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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 문화의 원류 원문보기 글쓴이: 솔롱고
Ⅰ. 한국 암각화를 보는 눈
임 세 권(안동대학교 교수)
1. 암각화란 무엇인가?
암각화란 바위의 표면을 쪼아내거나 갈아파거나 또는 그어서 어떤 형상을 새겨놓은 것을 말한다. 그러나 바위 표면에는 이처럼 형상을 새겨놓은 것도 있지만 물감을 이용하여 그려놓는 것도 있다. 멀리는 유럽의 알타미라 동굴벽화나 라스코 동굴벽화같은 것을 예로 들 수 있으며 가까이는 중국이나 시베리아의 각지에 분포되어 있는 암벽 위의 물감그림들을 들 수 있다. 이처럼 물감을 이용하여 그린 그림은 암각화라 할 수 없다. 그래서 이 두가지를 모두 아우르는 말로 바위그림 또는 암화(岩畵)라는 말을 쓸 수 있다. 따라서 암각화는 바위그림보다 하위 개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바위그림보다 하위개념인 암각화라는 말을 보편적으로 사용하게 된 것은 지금까지 물감을 이용한 그림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는 바위그림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도 그것은 대체로 암각화를 일컫는다고 보아도 좋다.
우리가 암각화라는 한 가지 표현으로 부르는 것에도 실상 몇 가지 새기는 방법이 있다. 즉 바위를 단단한 돌이나 또는 다른 도구를 이용하여 두드려 쪼아서 형상을 묘사하는 방법이 있고 쪼아낸 후에 그 부분을 갈아서 더 깊고 매끈하게 만드는 법이 있다. 또 날카로운 금속도구를 이용하여 바위면을 그어서 가는 선을 만들어 형상을 묘사하는 방법도 있다.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이러한 것을 각각 쪼아낸 암각화, 갈아낸 암각화, 그어낸 암각화 등 다른 명칭으로 구분하여 부르지만 우리는 암각화라는 한가지 말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암각화에는 이처럼 여러 가지 묘사법이 있다는 것을 알아두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방법들은 각각 그림을 새긴 사람들의 문화가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2. 암각화 유적은 어떤 곳에 있는가?
암각화가 새겨진 바위가 있는 곳은 어떤 환경을 가지고 있는가? 또 암각화들은 수직의 절벽면에 있는가 아니면 편평한 수평면이나 새기기 편한 곳을 골라서 새겨졌는가? 이러한 문제는 암각화가 왜 무슨 목적으로 그려졌는가 하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우선 여기서는 암각화가 새겨진 바위가 어떤 곳에 어떻게 위치하는가 하는 문제만 말하고자 한다.
울산 대곡리(반구대) 암각화는 높이 약 3미터 길이 약 10미터 정도의 수직 암면으로 비교적 새기기 어려운 조건을 가지고 있으며 바위 또한 매우 단단하여 쪼으는데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는 실제로 우리나라 암각화 유적으로서는 매우 특수한 경우라고 생각된다. 대부분의 우리나라 암각화들은 그리 높지 않은 수직의 바위면을 골라서 새겨져 있다. 그것은 대체로 사람의 팔이 닿는 곳을 골랐다고 보여지며 새기는데 유리한 조건을 생각하여 바위면을 골랐다고 보여진다. 또한 그림이 새겨진 바위면은 대부분 남향을 하고 있어 아침부터 저녁까지 햇볕을 받는다. 그림이 있는 바위면의 바로 밑에는 약간의 편평한 바위면이 있는데 이는 이 그림을 향하여 어떤 의식을 거행하는데 필요한 공간이라고 여겨진다.
암각화들이 위치한 곳은 대체로 강가의 바위절벽이며 이것은 몇 몇 소형의 바위에 새겨진 것들을 제외하면 거의 공통된다. 또 고인돌 등 소형의 바위에 새겨진 것들도 주변을 살펴보면 물이 흐르는 골짜기나 작은 강줄기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환경은 암각화들이 태양 그리고 강과 관련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이는 암각화와 관련된 종교적 의식을 얘기할 때 다시 설명하기로 한다.
