말 좀 해 봐라."
"아무 일도 아닙니다."
"아무 일도 아니라니, 그건 또 무슨 얘기냐? 며칠 전에 수천 숙부께서 네 일로
돈 오백 원을 가지고 가셨다던네? 삼백 원은 부청에 변상허는 돈이고, 이백 원
은 무슨 교제비로 들어간다면서 가지고 가셨다. 에미가 애가 타서 입이 마르고,
잠이 안 와서, 질정을 못허고 너 오기만 기다렸단다."
반 울음 섞인 소리로 말끝을 제대로 맺지 못하면서 더듬거리는 율촌댁은, 그런
중에도 강모의 손등을 쓸어 보며 한참씩 고개를 숙이곤 했다.
"그렇게 다 아시면서 무얼 더 알고 싶으세요?"
"그렇게만 알면 어떻게 해...? 무슨 영문인지를 알어야지."
"차차 아시게 되겠지요."
"그나마 강태가 와서 말을 해 줘서 알었지, 집에서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지 뭐
냐."
"그게 무슨 좋은 일이라고 집에다 광를 합니까."
"아, 나쁜 일일수록 집에서 먼저 알어야지 남이 먼저 알어 되겠느냐?"
강모의 일은 이미 거멍굴에까지 소문이 번져 있었다.
"네가 부청 공금을 유용했다고? 자알했다. 그래 무엇에 썼느냐? 무슨 좋은 일에
썼어? 조상의 선산 치레를 했느냐아, 집안에 논밭을 샀느냐, 입 두었다 왜 말을
못해? 아니며언, 아니며언, 무엇에다 썼느냐아."
아까, 호출을 받고 전주에서 오는 강모를 보자마자, 사랑의 이기채는 벼락같이
퇴침을 들어 내던졌다. 기표가 얼른 그의 팔목을 잡았다. 강모는 아슬아슬하게
피하여 다행이었으나. 그 대신 퇴침이 위칸의 차탁자에 정통으로 맞아 와그르르
다기들이 쏟아지면서 박살이 났다. 그 소리가 안채에까지 들려, 율촌댁은 무망간
에 사랑채 마당까지 버선발로 뛰어내려갔었던 것이다.
"네 이노옴. 이노옴. 차라리 썩 나가서 죽어라. 너 같은 놈은 일찍 죽어야 다른
사람한테 덕이 된다. 내 눈앞에 보이지도 말어. 도대체 네가 이날 이때까지 똑바
르게 사람 노릇을 헌 게 무어냐, 으응? 참,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 난다더니
이레 안에 배코를 쳐도 유분수지, 이제 귀때기 새파란 녀석이, 나이 주먹만한 것
이, 벌써부터 기생 첩질로 가산을 탕진허기 시작허네그려. 패가 망신이 다른 게
아니다. 어떤 소갈머리 없는 위인이 전답을 날리고 패가를 허는가, 내, 속으로
웃었더니 그게 바로 내 일이 되었구나. 허이구우."
"형님, 고정하십시오. 젊은 나이에 호기심도 있고 객기에 한 번."
기표가 채 말을 맺기도 전에 이기채는 벼락을 친다.
"뭐어? 호기시임? 무슨 호기심? 왜 여자가 어디 기방에만 있는가? 그럴작시면
장가는 왜 들어? 일구월심 저 하나를 기다리는 제 사람이 있는데, 필요허먼 집
으로 올 일이지 객기는 무슨 놈의 객기를, 부릴 데가 없어서 삼백 원씩 퍼다 바
치고 화류계 계집한테 부린단 말이야? 허허어 참, 너 객기 한 번 비싸게 부리는
구나? 으응?"
"저도 인제는 정신을 차릴 겝니다. 말씀을 잘 알아들었을 테니 그만 허십시오."
"알어들어? 저놈이 알어들을 놈이야? 아니 삼백 원이 얼마나 큰 돈인지 알고 하
는 소린가, 모르고 하는 소린가? 허나, 돈이 문제가 아니야. 기왕에 오입을 할
양이면 왜 조용히 못해? 그만한 처신도 못하는 놈이 무슨 행세를 하느냐고. 제
애비가 아들놈 오입 뒤치다꺼리를 하는 풍속이 대관절 어느 나라 풍속이란 말이
냐. 내 어쩌다가 이런 꼴을 보고 살고 있는가... 층층이 어른 모시고 사는 젊으나
젊은 놈이, 기생첩실. 맞이허느라고 공금을 삼백 원씩이나 횡령하여, 유치장에
들어가 앉어 용수를 뒤집어쓴다니, 이런 치욕이 가문의 어느 대 누구 이름에 선
례가 있단 말이야...?"
이기채는 분을 참지 못하여 얼굴빛이 노래지며 숨이 잦아든다.
"형님, 한 번 실수는 병가지 상사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기왕 지나간 일이고 이
제 무마된 일입니다."
"무마? 파면이 무마야? 용수 쓰고 감옥소에 가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으로 알라
는 것인가?"
"그렇다는 게 아니올시다. 지나간 일보다 앞일이 걱정입니다. 강모야. 너는 어서
사죄 말씀 드리고, 안채에 가서 할머님 뵙고 어머니도 뵈어라. 그렇게 앉어만 있
지 말고."
그제서야 강모는 주춤주춤 일어섰다.
"젊은 놈 꼴 한 번 참으로 보잘 것 있게 되었구나. 아예 온 동네를 한 바퀴 휘이
돌아라. 가서 사당에 고유 참배까지 허든지. 선대에 없던 인물, 한량 종손 났다
고 고해야 헐 게 아니냐."
토방으로 내려서는 강모의 목덜미에 이기채의 조소가 꽂혔다. 목덜미의 살갗이
바늘처럼 일어섰다.
"어머니."
"오야."
"저 들어가서 할머니 뵈올랍니다."
율촌댁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지나갔다.
"물론 가서 뵈어야지. 허나 지금 네가 가도 알아보지도 못허신다. 의식이 없으신
지 여러 날째야. 저번에 강태 와서 네 소식 전허든 날 할머님이 네 말씀 들으시
고는, 그만 그 길로 혼수에 빠지셨다."
강모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러니 에미랑 좀 이야기허자. 그래 그 일본 기생이라는 여자가 어떤 사람이
냐?"
"어머니 아시는 대롭니다."
"에미가 무얼 알어? 에미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럼 더 아실 것 없습니다."
"에미가 모르고 누가 안단 말이냐?"
"청루의 여자는 아니예요."
"일본 사람이야?"
"조선 여자예요. 일본 요릿집에 몸을 부치고 있노라고 일본 이름을 부르고 있었
어요."
"이름이 무언데?"
"오유끼라고 합니다."
"오유끼? 무슨 뜻이냐?"
"그런 이름에 무슨 항령이 있고 뜻이 있겠어요? 그냥 부르는 거지요."
"그래, 심성은 무던허고?"
"그저 그렇지요 뭐."
율촌댁은 강모가 그렇게나마 대답을 해 주는 것이 고마웠다. 어쩌든지 아들의
비위를 다치지 않고 한 마디라도 더 들으려고, 그네는 더욱 더 목소리를 낮추어
온화하게 말한다.
"네 안에서 조금만 마음을 잡아 주었어도 오늘 이런 일이 생겼겠느냐? 에미는
네 심정 말 안해도 다 안다. 여자가 좀 드세야지. 단단하기 강철 같으니 어떤 남
정네가 마음을 붙이겄느냐. 그저 여자란 땅이라 하지 않드냐. 무슨 씨앗이든지
뿌리면 싹이 나고, 천지만물을 다 그 속에 품어 주는 다수운 것이 여자라야 헌
다. 네 안이 그리 못허는 것, 에미도 다 안다. 이건 여자가 도리어 남자 중에서
도 싸움터에 장수 같은 남자 성격이니..."
"저 할머니께 가 뵈올랍니다."
"오냐. 그래라. 저러신 중에도 정신이 잠깐 드시면 너를 찾으신다. 어디 있느냐고
방안을 둘러보고 자리에 없으니 몹시 서운해허시드라. 이제 어디 가지 말고 할
머님 곁에 있거라. 지금 숨만 붙어 있지 살아계신 분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율촌댁은 애간장이 녹으면서도, 일변 알 수 없는 뿌듯함이 전신에 느껴졌다. 무
엇이라 할까. 청암부인으로부터도 이기채로부터도 버림받은 강모가, 가엾게 떨면
서 자기의 품으로 안겨들어온 것 같은 오랜만의 충만감이라고나 할까. 무엇보다
도 율촌댁은 이미 의식을 잃어 버린 청암부인한테서 강모를 되찾은 듯한 심정은
숨길 수가 없었다. 그리고 늘 뒷전에서 눈치보며 멈칫거리던 어미 노릇을 이번
에야말로 당당히 해 주고 싶은 간절함을 지그시 눌렀다. 이렇게 참담하여진 아
들이 마치 비에 젖은 새 새끼처럼 애처로우면서도,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자기
만의 것이 된 듯하였던 것이다.
"강모야. 조금도 걱정 말아라. 어떻게든 에미가 네 일을 잘되게 해주마. 무얼 해
주면 좋겠느냐?"
"괜찮습니다."
"에미가 어디 남이냐? 무슨 말이든 해 보아."
"아닙니다."
강모는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하였다.
