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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이시다(요일 4:9; 요 3:16). 그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화목제물이 되어 죽으셨다. 이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이며(요일 4:9)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확증이 되었던 것이다(롬 5:8). 오늘 본문 말씀도 이에 대해 잘 증거해 주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일생에 모든 축복을 다 누리며 호화스런 생활을 살았던 부자(전설에 의하면 그 이름은 ‘다이브스’)와 태어날 때부터 불행한 환경에서 태어났는지 심지어는 심한 병까지 앓으면서 부자의 처마 밑에서 살았던 나사로가 동시에 죽게 되었는데 역전되는 광경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들이 저 내세에 가서 어떤 처지에 놓였는지 아무도 모른다. 아는 분은 오직 한 분 곧 예수 그리스뿐이시다. 그분은 이 두 사람의 운명을 알고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비유라면 나사로라는 이름을 붙일 이유가 없다. 분명히 주님이 아시는 두 사람을 비교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나사로는 낙원 즉, 천국이라는 곳에 가서 하나님의 품안에서 모든 세상 고생 다 잊어버리고 평안히 쉬고 있다. 한편 부자는 너무나 괴로운 상황 속에 놓여 있다. 우리가 이 본문은 가슴에 눈물을 담지 않고는 읽을 수 없는 말씀이다. 너무나 처참한 상황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상황은 바로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의 형제들과 연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부자가 간 곳을 일컬어서 성경은 지옥이라고 한다. 지옥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게헤나’라고 말한다.
▣천국과 지옥에 대해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공생애에 핵심 사역인 천국복음을 전파하시고, 천국복음을 가르치시고, 귀신을 쫓으시며 병을 고치시고 사역을 하셨다(마 4:23, 24). 예수께서는 천국, 하나님 나라에 대해 45회 언급하셨고, 지옥(게헨나)에 대해 13회를 언급하셨다. 성경에 보면 아무도 함부로 지옥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아무도 지옥이 어떻게 생겼는지 본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오직 ‘지옥’이라는 곳을 가장 많이 이야기하신 분은 예수님 한 분뿐이다. 그렇게 온유하고 겸손하시고, 죄인을 보실 때에 마치 어미 닭이 병아리를 품듯이 품으시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입에서 이 듣기도 싫은 지긋지긋한 용어인 ‘지옥’이라는 말이 13번 이상 나왔다. 그중 말씀하신 몇 가지만 들어 보라.
「만일 네 눈이 너로 범죄케 하거든 빼어 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 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 우는 것보다 나으니라」(마 18:9)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 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10:28)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 23:33)
이런 말씀이 전부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다. 예수님만이 지옥을 말씀하시고, 경고하실 수 있는 유일한 권위자이시다. 왜냐하면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 즉 지옥의 열쇠를 가지신 분이다. 그분이 지옥의 문을 열면 닫을 자가 없고, 그분이 지옥의 문을 닫으면 열 자가 없다. 오직 예수님만이 지옥에 대한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다.
현대인들은 ‘지옥’이라는 단어를 대단히 싫어한다. 아주 무식한 사람만이 떠드는 소린 줄 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식한 자가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고상한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 예수님의 권위 앞에 도전하면 안 된다. 믿든지 안 믿든지 그것은 여러분들의 자유겠지만, 하나님 아들의 말씀의 권위에 대항하면서 지옥이 없다고 말하지 말라. 내가 믿든지 안 믿든지 지옥은 반드시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그 권위는 떨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반드시 믿어야 한다.
▣ 예수께서는 본문에서 지옥은 어떤 곳인가? 에 대해 잘 가르쳐주어 알 수 있다.
1. 지옥은 무서운 고통이 연속되는 곳이다(눅 16:24).
부자가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 하나이다다」 라고 울부짖는데, 성경에 보면 지옥을 이야기할 때에 가장 많이 언급하고 빼뜨리지 않는 단어 중의 하나가 불꽃이다. 불못, 새번역에는 불바다로 가르쳐 주고 있다.
2. 지옥은 하나님의 사랑(자비)이 완전히 거두어진 곳이다(눅 16:24, 27-28).
