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 (누가복음 5 : 1 - 7)
서 론 : 예수님의 초기전도는 갈릴리부터 시작되었는데 여러 회당과 갈릴리 바닷가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은 게네사렛 호수에 이르셨습니다. 게네사렛 호수란 갈릴리 바다를 말합니다. 이 호수는 면적이 엄청 넓어서 바다란 말로 불려졌지만 실은 담수로 된 호수입니다. 예수님은 무리의 옹위를 받으며 이 호수에 이르시고 효과적인 전도를 위하여 그곳에 놓여 있는 배 한 척에 오르시어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생애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온 사건이 바로 여기서 생겼습니다.
1. 베드로의 생애에 밤에 찾아오신 예수님 베드로가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 예수님을 따르므로 그의 제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하룻밤의 상면을 마친 후 이 게네사렛 호수에서 다시 만나게 된 것입니다(요1:40-42). 베드로의 결정적인 부르심이 이곳에서 이루어졌습니다. (1)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찾아오신 때는 베드로가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인생이 밤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그의 직업을 따라 가족의 생계와 생존을 위해 그날도 밤이 맞도록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날 밤 그가 한 많은 수고에 비하여 얻은 것이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날이 밝아오자 고기잡이를 중단하고 호숫가에 배를 대 놓고 실의에 찬 모습으로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이처럼 그의 인생의 어려운 밤에 예수님이 그를 찾아오시어 그를 부르심으로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의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2) 예수님은 베드로의 역경 속에 찾아오셨습니다. 인생에게 찾아오는 고난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인생에 고난이 오는 것은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최적의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호숫가에서 그물을 씻는 중에 예수님을 만났다고 하는 일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찾아가실 수 있는 기회로 베드로에게 고난의 밤을 주신 것입니다. (3) 베드로는 그의 인생의 시련 속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처음에 예수님은 무리가 옹위한 중에 그 무리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옹위한 무리들의 수효가 늘어나자 배에 오르신 것입니다. 이제 호숫가에서 그물을 씻고 있었던 베드로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청중가운데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베드로의 마음에 무엇인가 와 닿는 것이 있었으며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 흡인력이 있었습니다.
2.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게네사렛 호숫가에는 두 개의 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예수님은 베드로의 배에 오르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중에 예수님에게 자신의 배를 빌려드렸습니다. 베드로는 자기 배를 주님께 바치는 헌신이 있은 후에 복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헌신에 인색합니다. 봉헌을 즐겨하지 않습니다. 심는 대로 거두는 하나님의 법칙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자기 배를 예수님께 빌려드린 일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이 받지 못한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신 예수님은 드디어 베드로를 향하여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위하여 배를 빌려 준 베드로를 공수로 돌려보내지 아니하신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을 때에도 먹고 남은 12바구니를 모아 생선과 보리떡을 바친 어린 소년에게 돌려주셨습니다. (1) 베드로는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는 일이 고기를 잡을 수 있는 방법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새벽녘에는 고기가 없을 뿐 아니라 깊은 곳에는 고기떼가 모이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는 베드로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선생님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나이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그물을 내리라고 하신 그 자리는 이미 베드로에 의해 몇 번인가 그물을 내린 장소임이 틀림없습니다. 베드로는 여기서 기로에 서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경험을 거울삼아 그물을 던져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느냐, 아니면 자신의 생각을 포기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느냐 어느 것을 택하느냐는 것입니다. (2) 베드로는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고 말하고 그물을 바다에 내렸습니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누가 무엇이라 하든 고기가 잡힐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베드로의 생각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같은 베드로의 생각에서 발을 멈추기 때문에 더 깊은 신령한 은혜를 받지 못하고 다시없는 좋은 기회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러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베드로의 순종의 태도가 그로 하여금 놀라운 축복을 받게 한 동기가 된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 앞에는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 말씀에 순종하는 길 외 다른 것이 개입될 수 없는 것입니다. 결 론 : 베드로는 자신의 생애를 자기 의지나 생각을 따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그의 생활에 적용시켰습니다. 이 같은 베드로의 순종에 즉각적인 응답이 나타났습니다. “그리한즉 고기를 애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의 기적입니다. 순종에는 이 같은 기적이 따릅니다.