"할머님한테 갔다가는 이리로 나오너라. 에미랑 좀더 이야기를 허자. 그 동안에
밀리고 밀린 이야기가 얼마나 많다고."
강모는, 그러지요,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그렇지 않았
다. 이야기한들 무엇 하리... 부질없는 일. 내 한 몸의 인생에 왜 이다지도 여러
사람이 노심초사를 하는 것일까. 나로 인하여 집안에 소동이 멎을 날 없으니 어
찌하여 그런가. 나는, 내 가지고 싶은 것 가지지도 못하고, 내 하고 싶은 일 하
지도 못했는데, 아무것도 되는 일 없이 시끄럽기만 하다.
"네가 어떤 자식이라고..."
율촌댁은 다시 강모의 손목을 잡는다. 강모는 손목이 끈끈하게 느껴진다. 그저
누구든지 나를 보면 입을 열어, 무슨 말이 되었든 자기 말을 하려 하고, 또 내
말을 기어이 들으려 한다. 그리고 곁에 두려 한다. 그럴수록 나의 머리 속은 실
꾸러미 얽힌 것처럼 어수선하고, 철사를 이빨로 물어 뜯으려는 사람처럼 괴롭다.
아아, 끊어 버리고 싶다. 이 질긴 줄, 철사의 올가미. 그러나 철사가 이빨로 끊어
지랴. 오히려 이빨의 사기질이 떨어져 나갔다. 치수의 신경이 철사의 금속성에
갈리면서, 온몸을 소스라치게 하던 그 감각이라니. 살 속으로 파고드는 가느다란
철사의 줄을 자기가 끊지 못하면, 그 줄이 자기를 베어 버릴 것만 같은 속박감
에 그는 자다가도 일어나 소름이 끼치곤 했다. 강모는 큰방 앞세서 까닭 모르게
몸을 떨었다.
"할머니, 저 강모예요."
하던 말도 이제는 소용이 없었다. 그네는 듣지 못하는 것이다. 재작년 여름에 창
씨개명을 해 버린 일로 크게 낙담하여 실심을 한 청암부인의 허깨비 같은 가슴
에, 더위가 컥, 숨이 막히게 얹히면서 그네는 끝내 식욕을 되찾지 못하고 말았
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유례없는 가뭄이 불볕을 쏟으며 이글이글 논밭을 태우
니. 누워서도 마음을 졸이던 청암부인은 하루에도 몇 번씩
"저수지, 어떠냐."
메마른 소리로 물었다.
"아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머니.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애써 평온한 낯빛을 지어 여쭙는 이기채의 안색을 청암부인은 미심쩍어 한참씩
바라보았다.
"나를 일으켜라."
뙤약볕이 정수리에 놋젓가락을 꽂는 오뉴월 염천의 한낮, 드디어 더는 참을 수
있었던 그네가 아들 이기채에게 한 마디로 명했다. 그네의 낯빛은 창호지 같았
다.
"어머니. 장정도 다니기 어려운 더위올시다. 궁금하신 일 있으면 저한테 물으시
지요. 무엇이 못 미더우십니까."
기겁을 한 이기채가 반몸을 일으키는 청암부인을 도로 눕혔다.
"내, 가서, 그 물이나 한번 시워언허게 보고 싶어 그런다. 실컷 바라보고 양껏 그
기운을 들이마시면, 내 속도 좀 뚫리고, 빼빼 마른 내 몸도 갈증이 풀릴 것 같어
서. 그래야 내가 살 것 같어."
기어이 다시 일어나 앉는 청암부인의 늙은 눈매에 결연한 빛이 감돌았다. 이기
채는 그 기색에 전율을 느꼈다. 어머니가 서른아홉 그 시절을 생각하고 계시는
구나. 사위는 몸에 스스로, 힘차게 저수지를 파던 그 기를 불러들이려 하시는구
나. 그것은 거역할 수가 없었다. 이기채와 율촌댁이 양쪽에서 부축을 하고, 안서
방네가 양신을 받쳐든 뒤에 안서방이며 하인들이 줄줄이 따라나선 행렬은, 한
걸음 가다쉬고, 한 걸음 가다 또 쉬면서 제방에 올랐다. 순간 청암부인은 악, 아
연하여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쪽은 아미 말라 쩍쩍 갈라진 저수지의 물 밑바닥
이 싯누렇게 뒤집혀 웅덩이를 이루고, 조개바위 등허리는 거무튀튀 빛 바랜 회
색으로 민둥하니 드러나, 덩그런 몸채를 헐벗은 채, 내리쪼이는 햇볕을 피하지
못해 불돌처럼 달구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청암부인은 질린 낯으로 망연히 서
있더니, 무엇인가 어루만지려는 것도 같고, 아니면 무엇인가 붙잡으려는 것도 같
은 손짓으로 휘엇하니 허공을 한 번 젓더니, 그만 누가 떠다민 듯 그대로 쓰러
지고 말았다. 너무나 깊은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그네는 말을 잃어 버렸
다. 반타작도 못했으나 가까스로 거두어 들인 작물들 중에, 제일 좋은 상등급으
로만 골라서 무엇을 좀 잡숫게 해 드리려 해도 소용이 없고, 자르르 기름이 도
는 햅쌀밥이며 담백한 미역국도 마다하였다. 그네는 시름시름 앓는 기색이 짙어
졌다.
"이제는 노환이신데, 저러다가 끝내 자리 보전하시는 것 아닐까."
사람들의 근심도 깊어졌다. 누렇게 바랜 안색으로 청암부인 곁에서 탕제 수발을
드는 율촌댁한테 이기채는 채근하듯, 소홀히 말라, 당부했다. 그 와중에 효원이
회임하였다. 이를 안 부인의 기쁨이라니. 병색이 완연한 청암부인의 온몸에 홀연
생기가 돌고, 누워 있는 시간보다 일어앉은 시간이 훨씬 더 길어졌다. 눈만 뜨면
효원을 찾았다. 오로지 그네는 생의 희망으로 효원의 출산만을 기다렸던 것이다.
그러면서 해가 바뀌었다.
"노인의 병환은 해동할 때 위험하디 않소? 각별히 유념하시구려."
이상한 일이었지만,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엄동설한 겨우네 추위 속에서
도 어찌어찌 버티던 노환자들은, 오히려 날이 풀리면서 힘없이 허물어져 맥을
놓아 버리곤 했다. 마치 얼어서 단단하던 흙의 뼈가 봄 기운에 해토되면서 비글
비글해지듯이. 이개채는 그것을 염려하였다. 천만다행으로 조상이 도우시고 하는
ㄹ이 보살피서 효원이 아들을 낳아, 온 집안에 모처럼 화기만당 훈풍이 돌았응
으나, 그것이 청암부인이 이승에서 누린 잠깐의 마지막 즐거움이었는지도 모른
다. 청천벽력, 뜻밖에도 강모의 '파면' 소식을 들은 청암부인은 충격을 이기지 못
하고 낙망하여 툭, 줄이 끊기듯 아득한 혼수의 벼랑으로 떨어지고 말았던 것이4
다. 청암부인은 홑이불을 덮고 누워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강모는 가슴
복판에 화살이 박히는 것 같았다. 아아, 내가 할머님을 돌아가시게 하는구나. 강
모는 청암부인의 마른 손을 쥐었다. 뼈가 잡혔다. 가냘프고 연약한 잎사귀. 바짝
말라 이미 예전의 모습을 찾을 길 없는 얼굴은, 뼈 위에 그대로 살가죽을 씌워
놓은 것이나 한가지였다. 도도록이 나온 이마와 움푹 들어가 거멓게 죽은 눈자
위, 그리고 날카롭게 솟아오른 양쪽의 광대뼈, 주머니처럼 주름이 잡혀 있는 푸
르고 초라한 입술, 펑하니 뚫려 구멍이 들여다보이는 코. 도대체 그 어디에 부인
의 서릿발과 기품이 남아 있단 말인가. 땀에 젖은 허연 머리칼은 이상하게 섬뜩
하기조차 하였다. (허망한 인생...... 인생 백년이 풀끝에 이슬이라 하더니, 할머니
같으신 어른이 이런 모습으로......) 강모의 가슴 밑창에서 우욱, 설움과 비애가 치
밀어 올라왔다. 남치마에 옥색 저고리를 입고 꽃자줏빛 옷고름을 달아 입던 청
암부인의 모습이 눈에 비칠 듯 생생하여 더욱 서러웠다. 그보다는 이미 노인만
큼이나 쇠잔해 버린 자신의 젊음이 서러웠다. 겹겹으로 두르고, 싸고, 가리운 사
람들의 무게가 겨웠다. 그리고 그 무게를 어쩌지 못하는 자신의 무기력이 서러
웠다. 청암부인이 그렇게도 자신을 짓누르는 존재였던가. 가장 무거운 그 무게가
힘없이 가벼워져 버린 헐렁한 자리에 강모는 목이 메었다. 있는 힘을 다하여 버
티어 그것을 견디어 보려고 했던 자리의 껍질이 터지면서 눈물이 솟구쳐 올랐
다. 심약한 사람. 그는 소리를 안 내려고 어금니를 물었다. 터져라. 차라리 터져
버려라. 창자든지 심장이든지 핏줄이든지 힘대로 터져 나가 나를 파멸시켜라. 강
모는 어금니를 맞물고 울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자신의 소행으로 할머니의 수명
을 재촉하였다는 사실이 혓바닥을 널름거리며 기웃거렸다. 무섭고 두려웠다. 사
실 이기채도 강모의 파면 사건을 겉으로 표내지 않고, 어쩌든지 큰 방에만큼은
안 들리게 하려고 애썼었다. 그러나 청암부인은 그 사실을 알고 말았다. 기동은
제대로 하지 못하였으나 그래도 의식은 희미하게 남아 잇던 청암부인은, 그 말
을 듣고는 한동안 천장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파직이라..."
