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교안 때 숨진 신자와 양민들이 버려지듯 가매장 되었던 곳
제주 시내 동쪽 교육대학 옆에 있는 별도교(別刀橋)와 별도봉 기슭에는 제주 교안 때 관덕정 앞에서 무참하게 숨진 신자와 양민 시신들이 옮겨져 버려지듯 가매장 된 상태로 있었던 곳이다.
1901년 제주 교안 때에 관덕정 광장에서 수많은 교우 및 양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6월 1일 프랑스 군함의 도착으로 소요가 가라앉았고 뒤이어 정부에서 파견한 강화 진위대에 의해 사태가 수습되었다. 제주 교안 사건은 재판 과정에서 오대현, 강우백, 이재수의 사형으로 끝이 났지만, 교회에 대한 배상금 문제, 희생자 매장지 문제 등으로 오래 지연되었다.
조선 내 제주에서의 교안 급보를 받고 프랑스 라 슐쁠리즈와 알로에또 호 함장 몽뜨와 벨리가 달려 왔을 때는 사상자들의 유해가 제주 성내와 사라봉 중간 지점 대로변 구릉인 별도교에 널려져 있었다고 한다. 당시 교안의 과정에서 피살된 사람들은 대부분 천주교 신자들이었다. 교회 측에서는 대체로 500∼700명 정도가 피살된 것으로 보고 있다. 반면 당시 제주에 파견된 평리원 안종덕 검사가 공식적으로 집계한 희생자 명단에 따르면, 신자 309명, 평민 8명이었다. 이 숫자는 샌즈(Sands)가 상경하여 고종에게 보고하였던 쌍방 간 300명이란 숫자와도 비슷하다. 따라서 제주 교안으로 희생된 신자 수는 300~350명 정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관덕정 광장에 널려 있던 시신들은 별도봉과 화북천 사이에 옮겨져 버려지듯 가매장된 상태로 있었다. 그중 연고가 있는 분묘는 이장해 갔고 무연고 시신들만 이곳에 있었다. 몽뜨와 벨리 함장은 신임 이재호 제주 목사와 피해자들에 대한 사후 처리를 논의한 바 시신들을 매장할 영지와 안전한 무덤을 만들 수 있도록 동의를 얻고, 장례식도 종교 의식으로 치를 것을 다짐 받았다.
그러나 사상자들의 유해는 사건 진압 후 1년이 지나도록 방치되자 프랑스 공사 쁠랑시가 조선 조정에 편지를 보내 이 문제에 대해 조속히 해결해 줄 것을 요청했고 1903년 1월 제주 목사로 부임한 홍종우와 라크루(구마슬) 신부와의 접촉을 시발점으로 프랑스 공사와 조선 조정과의 교섭이 원만히 진행되어 같은 해 4월에 황사평을 그 매장지로 양도받았다. 사건 진압 4년 만에 교우들과 양민들의 유골은 비로소 황사평에 안장되었다. 4년 만에 교우들과 양민들의 유골은 황사평에 안장되었지만 이곳 별도교와 별도봉 기슭 일대에는 희생된 그분들의 진토가 아직 머무르는 곳이다.
▒ 제주 교안 전개 과정
교회 측에서 바라본 교안의 전개 과정을 대체적으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1) 상무사와 신자들과의 충돌
(2) 신자들의 제주읍 교회로의 피신
(3) 신자의 한림 민회소 습격, 장두 체포 압송
(4) 신자의 대정성 진입, 발포, 주민 피살
(5) 민군의 무장
(6) 신자들의 무장
(7) 신자의 황사평 주둔 민군 선제 공격
(8) 민군의 성 밖 신자 타살
(9) 교회 측의 프랑스 함대 원조 요청
(10) 민군 진압
▒ 제주 교안의 원인
제주 교안의 원인은 여러 입장에서 볼 수 있으나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해체기에 이른 봉건 사회에서 지배 계급에 대한 백성들의 항쟁이 천주교 신자와의 항쟁으로 발전하였다.
둘째,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한반도를 배타적으로 독점하기 위해, 프랑스 선교사들을 쫓아내려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셋째, 성직자의 특권을 이용하려는 일부 신자들이 성직자의 특권을 미끼로, 민간에 많은 행패를 부려 도민의 원성을사고 있었다.
넷째, 토착민의 문화를 무시하고 신목(神木)과 신당(神堂)을 없앰으로써 토착 문화와 갈등을 빚었다.
■ 찾아가는 길
■ 순례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