(19) 주여 나를 떠나소서 (누가복음 5 : 8 - 11)
서 론 :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린 결과 고기를 애운 것이 심히 많았습니다. 베드로는 이처럼 많은 고기가 잡힌 일에 놀란 나머지 주님의 무릎아래 엎드려 이처럼 고백했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 순간은 베드로의 심령이 깨어지는 순간입니다. 베드로가 새롭게 그의 인생 길을 출발하는 순간입니다. 베드로의 옛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순간입니다.
1. 기적에서 믿음을 가지게된 베드로 기적은 사람에게 믿음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기적이 믿음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기적을 대하는 여러 계층의 사람을 보면 각양 각색입니다. (1) 어떤 사람은 기적을 본 후에 더 큰 기적을 보여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많은 무리 앞에서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시어 배불리 먹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몇 일이 못되어 예수님께 이처럼 말했습니다.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기록된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요6:30-31). 이런 말은 그들이 예수님께 모세와 같은 방법으로 더욱 큰 이적을 보여달라는 요구였습니다. 예수님은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고 하시면서 탄식하셨습니다. 표적이나 이적은 믿음을 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절대로 다른 표적을 보이지 아니하셨습니다. (2) 어떤 사람은 기적을 보고도 의심하므로 불신에 빠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나면서부터 소경된 한 청년의 눈을 뜨게 하셨을 때 이 사건을 둘러싸고 쟁론이 벌어졌습니다. 이 기적을 확인하려는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은 소경 되었던 청년이나 그의 부모의 말을 믿지 않고 의심하므로 스스로 정죄에 빠진 것입니다(요9:17-34). (3) 그런데 베드로는 고기를 많이 잡게 된 기적을 통해서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베드로에게 믿음을 주고 그를 변화시킨 기적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베드로는 친히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그에게 있어서 약속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체험한 기적은 그 자신의 순종에서 온 것입니다. 이처럼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이 순종하므로 그 순종의 결과에서 나온 이적의 체험만이 베드로와 같은 믿음과 변화의 역사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2.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베드로의 변화는 그의 고백에서 나타납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고 한 베드로의 고백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변화 받는 모든 사람들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향하여 자기를 떠나달라고 호소했습니다. 자신의 죄를 바라볼 때 견딜 수 없는 그의 심정을 이처럼 토로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 말은 또한 자신은 앞에 계시는 주님을 감당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그 본체의 형상이십니다(히1:3). 우리가 이 같은 주님의 영광을 바라본다면 베드로처럼 “주여 나를 떠나소서”라고 하는 고백이 나오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고 한 베드로의 말에서 우리는 죄인의 몇 가지 형태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1) 죄인이라고 불리우는 죄인이 있습니다. 이 죄인은 아담의 혈통적인 자손으로 이에 대하여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롬6:23). 이 죄인들은 전혀 소망이 없는 죄인들입니다. (2) 예수님이 찾은 죄인이 있습니다. 이들은 주님께 잃은 양들입니다. 예수님은 이 잃은 양을 위해 오셨습니다. 주님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잃은 양을 가리키신 말씀입니다. 이 죄인은 복음에 의하여 반드시 부르심을 받게 되며 이 죄인들은 회개하여 예수님을 믿으므로 생명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3) 의인이 된 죄인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들은 의인이 된 죄인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았지만 이 의는 하나님의 의의 법적인 선언이지 우리의 육신이 실질적으로 의로워진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몸은 여전히 죄인입니다. 죄인이라고 하는 말은 우리가 의롭다고 인치심을 받은 이후에도 여전히 죄를 범할 수밖에 없는 죄인들이란 뜻입니다. “만일 우리가 범죄치 아니하였다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요일1:10). 그러나 이런 죄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속한 죄일 뿐 우리의 구원이나 천국에 가는 데는 아무런 영향이 없는 죄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롬8:1).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요13:10). 결 론 : 베드로는 주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이처럼 자기를 낮추고 죄인임을 고백하는 베드로를 향하여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의 생애는 과연 주님의 이 소명의 말씀대로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의 사명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20) 주여 원하시면 하실 수 있나이다. (누가복음 5 : 12 - 16)