3. 무엇을 새겼는가?
암각화가 새겨진 바위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그림들이 있는가? 이러한 그림들의 종류가 무엇인가를 알아야만 그것들이 왜 새겨졌는지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암각화에 나타나는 그림들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구체적인 물체의 모습을 새긴 것이다. 이 그림들은 누구든지 보면 바로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있다. 그러한 종류로는 사슴이나 고래 호랑이 등의 동물그림과 사람그림 등으로 나뉘어지는데 나무와 풀같은 식물을 그린 것은 아직 분명하게 확인된 것이 없다. 이 동물들이나 사람들을 볼 때 가장 쉽게 눈에 뜨이는 것은 성기를 크게 과장하여 노출시키고 있다거나 아니면 배를 불룩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베리아나 몽골 또는 북부중국에서는 대부분의 동물과 사람들이 성기를 길게 앞으로 내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우리나라의 그림들은 사람의 경우는 성기를 길게 묘사하고 동물의 경우는 배를 불룩하게 묘사한 것이 많다. 이 불룩한 배는 새끼를 밴 모습이라고 하며 성기를 크게 묘사하고 있는 것도 역시 자손을 많이 낳도록 기원하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추상적인 도형들이다. 이것은 때로는 원이나 동심원 또는 삼각형이나 물결무늬 등 기하학적인 특징을 가지기도 하고 어떤 때는 구체적인 물체의 모습을 극도로 생략하여 묘사한 듯한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추상적인 모습의 그림들은 상징성이 강하며 특정한 집단 만이 알아볼 수 있는 부호적 체계를 가지고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그림들은 구체적 물체를 묘사하는 방법보다 훨씬 뒷 시대에 나타나는데 우리나라의 울산시 천전동 암각화 유적에는 이 두가지 형태의 그림들이 서로 중복되어 있어서 어떤 것이 더 먼저 만들어졌는지를 알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추상적인 도형들도 앞의 동물이나 사람그림에서처럼 성(性)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4. 무엇을 위해 새겼는가?
그림이 새겨진 바위들은 대부분 매우 단단하며 또 높아서 어떤 경우는 새기기에 매우 위험한 곳도 있고 어떤 경우는 수많은 시간이 소요되기도 했을 것이다. 중국의 광서지방에는 높이 40미터나 되는 절벽에까지 수많은 그림을 그려놓기도 했다. 또 시베리아나 몽골 등지에는 큰 산을 온통 암각화로 뒤덮다시피 한 곳도 있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 이렇게 많은 그림들을 바위에 새겼는가? 그것은 장식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어떤 종교적 목적이 있었을까? 물론 그것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구석기 시대에 그려진 유럽의 동굴벽화들은 햇볕이 전혀 들지 않는 깊은 동굴 벽에 그림을 그려놓았는데 이런 깊은 굴은 물론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다. 즉 이 그림이 그려진 동굴 속은 특별한 종교의식을 거행하기 위한 곳이며 그림들은 그러한 종교적 목적을 위해서 그려졌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암각화가 있는 곳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모두가 강가의 바위절벽이거나 또는 바로 강에 붙어있지 않더라도 강과 인접된 곳이다. 또 그림이 새겨진 절벽의 바로 밑에는 제사를 지내거나 어떤 의식을 거행할 수 있는 공간이 자연적으로 형성되어 있거나 아니면 인위적으로 조성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로 보아 암각화가 종교의식을 거행하기 위한 장소에 제사의 대상으로 만들어졌음을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특히 안동의 수곡리 암각화 유적은 강과 인접된 남향한 산봉 편평한 바위면에 그림이 새겨져 있는데 이 바위면을 돌아가며 긴 장대를 꽂았던 구멍이나 의식을 거행할 때 이용하였던 것으로 보이는 물을 저장하는 시설이 바위면 한 쪽에 깊이 파여 만들어진 것을 볼 수 있어서 당시 종교의식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선사시대 사람들이 신에게 기원한 것은 두가지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험한 세상에서 자기 자신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 뿐 아니라 자기의 가족과 후손들도 자기처럼 안전하게 계속 이어지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을 개체보존과 종족보존의 목적이라고 줄여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을 보존하는 것은 충분한 식량을 확보하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으며 종족을 번성케 하려면 성행위를 통해서 해결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선사시대 사람들의 소원은 대부분 종교의식을 통해서 신에게 전달되었는데 암각화는 바로 그런 문제를 해결하는데 이용된 대표적인 유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5. 언제 만들어졌는가?