부자는 지옥에서 비로소 두 가지 기도를 했다. 일생동안 한 번도 기도하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들을 아주 우습게 생각하던 사람이 지옥에 가서야 기도하는 것이었다. 「오! 하나님 저 나사로를 보내셔서, 손가락에 물 한방만 찍어서 내 혀에 떨어 뜨려 주십시요.」(24절). 한 바가지도 아닙다. 한 숫가락도 아니다. 한 방울만, 한 방울만..., 얼마나 사모하는 가슴인가? 얼마나 고통하는 모습인가? 얼마나 갈증을 느끼는 모습인가! 한 방울만! 그런데도, 하나님은 안돼!! 분명히 안 된다고 하셨다.
또 하나 부자가 기도하고 있다. 「하나님이여, 세상에는 지금 내 형제 다섯이 있는데 나처럼 호화롭게 살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곳에 오지 않도록 나사로를 살려 보내서 전도 좀 하게 해 주세요.」(27,28절). 세상에서는 전도라고는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지옥에 가서야 전도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안돼! 세상에서 목사들이 전하는 성경 말씀과 전도자들이 이웃 사람들에게 예수 믿으라고 전하는 복음을 듣지 아니하는 사람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서 외쳐도 처음에는 관심이 있을지 모르지만 믿지 않는다.」 라고 거절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참 이상한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 아버지는 얼마나 자비로우시고 긍휼이 많으신 분이신가? 하늘의 태양을 악과 선인에게 비추시고, 비를 의로운자와 불의한 자를 구별하지 아니하시고 내려 주시는 자비로운 하나님이요(마 5:45), 음식과 기쁨으로 사람의 마음을 만족케 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했고,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신 하나님이라고 했고,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시면서 오래 오래 기다리시는 하나님, 천년이 하루같이 하루를 천년같이 기다리시는 하나님! 너무나 너무나 오래오래 참으시고 기다리시 때문에, 이 세상에서 오히려 악한 자들이 득세하고 선한 자들이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착각을 할 만큼, 하나님이 죄인을 사랑하시고 기다리시는 모습을 우리가 보는데, 부자가 하늘에서 본 하나님은 달랐다.
기회를 잃어 버린 사람, 기회를 잃어버린 사람에게 대하는 하나님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이 아니다. 한강이 넘치도록, 낙동강이 범람하도록, 한반도 전체가 물 흐르는 소리로 철철 넘치게 비를 주시는 하나님이지만, 기회를 놓치고 하나님을 멸시한 사람에게는 손가락에 물 한 방울도 허락지 아니하시는 무서운 하나님, 진노의 하나님이시다. 지옥에서 그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차라리 그런 하나님은 보지 않는 것이 나을 것이다. 얼마나 무섭겠는가? 세상에서 기도하지 않던 사람들이 평생토록 영원토록 기도할 것이다. 그러나 그 기도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까지 가지 않는다. 지옥의 두꺼운 벽에 울려서 메아리가 되어 자신에게로 되돌아 올 뿐이다. 아무 응답도 없는 기도를 하게 될 것이다.
세상에서 전도하지 않는 사람! 지옥에 가면 비로소 전도하겠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전도하고 싶어서, 내 아들, 내 손자의 이름을 부르고 별의별 소리를 다해도 그 전도는 아무 효험이 없는 전도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떠나 버렸기 때문이다. 성도여, 기회 주셨을 때 기도하며 전도하라.
3. 지옥은 천국을 보면서 접근하지 못하는 곳이다(눅 16:26)
천국에 있는 나사로는 지옥의 비극을 보지 못했다. 천국에서 지옥의 비극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괴롭겠는가? 모든 것 꿈에 본 듯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곳이 하나님 나라 곧 천국이다. 그러나 지옥은 그 반대이다. 천국을 환하게 보고 있는 곳이다. ‘틸리케’라고 하는 유명한 신학자요, 설교가가 말하기를 「지옥이 뭐냐, 이것이다. 보면서 가까이 가지 못하는 곳」 이거 정말 미치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 비교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않는가? 우리가 과거에 저 달동네 수백, 수천 세대가 비슷비슷한 생활을 하게 되는데 추운 겨울 한밤중에 세 번, 네 번 일어나서 연탄을 갈아야 하는 생활, 부엌에는 찬바람이 구멍 난 벽틈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동동 발을 굴르면서 밥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생활을 하는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여러분 생각하면 못 살 것 같지요. 그러나 모든 주변의 사람들이 그렇게 사니까- 비교가 안 된되어 그것도 참을 수 있다. 아침상을 둘러놓고 웃음꽃을 피우면서 먹고, 힘차게 아빠, 엄마는 직장으로, 자녀들은 학교로 달려가게 된다.
