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산정약용 유배지 강진 다산초당 기행문 (2016. 07. 02.)
7월 1일 여행을 떠나기 전 멀리 떠난다는 것은 나에겐 설레임보다는 걱정과 부담감이 앞선다. 며칠 고민을 하기는 했지만 결국 가기로 결정을 했다. 우리 배움 의 본바탕이 다산선생님께로부터 나왔기에 이 길을 계속 가려 한다면 언젠가는 꼭 가봐야 되는 곳이라고 생각을 했다.
7월 2일 포레스트 출발 전 8시 10분쯤 포레스트에 도착을 하니 정호영 선생님, 채선영 선생님, 최규호 선생님이 벌써 와 계셨다.. 댁이 부안이신 채선영 선생님은 전날 전주에서 하룻밤을 잤다고 한다. 그 열정이 참으로 대단하다. 최규호 선생님은 페북에서 많이 봐서 그런지 얼굴이 낯설지 않다. 이어 박승용 선생님이 오시고 유종민, 그리고 김현화 선생님이 오셨다. 김현화 선생님은 특별히 남편과 함께 오셨다. 9시가 조금 넘으니 김성주 의원님이 오셨다. 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 오늘의 일정에 대해서 정호영 선생님이 이야기 하신다.
일단 팀을 나눴다. 다산초당을 방문하고 전주로 돌아오는 1팀, 갈 데까지 끝까지 가는 2팀 오후일정으로 바쁘신 중에도 참여해 주신 김성주의원님과 박승용 선생님, 그리고 김현화 선생님과 부군은 1팀, 정호영선생님, 채선영선생님, 최규호선생님, 이성민, 유종민은 해남 땅 끝까지 가는 2팀 강진 도착 후 바로 식사를 하고 다산초당을 방문 후 시간이 허락하면 前강진군수가 운영하는 다방을 들려서 특강을 듣던가 백련사를 가던가 하기로 하였다.
기획의도 오늘 강진 다산초당으로 가는 독서소풍의 기획 의도는 다산 정약용 선생님의 삶을 조금, 아주 조금 느껴보려는 것이라 한다. 같이 책을 읽는 사람들, 같이 공부하는 사람들, 같이 일을 하는 사람들과 함께... 그런데 함께 가려고 하는데 모두 다 가고 싶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이 걸린다. 그런데 단 한명이라도 모이면 가겠다는 모임이 모아 놓고 보니 9명이나 되었다 !
“다산복지학” 공부 정호영 선생님이 오늘 독서 소풍을 위한 “다산복지학”이란 소책자를 나누어 주셨다. 정호영 선생님의 동료인 한덕연 선생님이 쓴 책 '복지소학'에서 다산 어록만을 빼온 책이다. 정호영선생님은 이책을 만들어 주신 한덕연 선생님과 제본에 도움을 준 금강노인복지관의 김윤형선생께 고마움을 전했다. 총 20쪽짜리 A6(A4의 4분의 1)인 이소책자는 기존 내용을 14쪽으로 줄이고 나머지 6쪽에 다산의 생애와 저서들을 소개하고, “다산선생의 지식경영”, “목민심서”의 내용과 목차를 압축해서 넣었다. 이 책을 함께하는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다산초당에 가서 마음에 드는 구절을 함께 낭독하며 정담을 나눌 계획이라고 한다.
간략소개
대학은 지도자들이 어떻게 할 것인가? , 큰사람, 즉 어른들이 사회를 위해서 공부하는 책이다. 그런데 해석에 있어서 정약용 선생님은 다른 해석을 하고 있다. 예를 들면 먼저 修身齊家治國平天下(수신제가치국평천하) - 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하고 집안을 가지런하게 하며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한다. 에 使(시킬사)를 붙여 백성들로 하여금 (修身)몸을 닦게 해서 백성들로 하여금 治國(치국)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平天下(평천하) 한다. ...한다. 는 3가지 단어로 압축할 수 있다. 孝,弟,慈 (大學公議) 그 방법이 乞言이다.
다산 복지학이란 親民之道를 이루는 일이다. 백성들끼리 친해지게 하는 길이 사회사업이다. 백성들끼리 친해지게 하는 것이 사회사업의 방법이다. 이하 다산복지학 참고
강진으로 출발
15분정도의 강의를 듣고 강진으로 출발 ! 다양한 사회사업과 봉사를 하시는 채선영 선생님은 고맙게도 간식을 준비하셨다. 한 사람당 하나씩인 비닐봉지엔 뽀빠이, 구운계란, 알사탕, 캔커피, 바나나 가 들어 있었고, 자두, 살구, 방울토마토 등 과일도 듬뿍 싸오셨다. 세대공감 ! 어릴 때 소풍을 가면 빠지지 않고 싸 오던 것들이었다.