우리의 암각화들의 제작연대에 대해서는 많은 학설이 있다. 즉 신석기시대에서 철기시대에 걸쳐서 오랜 기간동안 만들어진 것이라는 설과 대부분이 청동기시대의 것이고 일부 철기시대와 삼국시대의 것이 있다는 설 등이다.
대체로 선사미술의 발전과정을 살펴보면 구석기시대의 동굴벽화에서는 아주 사실적이고 생명력 넘치는 그림들이 그려지다가 신석기시대 이후로 오면 점차적으로 그림들이 개념적으로 바뀌면서 양식화되고 청동기시대 이후로 들어오면 추상화 경향이 나타난다고 한다. 유럽에서 비교적 일찍 암각화가 나타난 스칸디나비아 지역의 그림들은 사슴이나 고래 등의 동물그림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쪽에서는 이들을 대체로 신석기시대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이들을 특별히 수렵미술이라고도 부른다. 중부 유럽으로 내려오면 거석분묘나 또는 큰 바위에 동심원이나 연속 물결무늬 등의 기하학적인 문양들이 많이 분포되어 있는데 이들은 대체로 청동기시대의 것으로 보고 있는데 이러한 것들은 위에 말한 선사미술의 발전과정과도 부합된다 하겠다.
그러면 우리의 암각화들은 언제 새겨진 것인가? 울산의 반구대나 천전리에는 비교적 구체적으로 동물이나 사람의 형체를 묘사한 그림들이 있으며 또 같은 천전리 바위면에는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인 도형들이 새겨지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들도 위의 유럽의 경우처럼 구체적 형태의 사람이나 동물그림은 신석기시대의 것이고 추상적 그림들은 청동기 이후의 것들인가? 실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보고 있기도 하며 필자도 과거에 그렇게 보았었다. 그러나 이는 그렇게 단순히 비교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대곡리에 새겨진 동물그림의 일부는 청동기시대의 몇 몇 유물에 그려진 동물과도 매우 흡사한데 오히려 스칸디나비아처럼 먼 곳의 유적과 비교하기보다는 우리나라의 고고학적 자료들과 비교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 아닐까하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전호태교수는 동물그림의 대표적 유적인 대곡리 암각화에 나타나는 맹수 방어용 또는 다축용 나무울타리나 사람의 성기표현 등은 청동기시대의 정착농경사회와 관련있을 것이라는 점을 제시한 바 있는데 이는 귀기울일 만 하다. 즉 청동기 유물에 나타나는 동물그림이나 또 그림의 일부 내용에서 이 그림들이 신석기시대 수렵미술이라기 보다는 청동기시대의 정착농경민들의 것일 가능성이 더 많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우리 청동기 문화와 관련있는 시베리아나 몽골 또는 북부중국의 많은 암각화들은 모두 동물이나 인물 암각화들이다. 여기에는 구체적으로 사냥하는 장면들이 많이 담겨져 있지만 그림 중 청동기 유물과 관련되거나 생활의 모습들이 나타나고 있어서 현재 이 대부분은 청동기시대의 것임이 밝혀지고 있다. 따라서 수렵이나 어로가 주로 그려졌다고 바로 신석기 수렵미술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추상적 도형들은 동물암각화보다 후대에 그려진 것들임이 이미 천전리 암각화에서 드러났다. 즉 얕게 쪼아진 사슴그림을 파괴하면서 굵은 선각의 추상도형들이 새겨짐으로써 이 양자 사이의 선후관계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동물암각화가 청동기시대로 추정된다고 해서 이 추상도형들을 철기시대의 산물로 볼 수는 없다. 이 암면에는 시베리아 지역에서 철기시대의 암각화로 알려진 가는 선 긋기로 새겨진 그림들이 많이 있어서 이들과 뚜렷이 구분되기 때문이다. 곧 동물그림들이 청동기 전기에 만들어지고 추상도형들이 청동기 후기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생각되며 철기시대에는 이처럼 바위를 쪼아 새기는 것보다는 날카로운 철제도구를 이용하여 가는 선을 그어 새기는 방법이 많이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밖에 고령 양전동을 비롯한 경상북도 전역에서 발견되고 있는 가면그림들도 같은 기법으로 새겨진 청동기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며 안동에서 볼 수 있는 말굽모양의 도형도 여기 청동기 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즉 우리나라의 쪼아파거나 또는 일부 갈아판 암각화들은 대체로 청동기 시대의 것들로 보아도 좋다고 생각하며 천전리에서 볼 수 있는 그어 새긴 일부 그림들은 철기시대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6.