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책 소개 및 저자 소개
『조선시대 생활사 3 _ 의식주, 살아있는 조선의 풍경』 은 2006년 3월에 출판사 ‘역사비평사’에서 출간된 책이다. 저자는 ‘한국고문서학회’이다. 한국고문서학회는 1991년 한국 고문서 연구를 위해 설립된 학회로 한국 고문서 또는 한국사를 전공하는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학회지인 『고문서연구(古文書硏究)』의 발간을 통해 고문서 연구자들의 이론을 체계화시키는 데에 기여했으며, 대중서의 간행을 통해 사회적으로도 고문서의 중요성을 대중에 알리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단체이다. 본 책 역시 일반 대중에게 고문서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편찬한 한국고문서학회의 대중서 중 하나이다.
본 책은 조선시대의 생활사 중 의식주에 관한 다양한 역사적 사실들을 정리한 도서로 의, 식, 주 총 세 개의 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인 ‘신분의 상징, 복식 문화’ 는 ‘1장 _ 18세기 남성 복식 스케치’, ‘2장 _ 의복과 머리 모양으로 표출한 여성의 멋’, ‘3장 _ 법과 제도로 보는 복식 문화’ 로 이루어져 있다. 1부에서는 조선 후기 남성 복식과 여성 복식에 관한 풍속화와 법적, 관습적 규제를 통해 조선 시대 복식 문화의 실재와 이념을 대비해놓았다. 필자가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고서와 같은 텍스트 자료가 아닌 ‘풍속화’를 중심으로 복식 문화를 연구하였다는 점이다. 미술, 예술사 전문가가 아닌 역사학자의 눈에 비친 풍속화 그리고 그 속에 나타난 조선 후기 복식의 실상은 필자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2부인 ‘맛과 멋의 조화, 음식 문화’ 는 ‘1장 _ 주식, 식생활의 근원’, ‘2장 _ 부식, 다양한 먹거리의 풍요로움’, ‘3장 _ 기호식품, 인간의 본능적 욕구’, ‘4장 _ 구황식품, 굶주림을 해결하다’ 로 이루어져 있다. 2부에서는 인간의 본능적 욕구인 식생활을 주식, 부식, 기호식품, 구황식품 총 4가지로 나누어 각각의 연원에서부터 실제 어떤 음식을 어떠한 방식으로 즐겼는지를 망라하여 보여준다. 양반들이 남긴 각종 일기 자료를 활용하여 그들의 생활 속에 녹아 있는 음식 문화를 보여주었는데 특히 밥을 주식으로 하는 식생활, 김치나 젓갈 등의 부식 문화, 술과 담배로 대표되는 기호식품은 현대 생활과의 접점이 많아 현대인의 생활양식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3부인 ‘참삶의 공간, 주택 문화’ 는 ‘1장 _ 조선시대의 삶이 담긴 전통 주택’, ‘2장 _ 조선시대 사람들의 주거 생활’, ‘3장 _ 온돌과 주거 생활의 변화’ 로 이루어져 있다. 3부에서는 집터를 잡는 과정에서 시작하여 상량 및 집들이에 이르기까지 조선시대 양반가의 집짓는 과정을 모두 보여주었으며 조선시대 주택의 각 공간을 세세하게 설명하여 재구성하였다. 또한 양반을 비롯한 조선시대 사람들의 주거 양태와 온돌로 대표되는 한국적 주거 문화의 특징을 잘 드러내었다.
선정 이유
필자는 세 개의 부 중 2부인 ‘맛과 멋의 조화, 음식 문화’ 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최근 음식에 대한 콘텐츠들이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며 음식 문화가 점차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먹방’이라는 콘텐츠를 통해 다른 사람이 맛있는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고 대리만족을 느끼며 대중매체에 출연하는 많은 요리사들이 요리를 하는 모습에 열광하고 그들의 레시피를 따라하기 시작했다. 이제 음식은 단순히 당질이나 지방, 혹은 단백질과 같은 영양소를 섭취하는 매개일 뿐만 아니라 경제적이며 문화적인 전략 상품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음식 문화의 대중화’ 라는 현상이 현대 사회에서만 발생했던 것은 아니다. 18세기 조선 시대에는 음식 관련의 기존 지식들을 종합하고 체계화한 서적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그러한 매체들을 통해 대중들은 지식으로서의 음식 문화를 접하기 시작했다. 각종 음식 저서들의 편찬을 통해 음식은 농업과 마찬가지로 지식과 적용이 필요한 과학적인 지식이자 그들의 삶을 관통하는 요소가 된 것이다.
