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조선 제1기
B.C.8937년 반고환인씨(盤古桓因氏:木德王)로부터 1차 7세, 2차 8세, 3차 11세, 4차 6세, 5차 6세, 6차 6세, 모두 44명의
단군이 존속했다. 5,038년간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고조선편(古朝鮮篇)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有桓因謂帝釋也. 庶子桓雄. 數意天下. 貪求人世. 父知子意. 下視三危太白可以弘益人間. 乃授天符印三箇. 遣往理之.
雄率徒三千. 降於太伯山頂. 卽太伯今妙香山. 神壇樹下. 謂之神市』
환인씨를 제석(帝釋)이라 한다.
제석이란 최초로 깨달음을 얻었다는 뜻이다.
최초로 만유(萬有) 우주사상을 깨달은, 부처라는 뜻을 말한다.
환인씨(桓因氏)는 서자(庶子)인 환웅(桓雄)이 인간세계를 다스리고자 하는 뜻이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정사(正史)에는 환인씨에게 환웅이란 서자(庶子)가 없다.
역대신선통감(歷代神仙通鑑)에 의하면, 환인씨의 부인은 막지(莫知)인데, 그의 아들은 12명으로 되어있다.
①알방(閼逄) ②전몽(旃夢) ③유조(柔兆) ④강어(彊圉) ⑤저옹(著雍) ⑥도유(屠維) ⑦상장(上章) ⑧중광(重光)
⑨현묵(玄黙) ⑩소양(昭陽) ⑪엄무(閹茂) ⑫대연헌(大淵獻)이다.
환인씨(桓因氏)의 열두 아들 중 환웅(桓雄)이라는 서자는 없다.
그렇다면 단군조선 제1기인 44명의 단군 중에도 서자인 환웅은 없다.
다만 단군조선 제2기인 유소환웅(有巢桓雄) 때 비로소 환웅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단군조선 제2기를 庶子 격으로 본 것으로 생각된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할 만하여 신시(神市)를 정한 곳이 삼위태백(三危太白)이라 했다.
桓因天皇이 우전국(于闐國)에서 東으로 이동해와 돈황(燉煌)이 있는 흑수삼위태백(黑水三危太白)에서 신시(神市)를
정하게 된 것이다.
삼위태백(三危太白)은 중국대륙의 감숙성(甘肅省) 서북쪽에 있다. 삼위태백은 세 산봉우리가 풍화작용에 의해 칼끝같이
깎여져 올라가기 힘들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 본문 141쪽에는 태백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太白山卽水經注之白石山也. 在陝西郿縣南. 接洋縣界. 亦曰太一(太壹). 太白山. 去長安三百里. 不知其高機何. 俗云武
功太白. 去天三百. 山下軍行不得鼓角. 鼓角卽疾風雨至. 冬夏積雪. 望之晧然. 洞天記以此爲第十一洞天. 山有大太白.
二太白. 三太白, 三池海, 天旱秦人多禱雨於此. 太白者四方神名也. 參看太一山條. 在甘肅慶陽縣北一百五十里. 黑水原於此』
태백산은 수경주(水經注)에 의하면 白石山이다.
섬서성 미현 남쪽과 양현의 접경지대이다.
太一 또는 太壹, 太白山이라 한다. 長安 즉 西安에서 3백 리이다. 그 산 높이는 얼마인지 잘 알지 못한다.
속언에 의하면 무공을 세웠다는 뜻으로 太白山이라 했다. 태백산은 높이가 3백이다.
산 아래로 군인이 행군할 때는 북을 치거나 뿔을 불 수 없다. 북을 치거나 뿔을 불게 되면 빠르게 풍우가 몰아친다.
겨울 여름 할 것 없이 흰 눈이 쌓여 있다.
산을 바라보면 정말 호연지기가 있는 기상이다.
11 동천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산은 대태백․이태백․삼태백이 있는데, 세 곳에 모두 못이 있다.
太白은 四方에 神의 이름이 있는데, 太一山을 참고하면 될 것이다.
太白山은 감숙성(甘肅省) 경양현(慶陽縣) 북쪽 1백5십 리이다.
흑수(黑水)가 이곳에서 발원한다.
『史記卷一司馬遷撰本文 35쪽.
括地志云, 三危山 有峰故曰三危俗亦名卑羽山 在沙州燉煌縣東南三十里…』
흑수(黑水)는 三危山에 다다른 다음 방향을 바꾸어 南海로 흘러들어 간다(尙書 禹貢篇).
三危山은 太白山이다.
소공(昭公) 9년 두정(杜頂)이 左傳에 붙인 주석을 보면, 三危山은 과주(瓜州) 즉 현재의 돈황(燉煌) 남쪽 당하(黨河)
근처에 있다.
水經注에도 역시 돈황현 남쪽으로 기록되어 있다.
年 代 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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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조선 제2기
B.C.3898년 유소환웅씨(有巢桓雄氏:火德王)로부터 시작된다.
1차 7세, 2차 4세, 3차, 4차, 5차, 6차, 7차, 8차, 9차, 10차, 11차 각 1세, 12차 5세, 13차 1세로서, BC 2430년까지 1,530년간
존속했다.
이때에 황제와 치우의 10년 대 전쟁이 있게 된다.
삼국유사의 곰과 호랑이의 신화적 근원은 다음과 같다.