정호영선생님이 함께한 우리 팀은 2시간 반이 지루하지 않을 정도로 정약용 선생님에 대한 강의를 들으며 갔다.
다산(茶山)의 호(號) 귀농(歸農) - 아호 다산(茶山) - 정약용이 강진으로 유배 갔던 시절 뒷산 이름으로, 차가 심어진 산이라는 뜻이다. 여유당(與猶堂) - 유배를 끝내고 이제는 여유를 갖겠다는 의미 사실은...이는 노자(老子)의 『도덕경』의 한 대목인 "여(與)함이여, 겨울 냇물을 건너듯이, 유(猶)함이여, 너의 이웃을 두려워하듯이"라는 글귀에서 따온 것으로 조심조심 세상을 살아가자는 뜻
조선시대의 유배지는 형량에 따라서 거리가 달라진다고 한다. 이조시대의 강진은 오지중의 오지로 정약용선생님이 받은 형량은 굉장히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도 양반인지라 말은 줬다고 한다.
정약용선생님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분이 세분 계신다. 첫 번째는 정조임금이다. 정조는 정약용 선생님을 무척 아꼈다고 한다. 이 분은 정약용 선생님의 든든한 빽이었다. 약관의 나이(22세)에 벼슬길에 오른 정약용선생님은 18세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한국 최대의 실학자이자 개혁가이다. 관직에 18년, 유배생활 18년, 그 후 18년을 사셨다 한다. 제자 또한 18명을 두셨다 한다. 유독 18이라는 숫자와 인연이 깊다. 두 번째는 정약용선생님이 사숙하셨다는 성호선생 이분은 정약용선생님을 이끄는 스승이었다. 세 번째는 백련사 혜장스님이다. 이분은 서로의 스승이자 친구였다.
남쪽으로 내려 갈수록 비가 많이 왔다. 이분이 쉽게 우리의 방문을 허락하지 않으시는 구나. 정호영선생님은 사숙이라 하던데 제자로 받기 싫다는 건가?
강진은 무엇이 유명할까? 채선영 선생님의 질문에 강진에 대해서 생각나는 게 없다. 그 해답은 강진에 다다를 무렵 자연스럽게 나왔다. 큰 도자기 형상의 모습에 아! 도자기, 나중에 해남 땅끝 마을에 안내문을 보고 알게 되었는데 왜구들의 약탈 지였다는 아픈 역사가 있다.
강진도착
12시 30분경 1팀과 만나기로 한 보은식당에 도착하였다. 정갈하게 나온 백반은 푸짐하고 맛이 좋았다. 특히 토하젓은 인기가 많았다.
다산초당 가는 길
금강산도 식후경, 맛난 남도백반을 먹고 다산초당으로 향하였다. 다산초당 가는 길에 정호영선생님의 페친이 강추한 다방이 보였다. “다신계 전통찻집” 윤동환 前 강진군수가 운영하고 있는 이곳은 정약용 선생님이 즐겨 마셨다는 황차를 맛볼 수 있으며 다산학의 전문가이신 윤동환 선생의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 짧은 시간 다산을 요약한다.
茶를 즐겨 마시는 국민은 興한다. 동트기 전에 일어나라 기록하기를 좋아하라
지금의 다산초당(茶山草堂)은 茶山의 글, 詩에서 정확히 묘사가 되어 그대로 재현한 것이란다.
아 ! 다산초당 !!!
소나무의 뿌리가 드러난 오솔길을 올라가니 다산초당이 나온다. 다산초당(茶山草堂)의 안내문을 옮겨본다.
정약용(丁若鏞)은 1808년 봄, 해남 윤 씨 집안의 산정(尹慱의 山亭)에 놀러 갔다. 아늑하고 조용하며 경치가 아름다운 다산서옥(茶山書屋)은 지난 7여 년간 전전하던 주막이나 제자의 집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더구나 가까운 백련사(白蓮寺)에 절친한 벗 혜장(惠藏)이 있었고 다산(茶山)은 그 이름처럼 차나무로 가득했다.
정약용은 시를 지어 머물고 싶은 마을을 전했고 윤 씨 집안은 이를 흔쾌히 허락했다. 이곳에서 정약용은 비로소 안정을 찾고 후진 양성과 저술 활동에 몰두했다. 10년 동안 다산학단(茶山學團)으로 일컬어지는 18명의 제자를 길러냈고, 50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집필했다. 초당을 가꾸는 데도 정성을 기울여 채마밭을 일구고, 연못을 넓히고, 석가산을 쌓고 집도 새로 단장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윤 씨 집안의 산정은 다산초당으로 거듭났고 정약용은 스스로를 다산초부(茶山樵夫)라고 칭하게 되었다.