서 론 : 자기 인생에 절망적인 한 사람의 모습을 봅니다. “온 몸에 문둥병 들린 사람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를 만난다는 일은 사람에 따라 놀라운 운명의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보고 만나고도 아무런 유익이나 도움을 얻지 못했다면 이 사람은 심히 유감스러운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시 돌이올 수 없는 절호의 기회를 영원히 상실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문둥병자는 그의 믿음의 간구로 깨끗함을 받아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새로운 생애를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1. 문둥이의 간구 온몸에 문둥병 들린 사람이 어떤 경로로 주님을 찾아 나왔는지에 대해서는 모릅니다. 그에게는 그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주님 앞에 나온 후에 어떤 태도를 가지고 주님과 접촉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1) 그는 자신의 기대이상의 분을 잘 찾아 나왔습니다. 이 문둥병자가 만약에 의원을 찾아갔다면 그에게는 별로 도움을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유명한 의사라도 문둥병자를 치료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 인생의 문제 해결자가 되시는 예수님을 바로 찾아간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비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자지와 긍휼을 베푸시는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어떤 소청도 물리치지 아니하십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라”고 하셨습니다(요14:13). 우리는 복음서에서 주님을 찾아 나와 진실하게 간구한 사람 중에 단 한사람도 물리침을 받은 사람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온 몸에 문둥병이 들린 이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 나온 것은 그에게 말할 수 없는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이 문둥병자는 주님의 자비에 호소했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이 같은 그의 간구는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하는 그의 간절한 호소가 깊숙이 깔려있는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은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자신이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할 죄인임을 깨닫는 사람이 불쌍히 여기심을 받을 사람입니다. (3) 이 문둥이는 주님의 뜻에 의지했습니다. “주여 원하시면”이라고 간구한 그의 기도는 주님의 뜻대로 되기를 바라는 마음의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주님이 자신의 병을 고치심이 주님의 뜻인 줄로 알았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을 안다는 일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주의 뜻을 따라 구할 때 응답을 받게 되고 주의 뜻을 따라 46 \ 누가복음
살아갈 때 우리의 생애에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4) 이 문둥병자는 믿음으로 구했습니다. “원하시면 나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이 간구는 믿음의 기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실 수 있나이다”의 기도는 주님이 하시지 않을 수 없는 기도입니다. (5) 주님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역사는 명령의 역사입니다. 말씀의 명령으로 우주만물을 만드신 주님께서는 만물을 향하여 모든 명령을 내리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의 말씀가운데 “내가 원하노니”라고 하신 말씀에서 그의 자비와 긍휼하심을 바라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문둥병자가 그 병으로 고통받는 것을 원치 아니하셨습니다. 그를 고쳐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주님은 무엇이든지 우리로 잘되기를 원하십니다.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큰 믿음과 사랑을 가지고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 그의 뜻대로 구하는 생활이 필요한 것입니다.
