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 11일 온고을교회 수요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임마누엘
슥 2:6~13
<함께 있어주지 않았다?>
장성한 자녀들이 자기의 어린 시절 부모님에 대한 불만 1순위가 무엇일까요?
메이커 옷을 사 주지 않았다?
비싼 과외 시켜주지 않았다?
맛있는 음식을 사주지 않았다?
나를 키가 크게 낳아주지 않았다?
나를 예쁘게 낳아주지 않았다?
이런 것들이 아닌 줄 아시지요? 그러면 자녀가 부모에 대한 불만 1순위 무엇입니까?
“내가 힘들 때 함께 있어주지 않았다!”입니다.
저도, 아이들 장성하고 어느날, 가족 앨범을 들여다본 일이 있어요!
아이들 철부지시절부터 점점 자라는 모습이 앨범에 담겨있더라고요!
그런데 한 눈에 봐도, 아빠인 제가, 아이들과 함께 했던 추억이 매우 빈약했습니다.
아내는 늘 아이들과 함께 있었어요! 한편 당연합니다. 아내가 아이들 데리고 다녔으니까요!
앨범 속에 아내는 아이들과 함께 있었지만, 저는 함께 찍은 사진이 드물었어요!
☞ 그러면, 아내는 잘했고, 저는 잘못한 것이 됩니까?
중요한 것은 “힘들 때 엄마 아빠가 함께 있어 주었습니다”라고 느끼도록 해야 합니다.
건강하고, 기쁘고, 잘 나갈 때는 사람들이 자기 주변에 누가 있어줘야 한다고 생각 안합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건강하고 잘 나갈 때는 주변에 사람들이 있어요!
입학식, 재롱잔치, 졸업식 때는 주변에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니 이런 때는 사람을 찾지 않습니다.
문제는, 외로울 때, 고독할 때, 힘들 때, 그때입니다.
너무 힘들어서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데, 주변에 가슴 터놓을 마땅한 사람이 없어요!
부모님도 나름대로 바빠서 자기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내 말에 귀기울여주지 않아요!
“너에게 다 해줬잖아? 먹여줘, 재워줘, 가르쳐~ 그러면 됐지, 뭘 더 바래?”
부모님들, 다들, 남들 하는만큼은 자식에게 해 줬어요!
그런데 자식들이 하는 말은 달라요! “힘들 때, 내 옆에 없었어!”
<스가랴 선지자 환상 속 하나님>
☞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인들, 주전 586년에 폭망했습니다.
나라가 바벨론 제국에 의해서 망하고, 성전은 허물어졌습니다. 성벽도 폐허가 되었습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백성들은 뿔뿔히 흩어졌습니다. 나라 밖으로 쫓겨났습니다.
그때 유대인 중에서 제법 똑똑한 사람들은 포로로 끌어갔습니다.
“바빌론 유수”라고 합니다. “바빌론 유수”
이렇게 나라가 망하고 산산히 흩어질 때,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외친 소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버렸다!”
“하나님은 우리를 미워한다!”
이 말을 다시 번역하면, “우리가 지금 이렇게 힘드는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지 않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떠났다!” 이거였습니다.
개인이나, 조직이나, 국가나, 외롭고 힘이 들면 의지할 데를 찾습니다.
“아, 나 힘드는데, 누가 내 얘기 들어주는 사람 없나?”
“큰 것도 아니고, 아주 작은 한 마디, 지친 나를 안아주면서 사랑한다, 정말 사랑한다는 그 말을 해 준다면, 나는 사막을 걷는다 해도, 꽃길이라 생각할 겁니다”
이스라엘도 나라가 망하고 나니까,
“아, 우리가 이렇게 힘이 드는데, 하나님은 어디 계신 거야?”
☞ 이 대목에서 묻습니다. 유다가 멸망할 때 하나님이 그들을 외면했을까요?
정답은 “그렇지 않다!”
유다가 멸망 당할 때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유다가 멸망을 당할 때, 더욱 그들과 가깝게 계셨습니다.
오히려 유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유다가 멸망당할 때, 하나님은 한 선지자를 보냈습니다.
그 선지자가 ‘예레미야’입니다.
멸망해가는 유다에게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유다의 멸망에 즈음하여>
예레미야 선지자를 ‘눈물의 선지자’라고 합니다.
왜 눈물의 선지자냐?
첫째, 선포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 눈물나게 합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부르셔서 대답했더니,
“너는 가서 유다의 멸망을 선포해라, 유다는 바벨론 제국에게 항복하라고 전해라!”
우리나라 망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선포해야 한다니 눈물부터 납니다.
그래서 눈물의 선지자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더니 자기를 핍박합니다. 온갖 핍박을 다 당합니다.
감옥에 가두고, 마른 우물에 쳐 넣기도 합니다. 거기서 또 웁니다.
그래서 눈물의 선지자입니다.
렘 27:6~11 “이제 내가 이 모든 땅을 내 종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주고 또 들짐승들을 그에게 주어서 섬기게 하였나니 7 모든 나라가 그와 그의 아들과 손자를 그 땅의 기한이 이르기까지 섬기리라 또한 많은 나라들과 큰 왕들이 그 자신을 섬기리라 8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 목으로 바벨론의 왕의 멍에를 메지 아니하는 백성과 나라는 내가 그들이 멸망하기까지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그 민족을 벌하리라 9 너희는 너희 선지자나 복술가나 꿈꾸는 자나 술사나 요술자가 이르기를 너희가 바벨론의 왕을 섬기게 되지 아니하리라 하여도 너희는 듣지 말라 10 그들은 너희에게 거짓을 예언하여 너희가 너희 땅에서 멀리 떠나게 하며 또 내가 너희를 몰아내게 하며 너희를 멸망하게 하느니라 11 그러나 그 목으로 바벨론의 왕의 멍에를 메고 그를 섬기는 나라는 내가 그들을 그 땅에 머물러 밭을 갈며 거기서 살게 하리라 하셨다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시니라”
유다가 예레미야의 선포에 귀를 기울였습니까?