저 북한 사람들이 우리 보기에는 굉장한 고통을 당할 것 같지만, 우리의 생각보다는 훨씬 살만할 것이다. 왜냐하면 폐쇠 된 사회에서는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들이 세상에서 제일 잘 사는 사람들인 줄로 착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대로 사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인터넷 매개체를 통해서 정보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비교되어 못살겠다고 판단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사선을 넘어 행복을 찾는 자들이 있다.
오늘의 우리의 고통은 이 비교에서 오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직면한 위기는 비교에서 오는 위기이다. 십수년 전만 해도, 미국에서야 길을 돈으로 깔아 놓고, 자가용이 집집마다 있었던지 간에, 대한민국 사람들은 나처럼 이렇게 사는 것이다! 라고 위로를 받으면서 살았는데, 근대화를 통해서 많은 사람이 생활 수준이 높아졌다. 그 가운데는 열심히 일해서 잘 사는 사람도 있지만, 국민을 속이고 불쌍한 사람들을 착취해서 재산을 모은 사람들도 많다. 한국의 정서가 돈 많은 사람들이 다 도독놈처럼 보이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니 시골 사람, 열심히 일해도 하루 살아가기가 벅찬 사람들은 견딜 수가 없는 고통이다. 가난해서 고통이 아니라, 비교해보니까 생겨지는 소위 말하는「상대적 빈곤감」 때문이다. 이 무서운 과도기가 빨리 지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모두는 다시 불행한 옛날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지옥이 어떤 곳이냐? 비교하는 곳이다. 쳐다보아 눈에는 보이지만, 가슴에는 채워지지 않는 곳이 지옥이다.
저는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하나님께서 왜 지옥의 창살을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열어 놓으셨을까? 저는 한마디로 대답할 수 있을까? 그곳에 간 사람들을 세상에서 살았을 때에, 천당이야기나 지옥에 대해서 말하면 아주 우스운 것으로 들었다. 멸시하기까지 했다. 「죽으면 끝나지 무슨 지옥이고, 천당이냐?」 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천당을 보여 주시는 이유는, 「나는 거짓말 하지 아니했다하는 증거이다.」 「나의 종들은 거짓말하지 아니했다」는 증거를 보여 주시는 것이다. 「봐라, 영원토록 봐라」
4. 지옥은 기억력이 완전하게 살아나는 곳이다(눅 16:25)
교통사고로 죽었던지, 일시적으로 심장이 멎어서 몇 시간 혹은 몇일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한결같이 꼭 같은 말들을 한다. 「모든 과거의 일들이 한순간에 다 기억이 되는 일을 체험했다」 라는 것이다. 그 말은 맞다. 부자가 불꽃 가운데서 비명을 지르고 야단을 하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얘, 너는 살았을 때, 너의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생을 했지않니? 너는 이것을 기억하라.」 라고 했다. 부자는 천당에 있는 사람이 「나사로구나!」 하는 것을 당장 알았다. 또 자기 형제가 세상에서 잘살고 있다는 것도 바로 알았다. 다 알고 있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세상에서 시간이 지나서 망각 된 줄 알았던 나의 과거의 모든 죄책감, 하나님 앞에서 범한 죄악들을 회개하지 않고 그대로 무마해 두었던 것들이 전부 다 되살아났다.