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나라의 암각화 유적은 이 글의 제목이 보여주는 것처럼 거의 대부분이 경상북도지역에 분포되어 있으며 일부가 경남의 울산, 남해 그리고 전북의 남원 등에 있다. 그러나 울산은 경북과 경남의 경계선에 가까운 곳이어서 실상 대부분의 암각화들이 경북지방을 중심으로 몰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면 이런 암각화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물감으로 그린 것을 제외하고 순전히 새긴 것에만 제한하여도 암각화는 전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유럽에서는 노르웨이 스웨덴 등 스칸디나비아 지역에서부터 스페인 남부까지, 또 동으로는 시베리아를 거쳐 아시아를 관통하여 러시아의 연해주까지, 그리고 중국대륙의 대부분, 북미 카나다에서 남미 브라질까지, 태평양 남쪽 오스트랄리아 대륙과 여러 섬들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에서 암각화가 없는 곳은 없다.
물론 이러한 암각화들은 어느 한 곳에서 시작하여 여러곳으로 전파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암각화가 각각 현재 있는 장소에서 독자적으로 발생하였다고 보기도 어렵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암각화는 암각화 만으로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즉 암각화는 암각화를 제작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문화의 한 요소라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암각화가 이땅에 어떻게 등장했는가? 또는 어디에서 들어왔는가? 저절로 생겨난 것인가? 하는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암각화가 만들어진 시기에 있던 문화가 이 땅에 어디에서 어떻게 들어왔는가 하는 것과 관련있는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나라의 암각화들은 대체로 청동기시대에 제작된 것들이다. 그렇다면 이 암각화들은 청동기문화와 떼어서 생각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면 우리나라의 청동기 문화는 어디에서 들어온 것인가? 대체로 지금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설을 들어보면 바이칼 호수 근처의 청동기 문화가 중국북부를 거쳐 남하하여 한반도까지 들어왔다고 한다. 그렇다면 암각화도 이러한 청동기문화의 전파된 경로를 따라서 들어온 것은 아닐까?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암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시베리아나 몽골 또는 중국 북부의 암각화들을 살펴보지 않으면 안된다. 시베리아 지역과 몽골 북부중국의 암각화들은 대체로 같은 경향성을 보이고 있다. 큰 줄기를 보면 시베리아 서쪽의 알타이공화국과 몽골의 접경에서 시작하여 동남으로 길게 내려오는 알타이 산맥을 따라 분포된 암각화의 줄기와 알타이 공화국이나 우랄산맥 동쪽 지방에서 바이칼 호수지역을 거쳐 동으로 연해주에 이르는 긴 초원지대의 암각화들 그리고 중국 신강성의 알타이지역에서 비단길로 불리우는 중국 감숙성을 통과하여 내몽고에 이르는 지역의 암각화들에서 거의 비슷한 그림의 형식과 내용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이 그림들이 같은 문화의 소산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암각화들을 위에 말한 시베리아나 몽골 북부중국의 암각화들과 비교하면 물론 다른 점도 많지만 같은 점도 많이 있음을 무시할 수 없다. 특히 사람 얼굴을 묘사한 신상이 시베리아에서 북부중국에 이르는 지역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데 이 얼굴의 구체적 형태는 언뜻보면 우리의 고령 등에서 볼 수 있는 가면 또는 인면상과 많이 다르다. 