그 눈빛에 깊은 절망이 어리었다. 그러더니 미간을 모았다. 마치 온 몸의 남은
기력을 기어이 눈으로 모아 보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힘이 드
는 듯 미간을 풀어 버리면서 입시울을 몇 번 움직였다. 무슨 말인가 하려는 것
이 분명하였다. 숨소리로라도 대강 짐작하여 알아들을 수 있었던 그네의 말을
이번에는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어머님, 무슨 말씀 하시려고요?"
율촌댁이 청암부인의 귀에 대고 소리를 지르듯이 물었다. 청암부인은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머니."
이번에는 이기채가 불렀다. 그네의 입모양이 둥그런 시늉을 했다.
"어머님이 강모 찾으시는 거 아닐까요?"
율촌댁이 이기채를 돌아보았다.
"어머니이, 강모 찾으십니까?"
이기채가 청암부인의 귀에 대고 소리를 쳤다. 그러자 그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끄덕이는 시늉이라고 해야 했다. 이기채는 잠시 망연하여 율촌댁을 바라
보았다. 그리고는 다음 순간, 청암부인에게로 눈길을 돌렸을 때는 그네가 이미
의식을 잃어 버리고 만 뒤였다. 사람의 형체라 하는 것은 그야말로 빈 껍데기에
불과하였다. 모습이 눈에 보인다 한들 그것이 무엇이리오. 한낱 나무토막이나 검
불과도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는 중에도 청암부인은 이따금 몇 차례 아주 한순
간이나마 눈을 뜨기도 하고, 한번은 이기채와 몇 마디 말을 나누기도 했었다. 그
러나, 이윽고 곧 혼수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지금, 강모의 울음 소리 때문이었을
까. 청암부인의 눈꺼풀이 실처럼 열렸다. 그리고 한동안 혼곤하여 있었으나, 울
고 있는 것이 강모인 것도 힘겹게 알아보았다.
"...아가... 강모야."
몇 번인가 그네는 강모를 불렀지만 강모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하였다. 청암부인
은 가까스로 손을 뻗쳐 강모의 무릎 위에 얹었다. 그제서야 강모는 놀랐다.
"할머니."
청암부인의 손을 자기도 모르게 움켜잡으며 강모는 그네의 얼굴 가까이에 자기
얼굴을 가져다 댔다.
"저 알어보시겠어요...?"
청암부인은 고개를 끄덕이었다. 그리고 희미하게 웃는 시늉을 하였는데, 그것은
우는 것처럼 찡그려져 보였다.
"할머니."
강모는 무슨 말이 나오지를 않아 청암부인의 손을 감싸 움켜쥐며, 목쉬어 갈라
진 소리로 할머니만을 부를 뿐이었다. 그러면서 이상하게도 자기를 알아보는 할
머니의 흐린 눈빛 속에 자신의 어둠을 반이나 덜어 넣어 버린 것 같은 안도의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일종의 따스함이었다. 할머니와 손자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렇게 바라보기만 하였다.
"... 아가..."
"예, 할머니, 무슨 말씀 하시려고요?"
청암부인은 다시 희미하게 웃었다. 눈귀에 번지는 물기는 노안의 언저리를 적신
다.
"네 아들... 보았어?"
강모는 엉겁결에 고개를 젓는다. 그리고, 조금 전에 사랑채에서 이기채가 벽력같
이 지르던 소리가 되살아나 들리는 것을 지우지 못한다.
"네 이 천하에 막된 놈, 네 놈이 대체 사람이냐? 사내놈이 제 몸뚱이 간수 하나
를 제대로 못하고, 집구석 하나도 평온허게 못 다스리고서는, 뭘 하겠다고 낯바
닥을 치켜들고 나서는 게야. 뭘 하겠다고."
강모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다. 어금니를 지그시 물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
른 뜨거운 기운을 삼킨다. ...너도 이놈 이제는 애비가 아니냐, 너를 보고 애비라
고... 애비... 라고 부르는 어린 것이... 이 집안에 기어다니고 있는데. 그 말을 들
으면서 강모는 어금니 사이에 수치심이 깨물리는 것을 느꼈었다. 그것을 참느라
고 어금니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니 턱이 실룩거려지고, 눈에 자기도 모르게 핏
발이 일어섰었다. ...애비? ... 허어... 애비라고. 자신이 한 어린 것의 애비라고 하
는 사실이 일깨워지자 덜커덕, 덜미가 잡히는 듯하던 순간의 공포와 두려움, 그
부담감이 생생하게 되살아나서 강모는 이기채의 앞인데도 오르르 몸을 떨고 말
았다.
"오월 열이레 순산 득남."
그 전보를 받은 것은 작년, 신사년 초여름이었다. 때는 중하의 절기로 망종도 지
나고 하지를 바라보면서 더위가 땀을 흘리게 하는 반공일의 한나절이었다. 음력
으로는 아직 오월이었지만 양력은 이미 유월 중순을 넘어섰으니, 더위도 점차
약이 차 오르는 날씨였다. 이마 테를 조이면서 머리 속을 후끈후끈하게 하는 맥
고모자를 벗어 내던지며 막 땀을 닦으려는데 하숙의 부인이 강모를 불렀다. 강
모는 아직도, 입학할 때 짐을 풀었던 청수정의 하숙에 그대로 있었다. 졸업을 하
고 부청에 취직을 하였으나 굳이 그런 이유로 다른 곳에 방을 정할 필요가 없는
때문이었다. 그래서 하숙의 부인은 이미 오랜 세월 강모와는 무관하여지고 익숙
해졌다. 뿐만 아니라 보호자처럼 강모를 돌보아 주었다. 어느 때는 보호가 지나
쳐서 성가시게 간섭을 하기까지도 했지만, 강모 역시 그런 것을 언짢게 생각하
지는 않았다. 심지어는 말끝에
"우리 강모."
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들어왔소?"
하숙의 부인이, 막 윗도리를 벗고 있는 강모를 부르며 강모의 방문앞 툇마루에
걸터앉았다.
"아, 예."
강모가 벗기던 단추를 다시 주춤주춤 채우고는 부인을 돌아보자, 그네는 함빡
웃음을 띄우면서 전보 용지를 내밀었다.
"얼마나 좋겠소... 순산에다 득남이니, 이런 경사가 어디 있수."
하숙의 부인이 전보 용지를 먼저 펴 본 모양이었다. 강모는 얼굴이 후끈 달아올
라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아이그, 저 부끄워하는 것 좀 보시지. 턱밑에 수염이 검실거리는데 애기 아부지
된 게 무에 그리 부끄럽누? 더구나 종갓댁 종손에 이대독잔데, 거기다가 터억
아들을 낳아 놨으니, 동네방네 소문 내고 꽹과리를 칠 일이지. 안 그러우? 아들
은 무어 아무나 낳는 줄 알아?"
강모는 제발 부인이 방문을 닫아 주었으면 싶었으나, 하숙의 부인은 그네대로
신통하고 재미가 나서 자꾸만 킥킥, 웃으며 강모를 놀리느 것이었다.
"아이그으, 첨에 우리집 대문간에 책보따리 지고 들어올 때는 애기되렌님, 코밑
에 복숭아털이 보오얗드니만, 어느새 이렇게 세월이 화살같이 지내가서 새서방
님 되시고, 인제는 애기 아부지가 되셨으니, 아 이게 어디 남 일 같어야지. 내가
다 신바람이 나고, 우리 손자 본 것 같드라고. 아까 전보를 척 받는데 이건 내
짐작이 틀림없드라니까. 그래서 내 오늘 저녁은 일부러 색다른 반찬을 좀 장만
했다우."
강모는 뒷목이 뜨끈해졌다. 그리고 온몸의 털이 거꾸로 거슬러 서는 심한 수치
심을 느꼈다. 그것은 자기의 성에 대한 미묘한 껄끄러움이기도 하였다. 아무래도
그는 아직 소년기를 벗지 못한 채 청년기로 접어드는, 한 남자의 어중간한 수줍
음과 어색함을 숨길 수가 없었기 때문이리라. 일종의 자기 혐오라고나 할까. 이
미 중년을 넘어선 여자가 무엇인가를 넘겨다보는 듯한 시선을 그 눈꼬리에 묻히
고 헤실헤실 웃으면서, 아무 거리낌도 없이 '아이 아버지', '아들'과 같은 말들을
떠들고 있을 때, 강모는 구겨쥔 전보 용지를 그네의 면상에 내던지고 싶은 심정
마저도 치밀었다. 그네의 목소리는 끈적끈적하게 강모의 목에 감겼다. ...꼼짝없
이 올가미를 쓰고 말았구나. 그런데 왜 그 순간에 강실이가 떠올랐는지 모를 일
이었다. 선연하지도 않은 모습으로 금방 지워질 듯 그네는 돌아서고 있었다. 그
때, 어둠에 먹히어 그 모습은 보이지도 않는데, 대문에까지 와서 돌아본 오류골
작은집의 사립문에서는 아슴한 불빛이 비치고 있었지. 등롱을 든 강실이는 어둠
이었던가. 그 어둠이 홀로 밝혀 든 등롱의 그 아슴하던 불빛은 강모의 눈언저리
에 그대로 젖어들었다. 그는 불빛이 몸속으로 흘러드는 것을 느끼며 혼곤한 잠
에 빠져들었다.