2. 예수님의 경계 (1) 예수님은 이 문둥병자에게 아무에게도 그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경계하셨습니다. 이처럼 말씀하신 의도를 두 가지 면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그를 고쳐주신 일은 결코 다른 사람에게 그 사실을 알리시려는데 있는 것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기적은 전파될 필요가 없습니다. 전파돼야 할 것은 기적이 아니라 복음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런 기적 때문에 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복음전파에 지장을 초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내가 다른 동리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고 하셨습니다(눅4:43). (2) 예수님은 그에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고 하셨습니다. 레위기에 기록된 율법에 의하면 문둥병에 걸렸던 사람이 나음을 입으면 하나님이 명하신 예물을 가지고 제사장에게 가서 증거를 받아야 가정에 들어갈 수 있었고 자신의 깨끗해진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 할 수 있었습니다. (3) 예수님은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아버지와의 영적인 교제를 위해 필수적인 일이셨습니다. 바쁘신 중에도 아버지와의 교통은 끊어지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한 본체를 이루고 계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아버지와의 교제가 없이는 존재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로 연합된 몸이기 때문에 그와 항상 기도로 교통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 론 : 우리는 다른 일 때문에 기도하는 시간을 희생합니다. 그리고 기도 못하는 이유를 바쁘다는 구실에 둡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일보다 더 중요고 바쁜 일은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21) 죄를 사하시는 주님의 권세 (누가복음 5 : 17 - 26)
서 론 :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그의 주변에는 말씀을 듣고자 모여든 무리뿐 아니요 병을 고치려는 많은 병자들로 붐볐고 그에다 또 예수님을 책잡으려는 조직적인 일단의 무리들까지 들어 있었습니다.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들과 교법사들이 앉았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혹 예수님의 언동 중에 율법으로 책잡을 것이 없을까? 기회를 노렸고 그 기회가 도래하면 즉시 일제히 반격을 가하여 예수님을 여지없이 매도했고 상부에게 보고할 보고재료를 만들고 있었던 무리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들과 끊임없이 싸워야 했습니다.
1.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문제의 발단은 한 중풍병자의 병고침의 사역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그 동리에 한 중풍병자가 있었습니다. 이 환자는 침상에 메지 않으면 거동할 수 없는 중증의 환자였기 때문에 친구들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그의 이웃 친구들이 그를 침상에 메고 예수님을 찾아왔으나 인산인해처럼 모인 많은 무리들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하고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 한 사람이 기발한 기지를 냈습니다. 환자가 누어있는 침상을 지붕위로 올려가 지붕의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 채 무리 가운데로 내려 예수님 앞에 달아 내린 것입니다. (1)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을 보시는 분입니다. 죄의 사유함에는 회개가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을 구세주이심을 믿고 그 앞에 자신의 죄를 자복하는 회개 없이는 죄사함의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2)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죄 사함의 선언을 내리셨습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같은 예수님의 선언은 두 가지 중에 하나임을 나타내시는 말입니다. 하나는 그가 죄 사함의 권세도 없이 한번 시도해 본 말이던가, 아니면 그가 정말로 죄 사함의 권세를 가지고 계신 하나님이시던가 하는 것입니다. (3) 이 말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새로운 도전을 시도했습니다. 그들은 서로 의논했다고 했습니다.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그들의 말은 틀림이 없는 말입니다. 죄의 사유함이란 하나님 한 분 외는 감히 내릴 자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나사렛 동리의 목수의 아들인 예수가 했으니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율법과 장로들의 유전과 교만에 가리워서 예수의 바른 모습을 바라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했습니다(요1:5). 말의 올무를 잡으려는 바리새인들에게는 도전의 호기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따라다니고 추적하면서 행동을 감시하고 말씀의 올무를 잡으려고 한 일은 결국 예수님을 죽이려는 악한 음모에서 발단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참으로 좋은 기회를 만났다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 것입니다(막36:6).