시간을 거슬러 당시로 가 보자. 제자들은 스승의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자료 수집, 정리, 정서, 편집 등의 작업에 참여하고, 다산은 정열적으로 각종 저작을 집필하는 동시에 제자들을 능력별, 수준별로 지도하고 독려한다. 한가할 때면 계곡과 연못을 거닐고 차를 마시면서 아름다운 풍광을 시로 읊는다. 다산초당은 유배객의 쓸쓸한 거처가 아니라 선비가 꿈꾸는 이상적인 공간이자 조선 시대 학술사에서 가장 활기찬 학문의 현장이었다.
서각(書閣)에 귀를 기울여 보라, 다산과 제자들이 토론하는 소리가 들릴지 모른다.
백련사(白蓮社)가는 오솔길
다산초당이나 백련사로 가는 오솔길은 잘 꾸며져 있었다. 이동 중 강한 빗줄기가 내리다가도 우리가 걸을 때면 빗줄기가 잣아 들었다. 고즈넉한 풍경에 넋을 잃고 취하다 보니 애초 기획한 다산초당에 가서 마음에 드는 구절을 함께 낭독하며 정담을 나눌 계획을 모두 잊고 있었다. 오히려 장맛비에 일정을 망치지는 않을까 하던 걱정은 산세(山勢)와 더불어 그윽한 안개가 몽환적 분위기를 연출하여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강진군에서 제공하는 안내문에는 이렇게 써 있다.
혜장은 해남 대둔사 출신의 뛰어난 학승이었다. 유학에도 식견이 높았던 그는 다산의 심오한 학문 경지에 감탄하여 배움을 청했고, 다산 역시 해장의 학식에 놀라 그를 선비로 대접하였다. 두 사람은 수시로 서로를 찾아 학문을 토론하고 시를 지으며 차를 즐기기도 했다. 혜장이 비 내리는 깊은 밤에 기약도 없이 다산을 찾아오곤 해서 다산은 밤 깊도록 문을 열어 두었다고 한다.
다산과 혜장이 서로를 찾아 오가던 이 오솔길은 동백 숲과 야생차가 무척 아름답다. 그러나 이 길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친구를 찾아가는 설렘일 것이다. 보고 싶은 친구를 가진 기쁨, 친구를 찾아가는 길의 행복
백련사, 땅끝마을, 귀향 그리고 단상(斷想) 들
백련사
끝 & 말단 우리는 여행의 종착점인 땅끝 마을로 간다. 땅 끝은 토마리라고도 부른다. 끝은 말단을 의미한다. 더 이상 갈 곳이 없고 나아갈 바가 없다. 까고 또 까고 양파의 껍질을 까듯 계속 까 나가보면 그 사물의 본질, 본성이 나온다. 하지만 이것마저 깨뜨리면 새로운 세상이 열리지 않을 까? 땅 끝에 가보니 바다의 시작이요 땅의 시작이더라.
기록 산길 오솔길을 넘어 강진만 바닷가가 보일 때 유난히 낮은 언덕에 보이는 강진만은 산, 바다, 구름, 하늘이 모두 한데 어우러져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이 풍경을 사진에 아무리 담아 보려 해도 담아지지가 않았다. 분명 사진은 정확한 기록이라 했는데 아무리 찍어도 이 광경을 잡아 낼 수가 없었다. 순간 그 많은 다산의 저서를 읽어도 아무리 읽어도, 읽어도 다산의 그 뜻을 담아내지는 못 하리라 생각이 들었다.
공부 정호영선생님은 공부는 여럿이 같이 해야 한다고 했다. 가방끈도 짧고 글도 못쓰는데 자꾸 댓글도 달고 기행문도 쓰라고 한다. 반응이 있어야 그래야 학생의 수준을 알고 수준에 맞게 가르치는데 숙제도 않고 대답도 안하니 가르치는 선생은 학생이 답답할 수밖에. 수준을 알아야 가르치지
각자 찍은 사진을 공유해보니 서로의 다른 관점을 보게 되었다. 사진은 기록이다. 그것도 아주 정확한 기록. 다산 선생은 기록을 중요하게 여기셨다고 한다. 정호영 선생님은 다양한 관점 속에서 왜 이러한 관점을 가지게 되었는지 서로 공유해봄은 좋은 공부라 했다.
정호영 선생님은 유명한 사회사업가이다. 정호영 선생님이 찍은 사진은 언제나 사람들이 많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누구와 함께 했는가. 그리고 무엇을 함께 했는가.
김현화 선생은 미적 감각이 섬세한 것 같다. 사진, 액자, 그리고 다기 그런데 많은 사진이 없다. 이는 즐겼다는 거다. 사진 찍을 시간이 어디 있는가. 지금 이 시간 이 순간을 즐겨야하지 않겠나?