"새서방님."
전보지를 구겨쥔 채 깜박 잠든 강모는 꿈 속에서 누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새서방님."
그 소리는 좀더 가까이 귀밑에서 들린다. 안서방이다.
"?"
강모는 말없이 안서방을 돌아본다. 안서방은 조심스럽고 죄송한 몸짓으로 두 손
을 비비고 서서 강모의 기색을 살핀다.
"저... 큰마님께서 지달리시는다요."
"알았네."
"대청으 지시는구만요."
"응."
"아까막새부텀..."
강모가 움직일 기미가 안 보이자, 안서방은 말끝을 흐리면서 재촉을 덧붙인다.
강모는 마지못한 듯 몸을 돌려 안채 쪽으로 발을 옮긴다. 꿈속이라서 그랬을까.
할머니 청암부인은 평소의 정정한 근력으로 허리를 세운 모습이었다. 대청에서
는 무릎에 갓난아이를 안은 그네가 흰 모시옷을 입고 안자 만면에 미소를 머금
은 채 강모를 기다리고 있었다. 강모의 눈에 붉은 아이가 들어온다. 싯벌겋게 보
인다.
"어서 오너라, 애비야."
강모는 다시 한번 쇳덩어리를 삼킨 듯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래서 청암부인의
얼굴을 피한다. 그것보다는 그네의 품에 안겨 있는 어린아이에게서 눈을 돌렸다
고 하는 편이 옳았다. 그러나 청암부인은, 모처럼 만난 강모에 대한 반가움과 대
견스러움을 감추지 못하였다. 그래서, 꼬막조개 같은 하얀 주먹으로 눈을 비비는
어린 증손 철재의 등을 다독거리던 그네는
"아가, 애비 왔다."
하고 정말 아이가 알아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야기했다.
"너 애비 보고 싶었지? 제가 이만큼 자랐습니다, 하고 뵈어 드리고 싶었지? 아
이구, 내 새끼, 오냐, 오냐, 이 할미가 너를 애비한테 문안드려 주마."
청암부인은 고개를 외로 돌리고 앉아 있는 강모를 향하여 웃어 보인다. 그러더
니 안고 있던 어린 것을 번쩍 들어올려 강모에게 안겨 준다. 물컹. 살덩어리가
강모의 무릎에 안겨오자 강모는 자기도 모르게 진저리를 쳤다. 엉겁결에 어린
것의 몸뚱이를 받아 안은 강모의 두 손이 경직되며, 아이를 밀어낸다.
"좀 들여다봐라. 어찌 그리도 신통하게 보면 볼수록 애비를 닮았는지, 할미는 아
주 너를 새로 키우는 심정이란다. 생각사록 천지신명과 조상의 음덕에 감축 감
읍할 일이 아니냐? 너도 객지에서 공부하느라고 고생이 많었지. 네 안도 층층시
하에 시집 살고, 오뉴월 복더위에 애기 키우노라 고생이 많다. 이따가 네가 위로
도 좀 해 주고 그래라. 그저 여자란 남편 말 한 마디가 녹용 보약보단 낫느니
라."
강모는 대답이 없다. 눅눅한 더운 공기가 대청을 누른다. 무릎에 안긴 어린 것은
아무래도 품이 낯설고 불편한지 자꾸만 고무락거린다. 그 감촉이 살갗에 스멀거
린다. 그때 아기가 영문 모를 소리를 어, 어, 내면서 제 아비의 목에 팔을 휘감
는다. ... 아아, 올가미. 강모는 목에 찰싹 감긴 어린 팔을 풀어내려고 손을 올린
다. 아이는 필사적으로 매달린다. 구렁이같이 칭칭 감긴다. 숨이 막힌다. 헉. 그
꿈은 그러다가 깨어났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꿈에서 깬 강모의 심정은 더욱
더 암담하게 어두워졌지만 그는 망연히 앉아만 있었다. 그리고 생시처럼 아이를
둘러싸고 앉은 율촌댁, 이기채, 청암부인의 노안이 차례로 겹치면서 뒤죽박죽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때 효원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얼굴이 떠오르자 별안간
강모는 가슴을 깨물린 듯한 통증을 느꼈다. 마치 이빨 하나가 가슴에 박힌 것
같은 얼얼하고도 깊은 아픔이었다. 강모는 지금 모처럼만에 의식이 돌아온 청암
부인을 바라보면서, 그 때의 꿈과 아픔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낀다. 청암부인의
병세가 눈에 띄게 좋아지던 것은 재작년 겨울이었다. 보통 노인들이 실섭을 하
면 호된 추위와 바람 때문에 겨울에 더욱 힘이 들어지는 법이언만, 그네의 겨우
에는 달랐다.
"어서어서 볼이 와야지. 그래야 여름이 오느니."
그 봄과 여름이란, 이제 태어날 어린아니가 먹고 크는 세월이었다. 얼마나 대견
하고 거룩한 남과 밤인가. 이 낮과 밤의 시간이 흐르고 해와 달이 바뀌는 순리
를 따르면 이 집안에 새 생명이 난다. 청암부인은 자신이 몸을 추스르지 않으면
온 집안의 공기가 무거워 손부 효원의 심정이 짓눌릴 것을 염려하였다. 청암부
인은 마치 효원의 태교를 대신하려는 것처럼, 스스로 정신을 수습하기 위하여
온몸의 힘을 있는 대로 모았다. 얼굴도 찌푸리지 않았으며, 병색으로 누렇게 바
랜 낯을 아침 저녁 깨끗이 소세하여, 머리 빗고, 옷차림을 단정히 하였다. 어지
간만 하면 자리에 눕지 않고 꼿꼿이 앉아, 오로지 생남 순산을 빌었다. 그러다가
태어난 증손이었다. 작년 오월 십칠일, 오시. 한낮의 한가운데 하이얀 햇볕의 폭
을 가르며, 응아아아, 갓태어난 어린 것의 울음 소리가 터질 때, 청암부인은 소
리 없이 낙루하였다. 아, 저 소리. 내가 한세상을 기다려 온 소리. 이 세상에서
가장 여리고, 가장 힘 있는 소리. 청암부인은 밤이 허옇게 새어 버릴 때까지 잠
을 이루지 못하였다. 아직 움직일 수가 없는 손부가 바람을 쐬면 안되는지라, 아
기를 보고 싶은 그네는 대청마루를 건너 건넌방으로 가는 것만이 유일한 희열이
었다. 건넌방 안에서는 급히 일어서는 부스럭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린다. 아
직 한여름은 아니라도 벌서 후텁지근한 여름 기운을 머금고 있는 날씨라 웬만하
면 장지문 정도는 열어 둘 만한데, 방안에는 더운 김이차 있다. 이제 겨우 세이
레를 넘긴 어린아이 때문이었다. 아이의 희고 둥근 얼굴에 복숭아 꽃빛이 발그
레 물들어 있다. 새액색 숨소리가 고른데, 명주 이불 바깥으로 고사리 같은 주먹
을 앙징스럽게 쥔 손이 나와 있다. 청암부인의 얼굴에 일순 환한 웃음이 떠오르
며 한숨이 새어 나온다. 효원은 청암부인이 앉기를 기다려 웃목에 서서 아이를
내려다본다.
"앉아라."
부인은 효원에게 손짓을 하며 아이의 옆에 앉는다. 보면 볼수록 영락없는 고사
리 같기만 하고 앙징스럽다. 청암부인의 엄지손가락만큼 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작은 주먹은, 손가락들이 안으로 도르르 말려 있었다. 거기다 어쩌면 그렇게 눈
꼽만큼씩한 손톱은 또 제대로 격식을 갖추어 생겨 나 있는지. 그 비늘같이 얇고
조그만 손톱에 분홍빙이 돌고 있다. 그것도 손가락이라고 마디가 다 있다. 마디
에는 자잘한 주름까지 잡혀 있다. 하나하나 세어 보고 싶을 지경으로 그 마디들
은 재미있고 귀엽다. 잠들어 잇지만 않다면 단풍의 어린 잎사귀 같은 이 손바닥
의 손금까지도 들여다볼 수 있으련만, 청암부인은 바람이 일지 않게 가만히 이
불자락을 들어올려 조그만 발을 본다. 완두콩 같은 발가락들이 조르르 달려있는
것을 보던 청암부인은 그만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아가, 신기하지 않으냐? 이 모습이 얼마나 어여쁘냐. 참으로 신비하지? 어디서
왔을꼬...?"
조금전 창씨 문제로 큰방에서 이기채 형제와 나누었던 무거운 이야기들이 순식
간에 잊혀지고 어린 증손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청암부인은 속으로, 이 증손이
어떤 증손이냐, 싶은 생각이 사무쳐 왔다.