2. 나타난 예수님의 권능
예수님은 이때 죄 사함의 권세를 나타내시는 분으로 자신의 모습을 보이시기로 하셨습니다. (1) 예수님은 그들에게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유익이나 자신의 메시야된 증거를 위해서는 기적을 행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나 죄를 사하여 주시는 권세는 그의 입에서 나오신 말씀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권능으로 증거해 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2) 먼저 예수님은 단지 죄 사함을 준다는 말과 중풍병자를 고쳐주는 일과 어느것이 더 쉽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말뿐인 선언은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말로는 율법을 지킨다고 자랑하고 있지만 실상인즉 외식하는 거짓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속이고 사람을 기만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다고 하셨습니다(고전4:20). 예수님은 그의 권능으로 죄를 사하실 수 있는 권세가 있으심을 나타내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창조적인 명령이셨습니다.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말씀이시요 지금도 만물을 그 말씀으로 붙들고 계십니다(히1:3).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 명하사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사람이 저희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었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찾아왔을 때는 침상에 누운 채 여러사람의 도움으로 왔지만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자신이 누었던 침상을 걸머지고 자기 스스로 자기 집으로 걸어간 것입니다. 결 론 : 이런 주님의 권능을 바라본 모든 사람들은 너무나도 기이한 일에 놀랜 나머지 이처럼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하니라.” 예수님을 참람하다고 비방한 바리새인들과 교법사들은 그들의 입을 다물었습니다. 주님의 권능 앞에서 그들은 부끄러움을 당하고 찔림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열려진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돌같이 굳은 마음이 녹아난 것은 아닙니다. 완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기적을 보고도 믿음을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22) 내가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누가복음 5 : 27 - 32)
서 론 : 예수님이 세상에서 하신 일은 한결같이 선한 일이셨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사람들의 비방과 모함과 핍박을 받았습니다. 세시의 집에 초대받아 식사를 하시면 바리새인들은 비방하기를 저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악의에 찬 비방이나 모함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내가 의인을 부르러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레위의 부르심 우리는 예수님의 전도초기에 그의 제자들을 부르시는 주님의 여러 가지 모습을 바라보게 됩니다. 오늘은 주님이 세관 앞을 지나시다가 레위라 하는 세리를 부르시는 모습을 바라봅니다. (1) 예수님은 레위를 보시고 나를 좇으라고 명하셨습니다. 레위한 사람은 세관에 근무하는 세리요 그가 부르심을 받은 후에 마태란 이름이 주어졌으며 마태복음을 기록한 제가가 되었습니다. (2)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레위의 태도는 훌륭했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레위는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라고 말하지 아니했습니다(눅9:60).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라고도 말하지 않았습니다(눅9:61). 레위가 주님을 따른 태도에 대해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고 했습니다.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렸다고 했습니다. 직장도 버리고 세리의 좋은 자리도 버렸습니다. 사람에게 기회란 그리 쉽게 오는 것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주님의 제자가 되는 기회란 그리 쉽게 오는 것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주님의 제자가 되는 기회란 한번 놓치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단 일회적인 기회였습니다. 그것을 레위는 붙잡은 것입니다. (3) 레위는 예수를 위해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레위가 베푼 이 잔치에서 우리는 레위의 기쁨과 감사를 알 수 있습니다. 레위는 그의 신분이 비록 세리이기는 했지만 그의 성경적인 지식이나 메시야에 대한 소망은 누구보다도 간절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자기를 부르실 때에 이미 레위는 자기를 부르시는 예수님이 이스라엘이 기다리는 메시야이심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그의 태도에서 알 수 있습니다. 레위는 즉각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모시고 큰 잔치를 배설했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기쁨, 구원을 받은 기쁨은 이처럼 주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하여 큰 잔치를 베푸는 감사와 봉사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2. 병든 자에게 필요한 의원 레위가 베푼 잔치에는 세리로 근무하는 레위의 많은 친구들도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이 장치자리를 엿보고 있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말할 것도 없이 예수님을 책잡기 위해 뒤를 따라 다니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고 비방한 것입니다. (1) 함께 먹고 마시는 일은 한 동류로 취급되어 왔습니다. 