성도여, 지옥은 이렇게 무서운 곳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옥에 가서는 안 된다. 우리의 가족과 이웃도 지옥에 가도록 내버려 두면 되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무서운 지옥이기 때문에 한 사람도 그곳에 가기를 원치 않으셔서 얼마나 힘쓰고 계신지 모른다. 한 사람도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서,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면서 세상 사람들의 모든 죄를 그 아들에게 다 짊어지웠다. 그 아들로 하여금 십자가상에서 지옥에 당하는 모든 고통을 다 대신 짊어지게 하셨다. 모든 인류의 죄를 다 그 자리에서 소각시키기로 했다. 그리고는 3일 만에 부활시키신 다음에 그 아들의 십자가의 복음을 들고 지옥에 가는 길모퉁이에서 그곳을 향해서 가는 사람들마다 붙들고 가지 말라고 소리친 것이 2,000여 년이 지났다.
주님께서 아무도 그 무서운 곳에 가지 않기 위하여 오늘도 수많은 자를 다 동원하여 그 길을 막고 계신다. 오직 지옥의 길로 가지 말라고 막고 계신다. 예수 믿고 지옥 가지 말라고 막고 계신 것이다. 왜 하나님이 그처럼 발 벗고 나서서 오늘도 그 수고를 쉬지 않고 계시느냐! 그곳이 그렇게 무서운 곳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걸 알아야 한다.
부자가 왜 그곳에 갔나요? 부자였기 때문에 갔나요? 그것은 절대 아니다. 부자가 죄가 아니다. 아브라함도 부자였고, 욥도 부자였고, 노아도 부자였다. 다윗도 부자였다. 부자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예수 믿으라고 전할 때에 듣지를 않았기 때문이었이다. 세상에 있는 다섯 형제도 「안 들으리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바로 부자를 지적하는 것이다. 그들은 기쁜 소식인 복음을 안 듣는다. 주변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아주 우습게 생각한다. 왜 안 듣는가? 이유는 단 하나이다. 세상 사는 맛이 너무 좋아서이다. 아쉬운 것이 있어야지. 답답한 것이 있어야지. 성경에 보니까 날마다 잔치했다고 했으니, 얼마나 기가 막히게 재미있게 살았는가? 부자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만, 부자에게 약점이 하나 있다. 세상 재미가 너무 좋으면,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라든지, 영혼에 관한 이야기를 안 듣는다.
그래서 하나님이 너무 답답해서 비상 수단을 쓰신다. 어떤 때에는 그 재산 전부를 빼앗아 가면서 그 사람의 지옥가는 길을 막는 수가 있다. 어떤 때에는 건강을 빼앗아 놓고 그 사람의 지옥가는 길을 막는 수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지옥을 향해서 달려가는 우리의 부모를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좋은 옷을 사다 드리겠는가? 좋은 음식을 가져다드리겠는가? 하나님은 우리들이 지옥에 가는 것이 안타까워서 아들이 보내시고, 지금도 발을 동동 구르시며 복음을 전하시는데, 우리는 태연할 수가 있겠는가? 나의 형제, 나의 이웃들이 지금도 지옥을 향해서 달려가도 있는데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사랑하는 성도여! 주변에 나는 예수 믿는데, 예수 모르고 세상을 떠난 가족, 친지들이 있는가? 백번 가슴을 쳐도 시원치 않을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옆에 서서, 그 사람이 무서운 지옥을 향해서 걸어가고 있는데, 그 사람의 비위나 맞추면서, 그때그때 적당히 즐기면서 침묵하고 있다면, 지옥을 향해서 가는 사람도 불쌍한 사람이지만, 그런 사람을 옆에서 지켜 보고만 있는 사람은 더 잔인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인가? 병원에 아이를 데리고 온 엄마가 아이가 아프다고 소리를 지르고 몸부림을 치니까 같이 우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보았을 것이다. 아이가 치료받기 위해서 잠깐 받는 고통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 엄마의 마음이라면, 내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이 지옥의 죽음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는데, 그것을 보고만 있다면 그 사람의 마음은 과연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로서 주님의 마음일까? 눈물 있는 마음일까?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예광교회 성도여, 눈물을 가지고 전도하자. 눈물을 가지고 기도하자. 지금 9.1데이 새생명전도축제통해 함께 전도에 힘쓰는 예광의 성도가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