필자 본인은 평소에도 음식 관련 콘텐츠들에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으며 음식 문화의 대중화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역사학과의 학부생으로서 현대의 음식 문화가 가지고 있는 특징들을 과거 조선 시대의 음식 문화를 통해 살펴보고 현대의 음식 문화의 매커니즘이 조선 시대의 음식 문화와 어떤 부분에서 닮아 있는지, 혹은 현대의 음식 문화가 더욱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어떤 점을 본받아야 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책을 비롯한 다양한 논문들을 통해 조선 시대의 음식 문화에 대해 고찰해보고자 한다.
2. 본론 - 조선, 음식을 탐하다.
주식, 식생활의 근원
조선시대 사람들은 ‘쌀밥에 고깃국’을 최상으로 여겼다. 하지만 쌀은 모든 사람들의 배를 채울 수 있을 정도로 생산되지 않았다. 상류층들은 주변 요인에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고 쌀밥을 주식으로 할 수 있었지만 하층민들이 그러한 삶을 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들은 농사를 지어 절반은 지주에게 납부하고, 일부는 국가에 세금으로 납부해야 했다. 그러고 나면 실제 그들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조선시대의 주식은 계층과 지역, 그리고 계절적인 요인에 따라 달랐다. 유족한 양반과 일반 하층민의 주식이 달랐으며, 논농사가 집중된 하삼도 지역과 산간 지역의 주식이 서로 달랐다. 계절적인 요인 역시 주식을 결정하는 주요 변수였는데, 가을에 심은 보리를 수확하는 맥절을 기준으로 그 이전과 그 이후의 주식이 달랐다.
본 책에서는 조선시대의 고위 관직자였던 유희춘과 벼슬을 얻지 않은 일반 양반인 오희문의 식생활을 비교하여 상층민과 하층민의 주식 생활을 묘사하였다. 유희춘과 같은 고위 관직자의 주식은 항상 쌀밥이었다. 그의 수입은 토지로부터 들어오는 소출과 노비에게서 거두는 신공이 있었다. 이는 관직의 보유 여부와는 상관없이 양반이라면 누구나 소유할 수 있었던,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수입원이었다. 여기에 그가 벼슬의 대가로서 국가에서 받았던 상당한 규모의 녹봉까지 합하면 실로 어마어마한 양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당시 상층 양반이 주식으로 쌀밥을 먹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으며 오히려 그들은 쌀의 질과 밥맛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반대로 오희문의 경우를 살펴보면 유희춘과 다르게 너무나도 빈곤한 주식이 아닐 수 없다. 임진왜란 때 피난을 다니면서 잡곡밥과 죽으로 연명하는 등 하층민 식생활의 전형을 보여준 그는 임진왜란 때의 피난 생활을 『쇄미록(瑣尾錄)』이라는 일기에 기록하였다. 이 책에 따르면 임진년에는 걸식자가 많았으나 다음해에는 다 굶어 죽어 산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 비록 집을 지키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유행병과 배고픔으로 인해 죽은 사람들이 속출했다는 사실 등 일반 백성의 생활은 참담의 극에 달했으며,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기까지 했다는 기록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슬프게 한다.
부식, 다양한 먹거리의 풍요로움
우리 민족은 주식인 밥과 더불어 국, 찌개, 김치, 나물, 생채, 조림, 구이, 젓갈, 마른 반찬, 전, 회, 찜 등 다양한 부식을 마련해 먹었다. 부식의 재료 중 가장 많이 사용되었던 재료는 각종 채소류였다. 제철에 나는 채소들을 건조시키거나 김치로 가공하여 오랜 기간 동안 저장해두고 먹었다. 또한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다양한 어패류를 젓갈과 건어물 등으로 가공해 먹기도 하였다.
특히 가공 및 발효식품은 조선시대를 비롯하여 한반도를 대표하는 부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생산물의 저장과 보관시설이 미비하고 계절과 지역에 따라 생산량이 많이 차이가 났던 탓에 조선시대 사람들은 생존과 고른 영양 상태의 지속을 위해 식품을 오래 보관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 속에서 장과 김치, 젓갈과 같은 각종 가공, 발효식품들이 만들어졌다.