유대인들은 함께 먹고 마시는 일을 중요시했습니다. 세리를 죄인으로 취급하는 바리새인들이 그들과 함께 잔치자리에서 음식을 먹는 일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기 때문에 이같이 행한 예수님의 태도에 대해 그들은 비방을 가한 것입니다. (2) 이에 예수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데 있나니”라고 하신 말씀에서 죄인과 예수님과의 관계를 명백하게 들어내 놓으셨습니다. 이것은 의인과 죄인에 대한 비유적 설명이 되겠습니다. 여기서 의원이란 바로 예수님 자신을 가리킨 것이기 때문에 건강한 자란 예수님이 필요로 하지 않는 자란 뜻입니다. 이들은 스스로가 자신들에게는 죄가 없다고 믿고 있는 자들입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란 말씀에서 건강한 자란 의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무리들은 바로 자신들을 의인이라고 믿고 있는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들에게 의원으로 오신 예수님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의인은 예수님과 상관이 없으므로 예수님은 그들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들의 죄악 중에서 죽을 사람들입니다. (3) 죄인이란 병든 자를 말합니다. 병든 자는 자신의 병을 알고 있습니다. 이처럼 죄인이란 자신의 죄를 바라보고 통회하는 자를 말합니다. 그 죄의 비참함을 알고 마음을 찢는 자를 말합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율법에서 의를 얻은 줄로 알고 율법적인 의를 찾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자신의 죄를 치료해 주고 건강을 주는 병든 자의 의원이 되신 예수님이 필요치 아니했습니다. (4) 예수님은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죄인이란 하나님을 떠난 모든 인간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특별히 잃어버린 자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눅19:10). 죄인을 부르신다고 하신 것은 잃은 양을 찾으시는 모습으로 목자의 음성을 들려주는 일입니다. 회개시키려 오셨다는 말씀은 그들의 죄를 깨닫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결 론 : 병든 자가 의원의 치료를 받듯이 죄인들이 죄인의 의원이 되시는 예수님의 치료를 받을 때 놀라운 치유의 효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의원 되신 예수님께서 그의 죄를 사유해 주십니다(눅5:20). 사망에서 건져내 주십니다(요5:24). 다시는 병들지 아니하는 새로운 생명을 주십니다(요11:25).
(23) 새 술은 새 부대에 (누가복음 5 : 33 - 39)
서 론 :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이차적인 공격을 시도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방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세리인 레위를 부르셨을 때 레위가 이에 감사하는 뜻으로 자기 친구들과 더불어 예수님과 제자들을 초청하여 잔치를 배설했을 때 한 말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고 말씀하심으로 그들의 이 같은 비방을 물리치셨던 것입니다.
1. 바리새인들의 금식과 기도 바리새인들은 금식도 자주 했으며 기도도 길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기도에 대하여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라고 책망하셨습니다(막12:40). (1) 바리새인들이 자랑하는 기도와 금식을 외식 적인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통하여 주신 금식 일은 속죄 일이었습니다(레16:29-34). 그런데 그들은 자주 금식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에 열심이 있다는 사실을 과시하기 위하여 율법에 규정된 것보다 훨씬 많은 규례를 정하고 그것을 실천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규례를 실천했던 것이 아니라 외식으로 흘렀습니다. (2) 세례요한의 제자들도 금식과 기도를 자주 했습니다. 요한은 그의 생활에 나타난 바를 보면 금욕주의 자였습니다. 그의 영향을 받은 그의 제자들도 율법적인 생활에 열심이었고 장로들의 유전이나 바리새인들의 생활에 젖어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생활에 자주 금식이 있었습니다. (3) 그러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은 금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금식으로 말미암은 열매에 있었습니다.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사58:6-7). 이것은 금식으로 말미암는 결실입니다. 이런 결실이 없는 금식은 무익한 금식이며 외식적인 금식임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2. 혼인집 손님들과 금식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고 공박한 바리새인들의 비방에 대하여 예수님은 그 사실을 시인하시면서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 52 \ 누가복음
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저희가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신랑은 혼인집 주인이요 기쁨의 주인입니다. 예수님은 임마누엘로 오신 우리의 신랑이십니다. 그는 모든 인류의 기쁨이 되시는 신랑이십니다. 그로 말미암아 죽음이 물러가고 생명을 가져왔으며 정죄가 떠나고 의로움이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에게 신랑이란 말이 적격인 것은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그 분과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2) 예수님이 계신 곳은 그곳이 바로 혼인집입니다. 생명의 풍성한 축복의 잔치가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같은 혼인잔치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잔치에 오소서 하라”(마22:2-4). 이런 혼인잔치에 금식이란 가당치 않은 일입니다.
