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교육걱정없는세상에서 만난 오랜 친구, 백선숙 선생님이
수능을 치는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가슴이 먹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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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앞둔 큰 아이에게 건네 준 편지, 같이 애쓴 수 많은 아들의 친구들에게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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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수능을 하루 앞두고 있구나. 수십년전 수험생으로 겪었던 입시에 대한 기억이, 부모가 된 지금까지도 악몽처럼 되살아나는 듯 하다.
모든 애들의 삶과 생각이 무채색 숫자로 코드화되고 그 낱낱의 숫자 배열과 조합이 로또 복권의 운명처럼 여겨지는 현장, 그 한 복판으로 너를 들여보내는 마음은 무겁기만 하구나.
수십만 아이들을 어떻게 한 색깔로 나타낼 수 있을까? 좌충우돌, 형형색색, 각양각색의 아이들이 쌓고 부수고 짓고 허물면서 만들어 낸 ‘3년 삶의 서사’를 있는 그대로 펼쳐 보여줘도 되는 시험이라면 내 마음이 이렇게 무거울까?
친구와 비교하고 경쟁할 필요가 없는 나 자신과의 싸움, 자기 존재에 대한 고민과 성찰을 통해 깨닫고 배운 결과를 내어 놓는 시험이라면 이랬을까?
모두가 같은 길을 가려고 사투를 벌이는 게 아니라 각자 자기만의 트랙을 얼마나 잘 달릴 수 있는 지, 자신이 선택한 트랙이 맞는 지, 혹 아니라면 또 다른 궤도를 탐색해도 되는 지, 그 모든 가능성이 다 허용되는 과정이라면 이러했을까?
출제자의 의도나 문제 난이도 따위에 상관없이 네가 배우고 쌓은 지식과 지력을 맘껏 펼쳐 볼 수 있고, 어떤 결과에도 최선의 가치를 배우고 기뻐할 수 있는 시험이라면 이랬을까?
한치의 실수도 없는 완벽주의자만 살아남는 과정이 아니라 허다한 실수조차 삶의 중요하고 의미 있는 매듭이 되어 겸허하고 너그럽게 세상을 바라보는 힘이 된다는 것을 배우는 시험이라면 이랬을까?
영혼없는 훈련이 더 유리할 수 밖에 없는 객관적 지식 정보에 대한 답 찾기가 아니라 진리와 정의의 바다를 표류하며 삶의 좌표를 찾느라 여전히 수 많은 문제 속에 헤매이고 있다고 당당히 말해도 되는 ‘답 없는’ 시험이라면 이랬을까?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처럼 얼마나 혼자 빠르게 달려왔느냐를 가리는 게 아니라, 얼마나 큰 용기와 인내심으로 주위의 친구들과 함께 잘 걸어왔는 가를 판단하는 자리,
그래서 모두가 각자 삶의 보람과 의미, 시련과 한계의 성적표를 들고서 다음 단계의 도약을 가늠하고 20대의 희망지도를 설계해보는 마지막 시험이 될 수 있었다면 이렇게 내 마음이 무거울까?
![](https://t1.daumcdn.net/cfile/cafe/99751B4B5DCCCA6C1B)
그래..
비록 지금 이 현실은 전쟁과 형벌에 가까운 과정이지만 네 마음속엔 평화와 축복 가득한 새 세상과의 만남을 그리길 바래본다.
‘원더’라는 영화에서 주인공 어기에게 엄마가 했던 말처럼 “네가 있는 곳이 맘에 들지 않으면, 네가 있고 싶은 곳을 그려보라”고 말이다.그러지 않고 이 전쟁에서 살아남을 방법이 없는 것 같거든. 엄마도 그렇게 너희들이랑 살아왔던 거 같고..
너희들에게 늘 미안하고 마음 아픈 어른으로서 너희들 만큼이나 마주하기 싫은 수능 시험 앞에서, 난 나만의 다른 상상을 하며 보내려 한다.
이런 소수의 승자만을 위한 무서운 시험이 사라진 11월 어느 날, 이 땅의 모든 고3들이 어두운 밀실을 박차고 나와 ‘자유와 희망’의 폭죽을 터뜨리며 광장을 점령하는 그 날을 말이다.
그리고 한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구나. 수능과 대입이라는 말이 사치로 들릴 만큼 어렵고 외로운 길을 걷고 있는 수많은 동갑내기가 많다는 사실 말이다. 그러니 우리의 처지가 얼마나 상대적인지..그 모든 친구와 함께 가는 세상이 무언지 잊지 말기로 하자.
이제 엄마는 수능대박이니 합격대박이란 말은 하지 않으마! 수능을 보러가지만 수능을 말하지 말자! 낡고 틀에 박힌 공식에 갇히지 말고 수능 너머 더 먼 곳을 바라보고 가자!
정말 고생 많았다. 수능점수로 매기기엔 너무나도 고귀한, 아름답고 무한한 너희 미래를 계속 응원해줄게! 고맙다 민기야!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