아닙니다. 거역했습니다. 바벨론에게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덤벼들었습니다.
그러다고 온갖 수모를 다 당하면서 멸망 당합니다.
나라 잃고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가면서 탄식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렸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다!”
<바빌론에서 만난 하나님>
나라가 망했습니다. 성전은 허물어졌습니다. 성벽도 폐허가 되었습니다.
백성은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거기서 비로소 예레미야 선지자의 선포 말씀을 떠 올립니다.
그리고 깨우칩니다.
첫째, “나라가 망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떠난 것이 아니다!”
둘째, “하나님이 우리를 떠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떠났었다!”
이 두 가지 깨우침이 있었기에 이스라엘은 다시 일어납니다.
인류 역사상, 전쟁으로 패망하면, 그 나라는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고 맙니다.
그렇게 사라지는 이유가 이 두 가지의 깨우침이 없기에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누구 덕분입니까?
① 선지자, 예레미야 덕택인 줄 믿습니다.
② 선지자를 보내신 하나님 은총인 줄 믿습니다.
③ 이스라엘이 늦게라도 이 섭리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포로로 붙잡혀 간 바빌론에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형식을 새롭게 합니다.
그곳에는 성전이 없습니다. 있을 리가 없지요. 그래서 이때부터 회당을 만들었습니다.
유대인은 10가구가 모이면 반드시 회당을 하나 마련합니다.
안식일에 회당에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합니다.
유대인의 회당은 지금도 전통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유대인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린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버렸다!”
이것을 깨닫고 포로로 붙잡혀 간 곳에서 더 뜨겁게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70년만에 되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포로귀환이후, 예루살렘을 복원합니다.
폐허가 되었던 옛 성읍을 다시 짓는 것이 쉽게 될 리 없습니다.
온갖 방해공작이 뒤따릅니다. 자체적으로도 회의론이 고개를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 파송>
포로귀환 이후 이스라엘은 다시 난관에 봉착합니다.
성전을 건축하는 일에 온갖 어려움이 닥쳐옵니다.
예루살렘이 주저앉으려 합니다.
하나님은 쉬임없이 선지자를 보내십니다.
이때 하나님이 부르셔서 파송한 선지자 중에 스가랴가 있습니다.
스가랴는 8번의 환상을 보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스라엘에 선포합니다.
첫 번째 환상은 먹줄환상, 두 번째 환상은 네 뿔 환상, 세 번째 환상이 측량줄 환상입니다.
오늘 본문은 세 번째 환상입니다.
측량줄을 잡은 천사가 예루살렘을 측량하겠다고 측량 줄을 잡고 달려갑니다.
또 한 천사가 말씀합니다. “예루살렘 성곽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불 성곽으로 둘러치신다!”
이 환상 중에 하나님이 말씀합니다.
(8절)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영광을 위하여 나를 너희를 노략한 여러 나라로 보내셨나니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
예레미야 선지자가 선포했던 말씀을 확인해 줍니다.
하나님이 유다를 바벨론에게 포로로 보내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다.
그러나 여기서 더 이상 유다를 괴롭히는 것은 ‘나 하나님, 여호와’를 거역하는 것이다.
그리고 말씀해 주십니다.
(10절)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와서 네 가운데에 머물 것임이라”
내가 와서 네 가운데에 머물 것임이라”
이 말씀이 바로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
오늘 설교 제목이 “임마누엘”입니다.
<임마누엘>
누군가가 나와 함께 있어준다는 것, 이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설교 모두에 자식이 부모에게 품는 가장 큰 불만이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힘들 때 부모님이 내 곁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하나님이 내 곁에 없었습니다.”
유다가 바벨론 제국에게 멸망 당하고 나서 그렇게 원망했었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하나님이 우리 곁을 떠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떠났었다!”
이것은 임마누엘의 ‘파라독스’ 반전입니다.
임마누엘은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차원 더 신앙적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떠나지 말고 하나님과 함께 해야 한다!”
세상의 부모는 인간인지라, 피곤하면 자야 합니다. 쉬어야 합니다.
자식들이 힘들고 어려운 것을 돌아보지 못할 때도 많습니다.
그래서 자식들은 “나 힘들 때, 엄마 어디 갔었어?”라고 볼멘 소리를 합니다.
그때 뭐라고 대답하시렵니까? ~ 우리는 이렇게 대답해야 합니다.
“미안해! 그때 너를 돌봐주지 못했다. 미안하다!”
하나님은 다릅니다.
“나 힘들고 어려울 때 하나님은 어디 계셨습니까?”라고 원망하면 하나님은 뭐라 하실까요?
시 121:4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사람이 외롭고 힘들 때, 부모가 되었든, 친구가 되었든 항상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함께 하십니다. “임마누엘”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졸지도 않으시고 돌아보시는데, 그걸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 어디 계세요?”
그리고 하나님은 나를 버렸어, 나도 하나님 버릴래~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임마누엘의 역설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경계해야 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