그러나 얼굴도형이 가지고 있는 구성요소들을 살펴보면 그것들은 우리의 고령 암각화와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이마에 새겨진 'U'자형 도형이나 얼굴 양쪽의 오목하게 깎아낸 뺨, 굵은 점으로 묘사한 눈 코 입, 턱밑을 제외한 얼굴 주위 세면에 마치 태양광선처럼 짧은 직선을 돌려놓은 것 등이다. 이것은 고령의 것이 거의 사각형에 가깝고 시베리아 등지의 것이 타원형이나 원형으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우리의 것은 시베리아나 중국의 얼굴에서 윤곽선을 없앤 것과 매우 흡사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처럼 기본적인 도형의 구성요소가 동일한 점에서 이 그림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다고 볼 수 있으며 우리의 것이 시베리아 쪽에서 몽골 중국을 거쳐 내려온 것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할 것이다.
이와같이 시베리아나 중국과 관련있는 그림은 울산 대곡리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대곡리 암면의 왼쪽 밑에 있는 사람의 그림인데 형태는 두팔과 다리를 쫙 벌리고 있으며 손가락과 발가락이 다섯 개씩 묘사되었고 머리가 매우 간략하게 생략되어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이와같은 인물그림은 시베리아에서 몽골 중국의 각 유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며 이들은 한결같이 샤만을 묘사한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이 외에도 안동의 말굽모양 도형이나 경주 석장동의 물방울처럼 생긴 얼굴모습 등도 모두 시베리아 등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어느 한 그림이 다른 지역과 비슷하다고 해서 바로 그지역에서 온 것으로 단정할 수는 없으나 우리나라에서 나타나는 거의 대부분의 그림들이 시베리아에서 북부중국에 이르는 지역에 광범하게 분포되고 있음은 주목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또한 이 지역이 청동기문화가 우리나라로 이동되어온 경로의 하나라고 생각할 때 이는 매우 중요하다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7. 암각화의 그림은 무엇을 나타낸 것인가?
암각화 유적이 자신과 종족을 보존하기 위한 목적의 종교의식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은 앞에서 언급하였다. 대곡리의 반구대 바위면에 새겨진 동물들 중에는 고래가 많이 그려저서 특별한 관심을 끌기도 하는데 이 고래들도 새끼를 밴 것이거나 사냥의 목표물(창을 맞은 고래) 등이 대부분이며 다른 뭍 동물들도 새끼를 밴 모습이 많다. 아마도 이러한 동물들은 수확을 많이 바라는 사람들이 유감주술적 의미를 부여해서 새긴 것이라 생각되며 성기를 돌출시킨 인물들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편 여기의 동물중 일부는 신적 존재일지도 모른다. 시베리아 사람들이 그들의 사냥의 대상인 사슴을 신격화 시켜서 예배의 대상으로 삼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로작업을 주로 하던 사람들이 포획의 대상중 가장 거대하며 또한 다른 바다 고기와 달리 태반을 통해 새끼를 낳는 고래를 신으로 섬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여기에는 배를 탄 사람들이 나오는데 배에탄 사람들은 어로작업을 한다기보다는 더 많은 수확을 위한 제사를 지내는 모양을 묘사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 시베리아의 경우에서는 이승에서 저승을 향하여 노저어가는 영혼을 실은 배로서의 의미가 있다고 하는데 이 역시 저 세상의 영적 존재의 힘을 빌어 현세에서의 생산의 풍요를 기원하는 뜻이 있었을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고령암각화의 얼굴은 우리나라 청동기문화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시베리아 일대에서 내려온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면 이 얼굴은 무엇이며 왜 그곳에 새겼는가?