3. 새 술은 새 부대에 예수님은 낡은 옷과 새 옷,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의 비유를 통해서 율법아래서 낡고 묵은 것들이 생명과 의를 주시는 새 언약에 합당치 않다는 사실을 밝히셨습니다. (1)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율법아래서는 슬픔과 애통의 표시로 금식이 필요했습니다. 이것은 죄로 인한 탄식입니다. 이곳에는 기쁨이나 소망이 없습니다. 새 옷엔 이런 것들이 필요치 않습니다. 그곳에는 구원의 기쁨, 생명의 풍성, 소망의 넘침, 은혜와 감사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2)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새 포도주란 새 안약, 즉 복음을 말합니다. 묵은 포도주란 율법을 말합니다. 새 포도주에는 강력한 발효성이 있지만 묵은 포도주엔 발효성이 없습니다. 의의 공급력, 생명의 공급력, 은혜의 공급력이 오직 새 포도주인 복음에만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율법적인 마음에 새 포도주를 넣으면 부대가 터져 버리기 때문에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인 변화 받은 마음에 넣어야 합니다. 이 마음을 성령이 임재하시는 마음입니다. 결 론 : 바리새인들은 율법적 규범에 얽매인 나머지 더 좋은 하나님의 은사엔 눈이 어두웠습니다. 그들은 묵은 포도주인 율법에 취해 있었기 때문에 더 좋은 맛을 가진 새 포도주를 원치 아니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24)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 (누가복음 6 : 1 - 11)
서 론 : 율법에서 안식일에 대한 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예수님은 때때로 바리새인들로부터 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많은 공격을 받으셨습니다. 그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 때 안식일에 대한 다른 또 하나의 문제가 제기된 것입니다. 제자들이 손으로 밀 이삭을 비벼먹는 것을 바라본 바리새인들이 “왜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는 것이냐”고 항의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건을 계기로 너무나도 값진 말씀을 들려주셨는데 그 말씀이 바로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1. 이삭을 지른 일과 안식일의 시비 바리새인들이 공격하는 공격의 목표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는데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냐”고 트집을 잡은 것입니다. 이삭을 자른 일이나 그 이삭을 손으로 비빈 일이나 안식일을 범하는 죄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율법 해석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아셨지만 이곳에서는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지 아니하시고 이보다 더 큰 일도 때로는 하나님이 용납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다윗의 경우를 예를 들어 반박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다윗의 경우를 예로 제시하신 것은 바리새인들의 율법적인 논쟁을 잠재우려면 그들의 조상과 왕으로 생각하고 있는 다윗을 등장시켜야 하겠기에 이렇게 하신 것입니다.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하여 도망 다닐 때 놉에 가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때 다윗은 자기를 따르는 소년들과 함께 매우 시장하였으므로 아히멜렉에게 청하여 먹을 것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히멜렉이 가지고 있었던 떡은 성전에 비치된 진설병으로 이 떡을 율법에 따라 제사장만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 떡을 심히 시장하여 죽게된 다윗과 그의 부하들에게 먹도록 허락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이처럼 예로 들어 말씀하신 다윗의 이 같은 행적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무엇이라고 답변할 길이 없었습니다.