"이 귀한 내 손자한테 왜 이씨 성을 못 붙인단 말이냐. 이 할미가 꼭 그것만은
지켜줄 테다. 아무도 네 성은 못 뺏어간다."
청암부인은 잠든 아기의 작은 주먹을 소중하게 두 손으로 감싸며, 주름진 늙은
뺨을 꽃잎같이 보드라운 어린 뺨에 가만히 대 보았다.
"네가 네 성은 꼭 다시 찾아 줄 것이다."
그러는 청암부인의 모습을 효원은 말없이 바라본다. 아들 철재가 잠들어 있을
때를 빼고는, 청암부인이 그 무릎에서 아기를 내려놓지 않기 때문에 효원으로서
는 감히 언제 아기와 방긋거릴 틈도 없었다. 그러나 조금도 서운하지 않았다. 오
히려 마음이 놓이고 청암부인과 자기 사이에 보이지 않는 맥이 서로 따뜻하게
흘러드는 것을 느낀다. 피도 살도 섞이지 않았으나, 자신이 집안의 줄기를 잇는
한 마디라고 하는 것이 실감되었다. 그것은 뿌듯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상한 일
이었다. 생각할수록 꿈 같은 아들 철재의 고물거리는 손가락 발가락을 통하여
얻는 뿌듯함과는 상관없이, 이 어린 것의 아비인 강모에 대해서는 차가운 치욕
의 감정을 지워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부부가 혼인하여 세월이 흐르면 당연히
어버이로 변하는 것이언만, 아무리 되짚어 보아도 철재의 탄생은 뜻밖이었다. 지
난 경진년 여름, 괭괭거리는 삼경의 징소리와 독경 소리에 잠을 못 이루던 밤,
남편 강모는 느닷없이 벌컥 장지문을 열어젖혔었다. 그때 그의 모습은 무엇에
쫓기는 것도 같았고, 어찌 보면 성난 짐승과도 같았었다. 때가 여름인지라 몹시
무더웠었다. 방안에 고인 등장 불빛마저도 더운 김이 더하여 살갗에 감겨드는
것이 끕끕하게 여겨졌었다. (무슨 풀지 못할 심정으로 사무쳤기에 젊은 나이에
사람이 상사로 죽어간단 말인가. 아무리 정애가 깊다기로 목숨이 빠질까. 한번
죽어버린 사람을 위해서 넋을 불러 굿을 하고 혼례를 시키는 것도 헛짓이려니
와, 되지도 않을 일에 뜻을 두고 괴로워하는 그 시초부터가 잘못이라. 사리 분별
있는 사람이라면 살 궁리를 해야지, 죽기로 작정을 하다니. 어리석은 일이다.) 효
원은, 자신이 시집도 오기 전에 세상을 버린 한 총각의 혼백을 두고 혀를 찼다.
(애초에 세상살이 견디기 쉬운 것이었다면, 부처님은 무엇 하러 왕궁을 버리고
얼음 골짜기에서 뼈를 깎었으리. 오죽하면 인생은 고해라 하지 않던가. 사람마다
남 보기는 호강스러워도 저 혼자 앉어 있을 때의 근심고초란 짐작도 못하는 법.
어떻게든지 그것을 이겨내고 버티면서 제 할 일을 해야 한다. 산다는 것은, 그저
타고난 본능만은 아니지. 그것은 일이야. 일이고말고. 살아도 그만 안살아도 그
만일 수는 없지. 뜻한 것이 이루어지고 재미있고 좋아서만 사는 것이랴. 고비고
비 이렇게 산 넘고 물 건너며 제 할 일을 하는 것이 곧 사는 것이다.) 밤새도록
그칠 것 같지 않은 굿의 중허리가 휘어지는 소리에 심중이 어수선하여 일손도
더디었다. 본디 여름에는 손에 땀이 나서 침선은 하지 않는다. 다만 날마다 벗어
내놓는 삼베 모시의 푸새거리를 다듬고 밟고 다리는 것이 큰일이었다. 효원은
청암부인의 옷가지를 접어 개키는 중이라서 더욱 그렇게 산란하였는지도 모른
다. 날마다 흥건하게 젖어 나오는 적삼과 단속곳들이 부인의 허약해진 기력을
대신 말해 주는 것만 같았다. 손을 베게 날이 선 치마 저고리를 날아가게 입고
앉아 있던 부인이, 더위와 식은땀에 후줄근히 녹아 내리는 모습을 그네는 의복
에서 느끼는 것이다. (어떻게든 기운을 차리셔야 할텐데.) 효원은 이미 불이 꺼
진 큰방 쪽에 마음을 기울이며 적삼의 솔기를 손톱으로 눌러 펴고 있었다.
그때 강모가 들이닥친 것이다. 그는 효원이 미처 일감을 치우기도 전에 사나운
몸짓으로 물어뜯을 듯이 그네를 덮쳤다. (아니, 이 사람이.) 효원은 무의식중에
그를 밀어냈다. 무슨 거역을 하겠다든가 마땅치 않아서가 아니었다. 너무나 갑작
스럽게 들이닥친 강모의 행동이 일변 어이없고, 한편으로는 당황했기 때문이었
다. 그것은, 평상시의 강모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난폭함에 놀란 탓이었는지도 모
른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했다. 그네는 알 수 없는 모욕감
에 휩싸였던 것이다. (나야 제 사람이니 언제라도 하란 대로 할 수밖에 없는 노
릇이지만.) 효원은 그렇게 생각은 하면서도 힘대로 강모를 밀어내며 바람벽에 등
을 버티고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치맛자락을 감아쥐었다.
"왜 이러시오?"
이것이 그네의 말이었다. (불도 안 끄고...) 효원의 눈에 등잔불이 들어왔다. 새
혓바닥 같은 불꼬리가 펄럭, 흔들리더니 긴 그을음이 실처럼 오른다. 그네는 지
금 강모가 본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어디 바깥에서 있다 오
는 야기가 옷갈피에서 스며나오고, 무엇보다 그는 허탈해 보였다. 그런데도, 그
는 효원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눈초리는 마치 자기 먹이를 채가려는 사람을 향
하여 으르렁거리는 것과도 같은 노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적의조차도 느껴지
는 눈빛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팽팽한 침묵이 차 올랐다. 침묵이 부풀면서 서
늘한 식은땀이 돋아난다. 이러리라고는 짐작하지 못한 효원이었다. 순리대로 이
루어질 일에 대하여 이렇게 쫓기듯 서두르는 강모의 속마음을 알지 못하는 효원
은 묘한 앙심을 느꼈다. (몇 년 몇 달을 두고 증오나 하듯이 팽개치고 돌아보지
도 않더니, 무슨 까닭으로 이 밤에 이러는가. 필경 곡절이 있을 것이다. 아무래
도 예삿일은 아니다. 순탄한 양기라면 이와 같으리. 내 아무리 규방에서 보고 들
은 것이 없이 살아왔고, 시집이라고 와서도 하릴없이 지내왔단들 이만한 짐작도
못할 것인가.) 그것은 그렇다고 하자. 그러나, 효원으로서는 이런 식으로 느닷없
는 일을 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네의 머리 속에는 아직도 반닫이 장롱 속에
접힌 채로 있는 삼팔주 명주 수건이 허옇게 펄럭였다.
"소용이 있으리라."
고만 말하며 접어 넣어 주던 어머니 정씨부인의 모습도 지나갔다. 그러면서 순
간 청사등롱과 사모관대, 나무기러기, 청홍의 이부자리며 마당에서 들리던 낭랑
한 웃음 소리들이 환각인 듯 떠올랐다. 위로는 천지신명과 부모님을 비롯하여
아래로는 토방 위의 강아지까지도 한 마음으로 복을 빌어 주던 밤이었다. 그런
밤에 효원은 가슴을 동여맨 대대마저도 풀지 못한 채 꼬박 앉아서 밝혔다. 그때
의 암담하던 답답함이 새삼스럽게 치받쳤다. 그 모든 밤을 다 헛되이 내버리고,
야합도 아닌데 무엇이 급하고 무엇이 무서워서 그렇게 서두르는가. 효원의 머리
가 물로 씻은 듯 차갑게 가라앉으며 몸이 굳어졌다. (오늘 밤에는 절대로 안된
다.) 왜 그렇게 단단한 결심을 하였을까. 그네는 어금니까지 시퍼렇게 물었다. 그
러나 스스로에게 이르는 그 말을 채 맺기도 전에 그네의 어금니가 벌어지고 말
았다.
"아."
톱니가 살 속에 박히는 것 같은 아픔이 몸의 한가운데로 날카로운 금을 긋고 지
나갔다. 그것은 겁간이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절차도 짓뭉갠 채 당해 버린 일
끝에, 그네가 맛 본것은 무참한 쓰라림뿐이었다. 텅 빈 가슴이 식어 내리면서 눈
자위에 뜻 모를 눈물이 번지는 것을 그네는 간신히 참아냈다. 토할 길 없는 시
커먼 돌덩어리 하나를 삼킨 것 같은 무거움이 그네를 누르기도 하였다. 효원은
그날 뜬 눈으로 앉아서 밤을 새웠다. 그런데 하늘의 섭리란 참으로 오묘하고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효원의 육신 한 구석에 박힌 증오의 옹이에서 생명이
자라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삶의 현상이란 저희들끼리 저절로 아우러지고, 서
로 독을 풀고, 스스로 갚아 나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철재 때문에라도 창씨개명은 안했어야 하는 것을."