시베리아 몽골 중국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이 얼굴모습은 결론적으로 태양신의 얼굴이다. 그 지역에는 지금도 그들 얼굴과 관련된 태양신 신화가 남아 있으며 하바로프스크 근처에 있는 사카치아리안 유적은 그 대표적인 것이다. 중국에도 영하회족자치구의 하란산 유적이나 내몽고의 음산 유적 등에 이와 유사한 얼굴그림들이 있는데 역시 태양신으로 해석하는데 이견이 없으며 시베리아 서부의 미누신스크 지역에 있는 선돌에 새겨진 얼굴도 역시 태양신임을 부인할 수 없다.
고령암각화의 얼굴이 앞서 말한 것처럼 이 지역의 얼굴상과 연관된다면 이는 역시 태양신외에 다른 것으로 생각할 수 없다.
다만 우리나라의 고령암각화와 같은 유형에 속하는 얼굴그림들은 지역에따라 많은 변화가 나타나서 다양한 변이형들이 만들어졌다. 즉 어떤 것은 얼굴 주위의 광선이 없어졌으며(영일군 칠포리) 어떤 것은 광선과 함께 얼굴 내부의 점이나 선들이 없어졌고(경주 안심리, 영주 가흥동) 또 어떤 유적에서는 이러한 다양한 형태가 한꺼번에 나타나기도 한다(영천 보성리). 따라서 이런 모든 다양한 형태의 원형은 고령 양전동 유적의 얼굴 그림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보여지며 이는 태양신을 묘사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 사람들이 태양을 숭배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음은 이미 오래전부터 많은 학자들이 인정하고 있었는데 그 구체적 예배의 대상이 바로 고령 암각화에 새겨진 얼굴인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강가의 남향한 낮으막한 바위를 골라서 여기에 그들이 모시던 풍요의 신인 태양신의 형상을 새겨놓고 제사를 지냈으며 지금 남아있는 대부분의 암각화 유적은 바로 그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던 터전이었던 것이다.
Ⅱ. 한국 암각화의 대표적인 유적들
1. 울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2. 울산 천전리 암각화
3. 고령 양전리 안화리 암각화
4. 포항 칠포리 암각화
5. 포항 인비리 암각화
6. 안동 수곡리 암각화
7. 영주 가흥동 암각화
8. 영천 보성리 암각화
9. 경주 석장동 암각화
10. 경주 상신리 암각화
11. 남원 대곡리 봉황대 암각화
12. 남해 상주리 암각화
13. 함안 도항리 암각화
14. 여수 오림동 암각화
Ⅲ. 동북아시아의 암각화들
동북아시아에서 암각화가 밀집 분포된 지역은 크게 두 줄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알타이산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동으로 시베리아 남부의 초원지대를 따라 바이칼호를 지나서 연해주의 사카치아랸에 이르는 지역이고 다른 하나는 알타이산 정상부로부터 동남으로 뻗친 알타이 산맥을 따라 중국의 신쟝(新疆)자치구의 알타이지구, 간쑤성(甘肅省), 닝시아(寧夏)자치구, 내이멍꾸(內蒙古)자치구 등과 몽골의 서부 지역이다. 중국의 경우 이 외에도 칭하이성(靑海省), 시쟝(西藏)자치구, 윈난성(雲南省), 광시(廣西)자치구, 푸지앤성(福建省), 쟝쑤성(江蘇省) 등지에 많이 분포되어 있는데 대체로 윈난, 광시 등 남부지역은 채색 암화가 많고 그 이외의 지역은 암각화가 많다. 다만 중국 대륙의 중심부 지역에는 암화나 암각화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시베리아 남부와 알타이지역의 대표적인 유적 중에서 직접 답사했던 몇 지역을 살펴보기로 한다.