박승용 작가님은 정말 예술적 사진을 많이 찍으셨다. 카메라가 좋아 잘 나온 것이 아니라 이분 대단한 능력자라 생각이 든다. 특히 백련사에서 강진만이 보이는 창가에 두 분 정호영선생님과 김성주의원님의 뒷모습은 정약용선생님과 혜장스님을 보는 듯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찍은 거 같다. 하지만 다양한 정보 속에서 유난히 내가 찍은 사진들은 책, 글귀, 중요인물 중심으로 찍는 거 같다. 그리고 각 유원지가 안내하는 안내문 풍경 등 그런데 내 사진에는 같이 참석했지만 사진에 없는 사람도 있다. 함께와 관계라는 부분에서 많이 약한 것 같다.
귀향
소풍(逍風/消風) 혹은 여행 정호영선생님은 자신이 공부 한 것이 그대로 확인이 되는 즉 내가 헛되이 공부하지 않고 바르게 했구나를 확인하는 시간이었다고 하셨다.
우리는 여행을 갔다 왔다고 한다. 신용복 선생은 여행은 나를 비우고 또 새롭게 채워서 돌아오는 것이라고 한다. 나는 얼마나 많이 비우고 그리고 새로운 것을 얼마나 많이 담아왔나
다산 정약용선생님은 이런 말을 남겼다 한다.
읽어라 ! 자신의 저서가 그냥 썩 일까봐 후손에게 당부한말이라고 한다.
----------------------------------------------------------------------------------------
초당(草堂) : 억새나 짚 따위로 지붕을 인 조그마한 집채. 흔히 집의 몸채에서 따로 떨어진 곳에 지었다. 성호 이익(星湖 李瀷, 1681~1763년)은 조선 문화의 전성기인 18세기 전반 영조대에 활약한 재야 지식인이다. 흔히 조선 후기 사회의 새로운 사상적 흐름을 실학이라고 하는데, 이익은 실학 사상 형성기의 대표적 학자로 평가되고 있다. 신유박해(辛酉迫害) 이승훈 ·이가환 ·정약용 등의 천주교도와 진보적 사상가가 처형 또는 유배되고, 주문모를 비롯한 교도 약 100명이 처형되고 약 400명이 유배되었다. 이 신유박해는 급격히 확대된 천주교세에 위협을 느낀 지배세력의 종교탄압이자, 또한 이를 구실로 노론(老論) 등 집권 보수세력이 당시 정치적 반대세력인 남인을 비롯한 진보적 사상가와 정치세력을 탄압한 권력다툼의 일환이었다. 다방(茶房)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거나 쉴 수 있도록 꾸며 놓고, 차(茶)나 음료 따위를 판매하는 곳. ‘찻집’으로 순화. [비슷한 말] 다실(茶室)ㆍ다점3(茶店)ㆍ차실3(茶室)ㆍ차점4(茶店). 다신계(茶信稧) 다산 정약용이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다산초당에 유배되었을 때 제자들을 중심으로 주민이 선생의 생활을 돕기 위해 쓰이기도 하고 차재배와 생산을 위해 계를 모아 출연하였는데 이 계 이름을 다신계라 하였다. 윤동환 前 강진군수 1951년 12월1일 다산이 적거하던 강진 귤동마을 다산초당 산하에서 태어났다.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등 한자가 생긴 이래 세계적으로 가장 방대한 저술로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학의 산실 다산초당은 본래 윤동환의 6대 조부 귤림처사 윤단(해남윤씨, 해남 윤씨는 다산의 외가 집안이다. 다산의 어머니가 공재 윤두서의 손녀이고 윤두서는 고산 윤선도의 증손이다.)이 거처하던 단산정이엇다. 윤단은 장서 2천여권을 제공하며 18제자와 함께 강학으로 자오할 수 있도록 선생을 뒷바라지하엿다. 선생의 막내제자 성균진사 윤종진은 윤동환의 4대 조부이기도 하다. 이렇듯 윤동환은 스스로 ‘다산은 나의 운명’ 이라며 다산학에 심취, 선생의 깊은 사상과 철학을 연구, 저술, 강의하며, 필새으이 사업으로 (사단법인)다산기념 사업회.다산문화진흥원을 설립, 선생의 문화유적.유품을 발굴, 정리하고 유적지 복원을 위한 숭모사업과 다산 목민정신 생활화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다산초부(茶山樵夫) 나무꾼
다산4경 정석, 약천, 다조, 연지석가산이다 |
첫댓글 운치가 더했겠습니다.
언제 선생님이랑 다정하게 이길을 걷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