청암부인은 핏덩이 증손자를 내려다보며 탄식하였다. 그것은 참을래야 참을 길
이 없는 통분함이었고 설움이었다. 그리고 이제 막 태어난 어린 것에 대한 깊은
부끄러움이기도 했다.
"내 어찌 이것한테 할미 소리를 바랄 수 있겠느냐. 성씨 하나도 물려주지 못하는
주제에 할미는 무슨..."
부인은 손부 효원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주며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부인의
목소리에도 땀이 배어났다.
"이 아이가 어떻게 해서 태어난 종손인데 이씨 성을 못 붙인단 말이냐. 이제야
내가 이 집안에 들어온 보람을 다 했는데, 나라에 죄진 일도 없이 하루아침에
성을 뺏기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이 아이 하나가 태어나 주어서 나는
가문에 대한 도리를 다 하였다. 이제 구천에 돌아가 짐드신 조상님을 뵙더라도
이만하면 떳떳하다 싶었는데... 느닷없이 하루아침에 성씨를 빼앗기고 말았으니."
청암부인은 말끝을 맺지 못하며, 비분을 누르고 잠든 아기 철재의 조그만 주먹
을 가만히 잡는다. 여리고 봉긋한 봉오리 같은 주먹. 생각하면 지나간 세월이 꿈
결만 같다. 그 세월의 모든 고비와 질곡, 무서운 집념들이 모두 이 한 점의 생명
을 위하여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비로소, 천방지축 어지럽고 정신없던
나날들과, 편한 잠을 깊이 못 들고 항상 꼿꼿이 허리를 펴고 살아왔던 한세상의
기나긴 긴장이 풀리는 것도 같았다. 이 어린 생명 하나로 인한 평화로움은, 이미
죽은 선대의 선영과 지금 살고 있는 이 집안의 가솔들, 그리고 이제 다시 면면
히 이어질 후손들이 한마당에 모여 앉는 잔치 자리의 흥겨움이라고나 할까. 그
것은 이제 물길이 제대로 잡히고 순하게 흘러가게 되었다는 깊은 안도감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청암부인은 가까스로 몸을 움직이면서도 뿌듯하고 그득
한 마음을 가누지 못하여, 불현듯 건넌방으로 건너오곤 하였다. 다만 애석하고
애석한 것은 창씨의 일이었다. 이런 심정은 일흔두 살 청암부인이, 사십칠 년
전, 이기채를 양자로 들여왔을 때하고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이기채를 품안에
받아 안았을 때, 스물다섯 살, 청상의 양모, 청암부인은 울컥 설움이 받쳐 올랐
었다. 어머니라는 호칭에도 가슴이 덜컥 하였거니와, 무릎에 안긴 아기의 살덩어
리가 가슴에 그대로 얹히는 듯 싶었었다. 내 무슨 운명으로... 젊은 청암부인은,
가슴에서 고무락거리는 어린 이기채를 방바닥으로 내려놓았다. 형언할 길 없는
낯설음과 이상한 수치심에 얼굴이 붉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불안하였다. 그
때 느꼈던 수치심과 불안은 그 뒤로도 아이가 웬만큼 자라도록까지 내내 가슴의
갈피 사이에 끼워진 채, 밖으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청암부인과 이기채의 사
이에 남모르는 어려움을 만들게도 하였다. 그럴수록 청암부인은 이기채에 대한
의무를 다하였다.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헤아려 준 사람은 보쌈마님 김씨부인이
었다. 김씨부인은 별로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궂은 운명 때문이었는지
천성 때문이었는지 모를 일이나, 나중에 쉰을 조금 넘기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도 웃는 얼굴을 보인 일이 몇 번 없었다. 몇 번이라고 하지만 그 또한 소리 내
어 웃은 것이 아니라 그저 잠시 미소를 지은 정도였다. 그 대신 잠시도 가만히
앉아 있지 않고 마루며 헛간이며 뒤안 마당과 텃밭을, 지성으로 쓸고, 닦고, 일
구고 하였다.
"집안에 사람 훈김 있는 것만도 고마운 일이어서..."
가끔 그네는 청암부인에게 낮은 소리로 말했다. 그것은 청암부인도 마찬가지였
다. 노복과 여비를 따로 둘 수 없었던 그때의 형편에 두 여인이 서로 의지하였
던 심정이란 기구하면서도, 그 만큼 절실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기채가 양자로
왔었다.
"애기 울음 소리란 참으로 기묘한 것이오. 청상에 두 과부만 우두커니 마주보고
살다가 이렇게 아들이 집안으로 들어오니, 갑자기 생기가 나고 재미도 절로 있
지 않소?"
김씨부인은 생전에 보여 준 몇 번의 웃음을 그때 웃었다. 처음으로 아기를 안고
잠들던 밤. 만가지 감회가 착잡한 가운데도 양모가 된 청암부인은 두려움을 가
누기 어려웠다. 어쩌면 자신의 속에서 자라나 자신이 낳았다면 그런 것을 느끼
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우선 아기를 안는 팔이 부드럽게 펴지지 않고 나무 막대
기처럼 딱딱했다. 그리고 품안에 묻힌 어린 것이 주둥이를 쫑긋거리며 어미의
젖을 찾는 시늉하는 것을 바라본 순간, 그네는 (어찌할꼬.) 싶은 망연함에 사로
잡혔다. 그리고 뒤미처 무거운 짐을 맡았다는 것을 실감했다. 내려놓을 수도 없
고, 함부로 들쳐 업거나 이고 갈 수도 없는 짐. 온몸의 정신을 한자리에 모아 소
중하게 지켜야 하는 짐. 그렇다고 울타리 두르고 겹겹히 감고 싸서 감추어 두는
것만으로 할 일을 다하는 것이랴. 이 어린 것을 한 가문의 뼈대 있는 종손으로
길러 내야만 한다. 그래서 스스로 일으킨 몸을 기둥처럼 세우고, 온 문중에 그늘
을 드리우게 해 주어야 한다. 그런 날을 바라고 이 주먹만한 어린 것을 키워가
야 하는 것이다. (지푸라기로 대들보를 만들어야 하니, 그 일이 내 업이라.) 청암
부인은 한숨을 고쳐 쉬었다. (내 마음이 어미 될 준비가 전혀 없는데, 비록 핏덩
이 어린 소견이라 한들 나를 어미라 여기겠는가. 어린아이 세 살 이전에는 천지
조화의 무궁한 법칙과 자신의 앞날 운명까지도 다 예견한다는데, 내 행여라도
저를 짐스럽게 여긴다면 그 죄를 내가 받지.) 아무리 말 못하는 어린 아기이지
만, 이제 이미 모자의 인연을 맺어 한 품에 안고 안기게 되었으니, 어찌하든 어
미된 자의 행실과 심덕을 먼저 배우고 갖추리라. 그네는 속으로 다짐했다. 때 맞
추어 늑대가 바로 귀밑에서 아후 우으응 길게 울었다. 달구새끼, 토끼는 물론이
고 허술한 외양간의 송아지도 물어가는 늑대의 울음 소리였다. 그네는 흠칫 놀
라 저도 모르게 이불자락을 끌어당겨 아이를 감싸며 온몸으로 끌어안았다. 김씨
부인 역시 아이를 생산해 보지 못한 여인이었는데 본디 성품이 무던한 탓인지,
아니면 나이가 가르친 것인지, 청암부인보다는 훨씬 손놀림이 수월하고 자상했
다.
"왜 그런 말 있지 않습니까? 꿈에 애기를 보면 깨고 나서 근심질 일이 생긴다
고. 애기라는 것이 그만큼 애물이라는 뜻일 게요. 잠시 잠깐도 헛눈 팔면 안되
고, 너무나 애중히 섬겨도 안되고, 강아지나 풀나무 같이 저절로 크는 것도 아니
고."
김씨부인은 마치 아이를 길러 본 사람처럼 그렇게 말하지도 했다.
"그래도 삼신할머니가 보듬고 키워 주시니 그 힘으로 사람되는 게지, 그게 어디
인력만으로 크겠소?"
그 말은 맞는 것 같았다. 삼라만상에 다 지켜 주는 신령이 있지 않은가. 물에 가
면 물귀신이 있고, 산에 가면 산신령이 계시고, 부엌에 가면 조왕신이 집안을 지
킨다. 그뿐인가. 하늘에는 일월성신, 땅에는 지신이 있어 천지의 기운을 조화롭
게 다스린다. 심지어는 닳아빠진 부지깽이조차도 오래 쓰면 넋이 생겨 아무 데
나 버려서는 안된다. 막대기 하나도 사람 손에 길들여지면 한밤중에 파랗게 불
꽃을 일으키는데, 하물며 목숨 있는 것들이랴. 그 중에도 영물 중의 영물이라는
사람은 일러 무엇 하리. 그러나 이기채는 몸이 약했다. (저것이 어미 젖도 채 떨
어지기 전에 나한테로 와 그런가. 무어니 무어니 해도 짐승이나 사람이나 젖을
배불리 먹어야 성정도 온순하고 체구도 튼실한 것을. 제 아무리 정성으로 먹인
다 한들 암죽이 어찌 젖만하랴. 내가 혹여 저것한테 죄 지은 것이나 아닌가.) 얼
굴빛이 노르께한데다가 도무지 살이 오르지 않는 이기채는 이미 그때부터도 깐
깐한 성격을 감추지 못했다. 청암부인은 이기채의 생모 보기가 몹시도 무안하였
다. 공연히 눈치가 보였던 것이다.