1. 알타이 지역
이 글에서 말하는 알타이지역이란 알타이산의 정상을 중심으로한 지역을 가리키는 것이다. 알타이산의 정상은 중국 알타이 카자크스탄 몽골 등 네 나라의 국경이 만나고 있는데 정상인 여우이펑 봉(友誼峰)은 중국에 속해 있다.
1) 알타이 공화국
구 쏘련에 속해 있다가 현재는 독립국이 되었다. 알타이 공화국의 남쪽으로 몽골과 인접해 있는 알타이 산의 북록은 소위 산지 알타이로서 아파나시에보, 안드로노보 문화 등 청동기 문화가 발달했던 곳이며 이들 문화와 관련되는 암각화 유적이 추야강과 카툰강 유역에 많다. 그 중 칼박타쉬 유적과 바르부르가즈 유적은 대표적이라 할 만하다. 이 유적들은 강 가에 남향한 유적으로 제사유적으로서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그림의 내용은 사슴, 양, 소, 남신 또는 여신상, 마차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2) 카자크스탄
카자크스탄의 동쪽 탐가리 유적이 대표적이다. 사슴 소 말 양 등의 동물들과 함께 머리주위에 광선이 묘사된 태양신상이 매우 독특하게 보인다. 이 신상들은 광선을 방사상으로 묘사하고 있는 큰 머리에 작은 몸체가 달린 전신상들로 알타이지역의 태양신 숭배를 보여주는 대표적 그림이다. 이와 유사한 것을 알타이공화국의 카라콜 문화 석관묘 그림에서도 볼 수 있다.
3) 중국 알타이지구 암각화
신쟝자치구의 북부로 알타이산의 남록에 해당한다. 알타이지구의 행정수도인 알타이시 주변과 카자크스탄 또는 몽골과의 접경지역에 수많은 유적이 분포되어 있다. 대부분 동쪽과 남쪽을 향한 암면에 새겨졌으며 크지는 않더라도 강줄기에 인접하여 위치한다. 두어라터, 차오얼헤이, 나이뉴창, 루어투어펑 등의 유적이 대표적이다. 대부분 말, 양, 사슴 등의 동물들이며 사냥하는 사람이나 샤만상 등 인물상도 많다. 일부 붉은 안료를 사용한 채색그림도 있다.
4) 몽골 서부
이 지역은 대부분 사막에 가까운 지역으로 고비로 불리운다. 고비란 사막과 초원의 중간에 해당되는 지역을 의미하는 말이다. 으브르항가이 아이막과 고비알타이 아이막의 몇 유적을 답사할 수 있었는데 역시 양이나 사슴등의 동물이 주를 이루며 사냥하는 사람이나 샤만상 등도 많이 보인다. 특히 교미하는 동물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 교미 형태가 매우 독특하게 묘사되어 있어 관심을 끈다.