2.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예수님께서 이들 바리새인들에게 결론적으로 들려주신 말씀은 그들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놀라운 폭탄적인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1) 안식일의 주인이란 말씀은 천지창조의 주인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창 54 \ 누가복음
조사역을 마치신 후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고 했습니다(창2:1). 이처럼 하나님께서 창조를 마치신 후, 안식하셨기 때문에 천지창조의 주인이 아닌 존재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2) 안식일의 주인이란 말은 안식일을 제정하신 당사자란 뜻입니다. 안식일을 제정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창2:3). 안식일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율법에 안식일의 규정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분이라면 그 예수님은 또한 안식일을 제정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예수님이시기에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3) 안식일의 주인이란 안식일을 지금도 주관하시고 계시는 분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이 제정하신 안식일은 그 의미가 인간에게 주실 영원한 안식에 있었습니다. 이런 안식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누릴 인류의 최대의 축복입니다. 이 안식일이 율법에 규정된 것은 그리스도안에서 장차 이루어질 참 안식의 그림자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히4:4-11). 둘째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그의 부활하심으로 영원한 참 안식에 들어가셨습니다. 우리의 안식은 그리스도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이 바라는 안식의 모습이며 우리는 그 안식에 들어가기 위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주님의 부활의 날을 주의 날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4) 이런 사건이 있은 후 또 다른 안식일을 맞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가 말씀을 가르치실 때 오른손 마른 사람을 앞에 놓고 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그의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고 있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이 그들에게 묻기를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안식일을 지키는 그리스도인의 태도에 대하여 분명한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의 날을 지키는 일에 구약적인 안식일의 규례에 얽매어 율법적인 안식일을 지키려는 비 복음적인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결 론 : 예수님은 오른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손을 내밀자 즉시 그의 손이 회복되었습니다. 이 같은 주님의 권능과 능력을 보고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완악한 마음이 녹아나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를 어떻게 처치할까 의논했습니다. 완악한 마음은 회개도 거절하고 순종도 거절하고 성령의 감동도 거절합니다. 내 마음이 완악해지지 않도록 늘 자신을 살피고 돌보아야 합니다.
55 누가복음
(25) 사도를 택하신 예수님 (누가복음 6 : 12 - 16)
서 론 : 예수님의 공생애 중 12사도를 택하신 일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뒤를 이어 복음사역의 주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중심으로 그의 공생애를 지내셨습니다. 그들에게 믿음을 주시는 일에, 확신을 주시는 일에,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셨습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그를 따르는 많은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수의 많음보다 복음을 능력 있게 전할 정예부대가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의 12사도들에 대한 제자 훈련은 과연 예상대로 적중하여 온 세계에 복음의 불을 지피는 일에 성공하실 수 있었습니다.
1. 산으로 가사 기도하신 예수님 예수님이 12사도를 택하신 일은 공생애에 들어가신 후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다음입니다. (1) 예수님이 산으로 기도하시러 가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지상생활에서 그의 기도는 그칠 날이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라고 하신 말씀에서 예수님의 기도는 습관화된 그의 생활의 한 부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눅22:39). 예수님은 “항상 기도하며 깨어있으라”고 하셨습니다(눅21:36). “무시도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앱6:18). (2) 예수님은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의 자세는 무릎을 꿇는 기도였습니다(눅22:41). 예수님의 기도는 힘쓰고 애쓰는 기도였습니다(눅22:42). 이날 밤 예수님이 오래도록 기도하신 기도의 제목은 12사도를 택하시기 위한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이 이토록 밤이 맞도록 기도하신 이유 중 하나는 가룟 유다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유다는 차라리 세상에 태어나지 아니함만 못한 비참한 생애를 살았지만 주님은 그의 그런 운명을 이미 아시고 제자로 삼으셔야 할 주님으로서는 마음이 아프셨을 것입니다.
2. 12명의 사도를 세우신 예수님 이미 날이 밝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