"형님도 참 별 말씀을 다 허십니다. 아이가 실하고 부실한 것이 어찌 키우기 탓
인가요? 본디 제가 그렇게 타고난 것이지요. 제 품에서 컸다고 지금보다 무에
더 나아지겠는가요? 잘 먹지도 못하는 에미 젖이 암죽보다 나을 게 무에 있을라
고요?"
"내가 죄가 많은 사람이라 그런 생각이 들었네."
"그런 말씀은 차후에도 하지 마서요. 기채가 어디 제 아들인가요. 형님 정성으로
이만이나 컸는데 아직도 빌려온 자식 같으신가 보네요. 요새는 저도 기표란 놈
때문에 치다꺼리할 일이 하도 많아, 아이고. 형님이 내 대신에 기채 기르시노라
고 얼마나 노심하실까, 외나 제가 죄송하드구만요."
"그리 말해 주니 내 고맙네."
"형님, 저한테는 기표가 큰놈이에요. 기채 낳을 때 어쨌는지는 생각도 안나고, 시
방은 새집이로 서툴러요."
청암부인은 손아래 동서 이울댁의 말에 위안을 얻기는 했지만, 마음이 아주 놓
이는 것은 아니었다. 한 뱃속에서 나온 두 아들이건만 자기에게로 양자 온 기채
는 그렇게 약질로 애간장을 녹이는데, 그와는 달리 생모 품에서 크는 기표는 아
직 돌도 지나지 않았는데 세 살 터울인 제 형의 몸집에 맞먹을 만큼 크고 충실
했던 것이다. 그것이 청암부인에게는 민망하고 애석하게 느껴졌다. 그럴수록 그
네는 이기채의 담력을 길러 주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또 하나, 청암부인의
마음 한쪽에 웅크린 채 도사리고 있는 근심은, 바로 죽음이었다. 그것은 한 번도
입 밖에 내본 일이 없는 말이었으며 내색조차도 한 일 없었지만, 이기채를 무릎
에 받아 안는 순간부터 그네의 마음에 덜컥 내려앉은 생각이었다. 이제 막 고물
거리는 어린 것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바라볼 때 그 암담함은 더욱 깊어졌다. (저
손이 크고, 저 발이 자라서 과연 장정이 되어 줄 것인가.) 참으로 사위스러운 생
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그네는 머리를 저었다. 그러나 암죽을 떼고 밥숟가
락을 거꾸로 쥔 채 밥상 앞에 앉은 세살바기 이기채의 왜소한 몸집을 내려다보
면, 숨어 있던 불안이 거멓게 밀려왔다. 그 까닭이 무엇인지를 그네는 헤아릴 수
가 없었다. 그러던 하루 김씨부인이 무심히 반짇고리를 밀어내며 말했다.
"사람 사는 일이 한바탕 개미꿈이라드니, 나도 이제 늙어가는가."
"그런 말씀은 왜 허시는가요?"
"정신이 아물아물, 무얼 봐도 마음에 남지를 않고 헛본 것같을 때가 많아져서 안
그렇소..."
"몸이 허하신가 봅니다."
"그렇기도 허겠지. 나도 나이 삼십 중반을 넘긴 지 몇 해나 됐으니 이제 중늙은
이 아니요?"
중늙은이. 아닌 게 아니라 김씨부인의 겉모습은 염려하다거나 살빛이 두드러지
는 편이 못되었다. 어느덧 처음 보쌈으로 업혀왔을 때 와는 사뭇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다.
"어느 때 문득 생각해 보면 내가 흙덩어리 같기도 하고, 나무토막 같기도 하고.
무심하기는 내 몸뚱이나 흙이나 나무토막이나, 하나 다를 게 없는 것 같소. 아마
나는 넋이 진즉에 빠져 나간 모양이요. 남어 있는 것은 형상뿐이고, 빈 집이나
매한가지라. 앞뒤 문짝 다 열어젖혀 놓고 바람이나 지나갈까, 누가 나를 채워 주
겠소...?"
김씨부인은 실패에 실을 감을 양으로 다시 반짇고리를 끌어당겼다.
"그래도 내가 청춘을 서러워 않고 세월이 가잔 대로 쉽게 쉽게 따라 늙는 것은,
초상을 두 번이나 치러서 그러는가 싶소. 참 이상한 일이지. 처음에 뜻밖의 일을
당허고는 그 양반만 죽은 것이 아니라 나도 죽은 것 같습니다. 그러고 마당에
왔다갔다 하는 문상객이며 사람들이 모두 허깨비로 뵈는 것이었소. 내, 그 경황
중에도 속으로 그랬지. 사람이 살었달 것이 없는데, 저 사람들은 자기들이 살어
있는 줄 아는가 보다. 마치 움직이는 그 사람들이 흐늘흐늘 망혼들 같았으니. 그
러다가 두번째로 보쌈까지 와서도 또 궂은 일을 당허지 않었소...? 그때는 정말
로 이가 시립디다. 내 기구한 팔자를 서러워할 겨를도 없이 그만 살이 얼어붙어
버린 게요."
한참 동안 김씨부인은 말을 잇지 못하고 묵묵히 실패에 실만 감았다. 청암부인
도 실타래를 감고 있는 두 손목이 뻑뻑해지도록 입을 열지 않고 다음 말을 기다
렸다. 웬일인지 그 말은 김씨부인의 가슴 속에 가장 무겁게 얹혀 잇는 말일 것
만 같아서였다.
"사람은 뼈와 살로 되어 있으니, 뼈로는 일을 하고, 살로는 정을 나누는 것인가
싶습니다. 헌데 나는 이미 살이 식은 사람이 아니요? 그러니 무슨 청춘이 한될
일이 있겠소...?"
김씨부인이 감는 실꾸리에 한숨이 감긴다. (살이 식은 사람.) 청암부인은 김씨부
인의 말을 되받아 속으로 뇐다. 그렇게 말하는 김씨부인의 얼굴은 단단하게 굳
어 있었다. (때 맞추어 저절로 식어 준다면 그 또한 다행한 일이다. 끓어 넘치는
국물도 다 시간이 가면 미지근해지고, 더 두면 썰렁해지는 법. 사람이라고 다르
랴. 허나, 그렇게 식기까지 기다릴 수조차도 없어서 입김으로 불고 부채질로 찬
바람을 일으키어 서둘러 식히는 일도 더러는 있다. 우리 두 사람 마주보고 앉아
서로의 기구한 명운을 탄식하고는 있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사람의 몸이란 살로
만 되어 있지는 않은 것. 뼈로는 일을 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내 비록, 더불어
정을 나눌 사람이 없어 그쪽으로는 죽은 목숨이나 진배 없으나, 아직은 뼈가 젊
으니 일을 해야지. 아마도 이 할 일 많은 가문에 들어온 내가 헛눈 팔까 보아
이렇게 홀로 버티게 한 것 같구나. 감축하옵게도 기채를 양자로 주셨으니 정성
으로 기르리라.) 그렇게 다짐을 다시 한번 해 보이는 청암부인이 지우지 못한 그
림자는 신랑 준의였다. 그리고 마음의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불안은 다름아니라
그 그림자의 그늘이었던 것을 깨닫는다. (박복한 두 여인네의 품안에 어린 생명
을 맡기려 들어온 기채가, 혹시라도 부정을 타지는 않을까. 보쌈마님 김씨부인이
타고난 운명은 더 말할 것도 없고, 나 또한 소년과부로 남 사는 세상을 못 사는
사람. 행여, 이 거센 운수에 짓눌려 기채가 다치지는 않을 것인가.) 그러나 입 밖
에 내서 말을 할 수는 더욱 없는 노릇이었다. 그네는 말에 정령이 붙어 있다는
것을 믿었다. 그래서 결코 함부로 무슨 말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속 깊은 곳
에 지나가는 생각조차도 불길한 것은 황급하게 털어내 버리는 것이었다. (아무리
안하려 안하려 해도 떠오르는 이 생각은, 무엇 때문인가.) 결국 청암부인은, 피하
여 달아나던 생각에 덜미를 잡히고 만다. (저것도 요절을 해 버리면 어쩌나... 정
성으로 길러서 열 살을 넘기고 열다섯을 넘긴다 한들, 열여섯의 꽃다운 나이에
덧없이 죽어가면 그 노릇을 어찌할 꼬 누구는 죽고 싶어 죽겠는가. 하늘이 주신
명이 그뿐이면 어쩌랴. 이 집안의 운이 비색하여 모두 선대에서 단명하였는데,
이 아이라고 벗어날 수 있을까. 더욱이 이와 같이 음침한 기운이 집안에 아직도
고여 있는데.) 청암부인도 말도 못할 두려움에 숨을 죽였다. 어디 가서 속 시원
한 언약을 받을 곳도 없었으며 그렇다고 무거운 속을 털어내 놓을 곳도 없었다.