2. 닝시아자치구의 허란산 일대 암각화
허란산은 중국대륙 중앙에서 북부 내이멍꾸의 바로 밑에 붙어 있는 남북으로 뻗친 험준한 바위로 이루어진 산맥이다. 남북 약 200킬로미터에 이르는 산맥 주변에 수십곳의 암각화 유적이 분포되어 있는데 산밑 초원지대와 산의 계곡 그리고 사막과 구릉지대로 나눌 수 있다. 여기서는 허란커우, 쑤야거우, 후이후이거우, 샤오시펑거우 등의 유적을 보기로 한다. 내용은 몸체에 큰 동심원 또는 소용돌이무늬를 가진 호랑이, 대형 소, 양, 사슴, 신상의 얼굴이나 샤만상 등인데 동심원이 새겨진 호랑이는 연해주 사카치아랸이 큰뿔달린 사슴의 몸체 묘사와 흡사해 주목된다. 또 허란커우의 샤만상은 반구대의 샤만상과도 흡사한 모습을 보여준다.
3. 내이멍꾸자치구의 암각화
내이멍꾸는 동은 헤이룽쟝성(黑龍江省)의 북서부, 서는 신쟝자치구의 동부와 경계를 마주댄 매우 큰 자치구이다. 위의 허란산 암각화도 내이멍꾸의 중앙부 남쪽과 경계하고 있는 지역으로 내이멍꾸의 암각화와 떼어 말하기 어렵다. 현재 중심부의 인산(陰山) 일대와 우란차뿌 고원일대 그리고 허베이성(河北省)과 가까운 커시커등치의 바이차허 강유역 일대에 많은 암각화가 분포되어 있다.
1) 인샨 계곡의 암각화
험준한 바위산의 계곡에 수십곳의 암각화 유적이 분포되어 있으며 그 중에서도 무리허투거우 유적은 규모나 내용면에서 대표적이다. 경주 금장대에서 볼 수 있는 위가 뾰족한 긴 타원형 얼굴과 태양신의 얼굴이 보이며 동물상들도 많이 볼 수 있다.
2) 우란차뿌 고원 암각화
넓은 초원에 바위덩이들이 쌓여 마치 긴 산맥처럼 보이는 것이 수없이 많다. 이 바위산맥을 이루고 있는 바위에 수많은 그림들이 새겨져 있으며 대부분 양이나 사슴 또는 사냥이나 목축을 하고 있는 인물상들 그리고 여성 성기의 형상 등이 주내용을 이룬다. 이중 여성 성기형 도형은 우리나라 안동 수곡리의 것과 흡사하여 주목된다.
3) 바이차허 강유역의 암각화
큰 뿔을 가진 사슴들과 태양신으로 보이는 얼굴 등이 많다. 면각으로 된 사슴그림들은 다른지역의 동물들이 매우 단순화된 몸체를 가지고 있는것과 달리 비교적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반구대의 사슴이나 동물들의 묘사와 유사하다.
4. 바이칼호 서쪽 시시키노 암각화
바이칼호 서쪽 이르쿠츠크 서북쪽에 위치하며 레나강 최상류 강안 절벽에 위치한다. 그림은 강가 수직 절벽에 그려졌으며 새긴 그림보다는 붉은 안료나 또는 붉은 바위면에 흰색 안료를 이용하여 그린 것이 더 많다. 신상처럼 거대하고 독립적으로 묘사된 엘크사슴이나 배를 타고 가는 사람들 그리고 철기시대에 들어와서 투르크인들이 남겼다고 하는 기마인물상 등 여러시대를 거치며 제작된 많은 그림들이 중첩되어 그려지고 새겨졌다. 이 그림에 나오는 배는 영혼을 싣고 하늘나라로 가는 의미를 가졌다고 하는데 반구대의 배그림 해석에도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5. 하바로프스크 사카치아랸 암각화
비교적 일찍부터 우리나라에 소개된 암각화 유적으로 시베리아의 대표적 암각화이다. 아무르강 가에 여기저기 흩어진 바윗돌 상면과 측면에 새겨졌는데 본래는 강가 절벽에 새겨졌던 것이 절벽이 무너져내리면서 평지에 흩어지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얼굴 주위에 광선이 묘사된 태양신상이나 큰 뿔을 가진 사슴들이 대부분이다. 이 지역의 태양신상의 일부는 고령암각화와 형태면에서 유사성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