고대 사서에는 황제헌원(黃帝軒轅)의 유웅씨(有熊氏) 부족인 곰족(熊族)과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 부족인 호족(虎族)이
살았으며, 이들이 선(禪)을 통해 성인(聖人)이 되기 위해 동굴 등에서 수련을 행하던 풍습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왜 호랑이를 신농씨 부족이라고 보았고, 곰을 황제 부족이라고 보았는가에 대해서는, 중국 최고의 사학자 하광악(何光岳)의 염황원류사(炎黃源流史)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하광악(何光岳)이 지은 염황원류사(炎黃源流史) 제64장에는, 치우와 황제의 전쟁을 일컬어『강형제부락지간적규분(姜兄弟部落之間的糾紛)』이라고 적고 있다.
강씨 형제의 부락간의 분쟁이라고 했다.
요즘 재야사학계에서는 치우(蚩尤)만 우리 단군으로 치고 황제(黃帝)는 중국인으로 치는데, 환단고기의 잘못된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왜 그러냐 하면 치우와 황제는 사촌지간이기 때문이다.
신농씨(神農씨)의 후손이 계곤씨(啓昆氏)이고, 계곤씨의 아들이 치우(蚩尤. B.C.2707년)이며,
황제(黃帝)의 아버지는 소전씨(少典氏. B.C.2789년)이다.
치우의 아버지 계곤씨와 황제의 아버지 소전씨는 형제지간이다.
치우와 황제간의 10년 대 전쟁은 본래 문중 싸움에서 시작되었으나, 직접적인 원인은 대권관계였다.
황제(黃帝)는 12세에 천자(天子)로 등극하게 된다.
이때 치우(蚩尤)는 42세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치우는 하북성(河北省) 지방에서 군사를 일으키고 막강한 병사와 병기를 만들어 황제(黃帝)
에게 도전했다.
황제(黃帝)는 황하(黃河) 이남이었다.
황제의 나이 20살 때부터 시작된 치우와의 10여 년간 73번의 대접전으로 인해 수백만 명의 사상자가 났던 것으로
사기(史記)에 기록하고 있다.
자치통감(資治通鑑) 38권 한기(漢紀) 30권 왕망(王莽) 하편에 보면, 황제(黃帝) 휘하의 대장군(大將軍)과 사관
관리(士官官吏)는 738,900명(七十三萬八千九百名)이며, 군졸(軍卒)들은 무려 1,350만 명(千三百五十萬名)이
황제의 명을 받은 군사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치우(蚩尤)의 군사는 얼마나 되었을까.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대략 1천만 명은 되었을 것으로 추산된다.
고대사회의 인구가 얼마나 많았는지 알 수 있다.
치우와 황제가 싸운 곳은 탁록(涿鹿) 지방이다.
사기(史記)의 기록에는 판천지야(阪泉之野)라고 했다. 판천의 들은 탁록(涿鹿)의 비탈진 언덕을 말한다.
탁록(涿鹿)은 탁록산이 있는 곳으로, 직예성(直隸省), 즉 하북성(河北省) 탁록현(涿鹿縣)의 동남으로 되어있다.
혹 선화현(宣化縣) 동남에 있는 계명산(鷄鳴山)이 있는 곳이라고도 했는데, 옛날에는 탁록산(涿鹿山)이라고
되어있다.
탁록(涿鹿)은 지금의 북경시(北京市)에서 서북(西北) 쪽에 위치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황제와 치우의 전쟁에서, 처음에는 황제의 군사가 패했지만 결과는 황제가 승리했다.
치우가 피살된 뒤 그 잔여세력들은 세계 곳곳으로 뿔뿔이 흩어져갔다.
年 代 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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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조선 제3기
요왕검(堯王儉)으로부터 시작된다.
堯 임금은 제곡고신씨(帝嚳高辛氏 또는 高矢氏. B.C.2482년)의 셋째 부인 진풍씨(陣豊氏)의 몸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방훈(放勛)이다.
돈황(敦煌)에 있는 삼위산(三危山)에서 도(道)를 닦아 18세에 등극하였다.
堯 임금의 등극 연대는 B.C.2357년으로, 도읍지는 왕검성(王儉城) 즉 평양성(平壤城)이다.
지금의 섬서성 장안(長安)으로 왕험성(王險城) 또는 험독성(險瀆城)이라고도 했다.
왕검성은 천연의 요새지로 난공불락의 성을 뜻한다.
그리고 성(城) 주위로 물줄기가 험하고 산세가 사나워 험독(險瀆)이라고 했다.
그리고 25년 뒤 B.C.2333년 戊辰年에 堯임금은 도읍을 아사달(阿斯達)로 옮기게 된다.
지금의 산서성(山西省) 임분현(臨汾縣)이다.
요단군왕검은 도당씨(陶唐氏)ㆍ제요씨(帝堯氏)ㆍ당요씨(唐堯氏)라고 하며, 일명 화덕왕(火德王)의 별칭을 갖고 있었다.
堯壇君 이후 1차 1세, 2차 1세, 3차 7세, 4차는 10세, 5차 10세, 6차 11세, 7차 9세, 8차 8세, 9차 9세, 10차 10세, 11차 10세,
모두 139世로 2,276년간 존속했다.
年 代 表
(율곤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