돌아보면 첩첩산중이고 올려다보면 텅 빈 하늘뿐이었다. (세상에 막막하기 나와
같은 사람이 또 있을까. 김씨부인이 곁에 있다 하나 그는 나와는 또 다르다. 막
말로 그 양반은 이제 죽으나 내일 죽으나 거칠 것이 없는 사람. 남의 자식을 내
자식으로 받아 안은 나보다는 그래도 가볍다.) 천지에 의지할 곳 없다는 생각이
등골에 사무치며 오르르 몸이 떨렸다. 그 순간 청암부인은 자기도 모르게 주먹
을 움켜쥐었다. (내 홀로 내 뼈를 일으키리라.) 인력이 자극하면 천재를 면하나
니. 이 뼈가 우뚝 서서 뿌리를 뻗으면 기둥인들 되지 못하랴. 무성하게 가지 뻗
으면 지붕인들 되지 못하랴. 그네는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놀고 있는 양자 기채를 서리 맺힌 눈매로 바라보았다. 기채는 세 살 버릇 그대
로 밥숟가락을 수북하게 해 본 일 없이 마디게 자라났다. 그는 밥만이 아니라
다른 군것질도 거의 하지 않는 편이었다. 명절이면 색다르게 준비되는 음식들도
손가락 끝으로 한 점 떼어먹는 시늉만 할 뿐, 상을 밀어내면 그뿐이었다.
"아가. 이 엿 좀 먹어 봐라. 이것저것 잘 먹지도 않는데 허기지겄다. 이런 엿은
입에다 넣고만 있으면 저절로 안 녹냐? 먹는 데 힘들 것도 없겠구마는."
청암부인이 애가 닳아 모반에 엿을 담아 내주어도 어린 기채는 기껏 한 조각 정
도만 맛을 보았다.
"입에서는 달고, 뱃속에 들어가면 빈 속에 진기도 있을 텐데."
노르께한 낯빛으로 앉아 있는 이기채를 온갖 말로 달래어 겨우 한 조각을 더 먹
이고 나서
"그럼 무엇 해주랴?"
하고 물어도 고개를 흔들었다.
"먹어야 크지."
그런 근심이 늘 가슴에 얹혀 있는 중에도 이기채는 무사히 열다섯을 넘기고, 열
여섯도 넘기고, 작배도 하였다. 열여섯 나이 탓에 죽은 것도 아니었지만, 하도
꿈속같이 어이없는 변고를 당한 포한이 기가 막혀, 청암부인은 아무리 급해도
기채만은 스무 살을 다 채워 치혼하리라, 결심했었다. 안 그래도 어려서부터 남
달리 조심스러운 기채가 성년으로 실해지기도 전에 장가들어 안팎으로 과중한
부담을 지게 되면, 다음 일을 누가 알리야. 그래서 그는 스물하나에 혼인하였다.
그가 율촌으로 혼행을 가던 날 새벽, 인사를 드리러 안방으로 들어왔을 때, 청암
부인은 오직 한 마디만을 했다.
"잘 다녀오너라."
이기채는 두 손을 방바닥에 공손히 모으고 절을 한 다음 일어섰다. 그리고 방문
을 나섰다. (잘 다녀오너라.) 그네가 더 다른 말을 덧붙일 수 없을 만큼 그 말은
간절한 것이었다. 마흔여섯 그늘진 그네의 허리에, 시린 설움이 응달진 채 얼어
있었으므로, 말을 보태다가는 자칫 부정을 탈 것만 같아서였다. 그때는 이미 김
씨부인은 타계하고 난 뒤였다. 참으로 박복한 여인이었으나, 그나마 마음에 의지
되고 동무도 되어주었던 김씨부인은 하룻밤 잠든 사이에 자는 듯 죽어갔다.
"타고난 복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양반. 그래도 죽음 복은 타고나셨던 모양인
가."
오래 살아 노망까지 하면서 자기 수족을 마음대로 못 쓰고 남의 손을 빌어 목숨
을 이어가는 구차함이나, 날마다 앉고 서는 집일망정 언제나 남의 집 같아서는
늘 손님 같은 처지에, 까딱하면 군식구 대접을 스스로 받을 뻔한 것을 그네는
피해간 셈이었다. 아무 유언도 없이, 무슨 고통도 없이, 김씨부인은 홀연히 청암
부인의 곁을 떠났다. 글쎄... 김씨부인도 사람이니 그 나름대로 희로애락과 애오
욕이 어찌 없었을까. 그러나 길지 않은 나이 몇 십을 사는 동안 어느 한 가지를
편중되게 겪다 보면 나머지에 대해서는 무감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김씨부인
은 자신의 심중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즐겁고 성난 것을 말한
다고 아는 것은 아니다. 청암부인은, 그네가 소리 내어 웃는 것을 보지 못하였
고, 소리 내어 성내는 것도 못 보았다. 또한 어디 따로이 혼자만의 낙을 감추어
둘 것인들 있었겠는가. 마음을 기울여 애착하는 아무도 없었다. 애착이 없는데
증오가 있을까. 다만 한 가지 그네의 고적한 평생을 에워싸고 있었던 것은 오로
지 애였다. 그것은 안개처럼 자욱하여 앞이 보이지 않았고, 그네의 흰옷을 젖게
하고, 몸을 식게 하였다. (좋은 일 한번 못 보고.) 떠나간 김씨부인이 가엾게도
여겨졌지만 한편으로는, 그네가 지하에서나마 조용히 잠들어, 젖은 옷을 다 벗
고, 다만 혼백으로 모든 것을 잊을 수 있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적막한 가
운데 장례를 치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기채가 혼인하게 된 것이다. 그런 만큼
좀처럼 마음이 놓이지 않는 청암부인의 심사는 달래기 어려웠었다. 자기와 단
몇 번 얼굴을 마주하였을 뿐인 어린 소년 신랑 준의도 초례청의 자리에서야 죽
음의 명운 앞에 그렇게도 바싹다가서 있는 줄을 어찌 알았을까. (불길하고 사위
스러운 아낙이로다. 허나 아무래도 내가 그 양반 세상 뜬 일에 깊이 놀랐던 모
양이다. 그저 기채가 이번 고비까지만 무사히 넘겨 주면 하늘이 나를 버리시지
않는 것으로 알리라. 지금까지 남 모르게 근심하며 노심초사했던 불안이 바로
이 고비였던가 보다. 어쩌든지 무사하게만...) 과연 그네의 말대로 하늘이 그네를
버리지 않았다는 증거를, 오래 기다리지 않고도 금방 손안에 잡을 수 있었다. 이
기채는 걸음걸이조차도 완연 의젓하게 돌아왔다. 그리고 일 년 후에 율촌으로부
터 가마가 당도하였다. 꽃각시 율촌댁이 아담하고 조신한 맵시를 드러냈을 때,
둘러선 사람들은 너나없이 탄성을 한숨처럼 발했다.
"곱기도 해라."
"청암아짐 못다 받으신 음덕이 이제부터 발복하려나 보네요."
"온 집안이 다 훠언하네 그냥."
"집안만이 아니라 삼동네 안에서는 저렇게 이쁜 새각시 없을 것이그만."
아랫것들이 넘겨다보며 숨죽여 내지르는 찬탄은 그만두고라도, 문중의 부인들끼
리 주고받는 말로만도 폐백의 자리는 흥겨웠었다. 아닌게 아니라 율촌댁의 자태
는 나무랄 데가 없었다. 나이도 나이려니와 몸에 익은 태도에서 풍기는 여염함
이 그린 듯이 고왔기 때문이었다. 녹의홍상이라는 것이 본디 생기 있는 복색이
면서도 수줍고, 그러면서도 당당한 빛깔이라는 것을 청암부인은 눈이 부시게 느
꼈다. 그네 자신이 시댁으로 올 때, 가마 속에 허연 소복을 입은 채 웅크리고 앉
아 있었기에, 놀라 소리를 지르던 농가의 아낙 생각이 새삼스럽게 떠오름도 그
빛깔이 눈부신 탓이었다. (아름답고나.) 윤이 나게 빗어내린 낭자머리에 꽂힌 청
옥 비녀꼭지의 다부진 푸른 빛 또한 가슴이 서늘할 만큼 고왔다. 고운 그 머리
를 조아리며 청암부인 앞에 다소곳이 절하는 율촌댁의 치마폭에 그네는 대추를
한 줌 던졌다.
"부디 아들을 많이 낳아라."
부축하고 있던 수모가 공손한 솜씨로 얼른 대추를 줍고 있는 사이, 청암부인은
율촌댁이 얼굴 들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며느리가 얼굴을 들었을 때, 시어머니
청암부인은 속으로 (더불어 큰일을 의논할 상은 아니로다. 잔자로운 집안일이 손
끝에 즐거운 그런 상호구나. 허나, 너와 같은 용색을 타고난 사람은 남편궁과 자
식궁 모두 순탄하리라. 그러니 여자로서는 복인이지.) 하고 뇌었다. 이상하게도
청암부인의 가슴에는 선망이 괴는 것이었다. 남들은 곱다 하나 그네의 눈에는
그저 범속한 아낙으로 보이는 며느리는 무난함이 오히려 화려하여, 녹의홍상과
청옥잠두의 호사스러운 빛깔과 어우러졌다. 청암부인은 지그시 율촌댁을 쏘아보
았다. 아니나 다를까. 놀랍게도 이듬해 율촌댁은 회임하였고, 달을 채워 딸을 낳
았다. 그 아이의 이름은 강련이라 지었다. 강련이를 낳은 율촌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