콩을 이용한 가공음식인 장은 전통적인 식생활의 근원이었다. 각종 음식의 기본 조미료로 사용되었으며 현대에 비해 비교적 어류나 육류의 섭취가 어려운 환경에서 보편적인 단백질 공급원이 되었다. 『삼국사기』나 『고려사』에서 나타났던 장의 중요성은 조선시대에도 드러난다. 이문건의 『묵재일기』 에 의하면 지방관이 경내를 순시할 때 가난한 민호에게 소금과 장을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이렇듯 장은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중요한 음식이었다.
김치는 채소를 염장하고 발효시켜 만드는 우리의 대표 식품이다. 오늘날과 같은 김치의 형태가 등장한 것은 조선 후기이다. 『규합총서』에는 김치를 지칭하는 용어로 ‘침채’가 사용되었으며 오늘날에도 존재하는 나박김치, 짠지, 소박이, 장아찌 등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이 시기에는 조선 전기에 비해 배추가 많이 사용되었으며 고추, 어물, 젓갈 등 다양한 맛을 내주는 식재료들의 사용 빈도가 점점 증가하였다.
젓갈은 수산물을 소금에 절여 삭힌 가공 및 발효식품으로 젓과 식해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라는 지리적인 조건으로 지방마다 계절에 따라 다양한 종류의 젓갈을 즐겨 만들었다. 소금이 풍부한 서해안에서는 어패류의 살과 내장, 알 등을 20%의 염도로 상온에서 절여 만든 젓갈을, 소금이 적은 동해안에서는 생선에 소금과 밥 등의 전분을 함께 섞어 절인 식해를 담가 먹었다.
필자는 이 ‘부식’이 한식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한식은 현재 한국인의 식사를 뜻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전통음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한국인의 일상식은 밥을 주식으로 하고, 여러 가지 반찬을 곁들여 먹는 식사 형태다. 주식은 쌀밥과 잡곡밥을 기본으로 하며 부식으로는 국이나 찌개, 김치와 장류를 주로 먹었다. 이렇게 밥과 반찬을 같이 먹는 식사 형태는 여러 가지 식품을 골고루 섭취함으로써 영양의 균형을 상호 보완하는 합리적인 형태인 것이다. 다른 나라들에 비해 반찬의 종류가 많아 영양소를 골고루 섭취할 수 있는 우리나라 고유의 식사 문화는 서구의 식사 문화에 길들여진 21세기의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한식의 전통은 ‘집밥’ 이라는 하나의 음식 문화적 요소를 만들었고 이를 이용한 ‘집밥 백선생’, ‘냉장고를 부탁해’ 와 같은 음식 문화 관련 콘텐츠들은 우리나라 고유의 부식 문화와 현대의 다양해진 음식 문화를 결합하여 새로운 음식 문화의 세계를 선보이는 계기가 되었다.
기호식품, 인간의 본능적 욕구
현대에는 술과 커피를 포함한 각종 차와 담배 등을 가장 대표적인 기호식품으로 꼽는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기호식품으로는 술과 담배가 있다. 이 두 개의 기호식품은 국가 전체의 경제와 문화를 좌우할 정도로 그 영향력이 실로 컸다고 말할 수 있다.
필자는 조선시대의 음주 문화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술은 조선 건국과정에 영향을 주었을 정도다. 정도전은 경복궁의 이름을 지을 때 『시경』에 나오는 구절 중 하나인 “이미 술에 취해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덕을 도우리라”에서 큰 복을 빈다는 뜻의 ‘경복(景福)’ 이라는 두 글자를 따왔다. 이렇듯 술을 중요시하게 여겼던 조선 시대에는 질병 예방, 건강 추구, 장수 기원, 혼인, 기타 연회에서 술을 이용했다. 노동 과정에서 흥을 돋우거나 예술작품 제작에 영감을 얻기 위해, 그리고 친목 도모를 위해 술을 이용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주로 즐겨 마셨던 술은 크게 청주(淸酒)와 탁주(濁酒)로 나뉜다. 술은 거른 형태에 따라 청주와 탁주로 나뉘며, 또 이를 기준으로 자연스럽게 고급술과 중술로 나뉜다고 볼 수 있다. 탁주는 거르지 않아 누런 색깔을 띤다고 해서 황주(黃酒)라고도 불렀다. 청주는 소주라고도 부르는데 조선 초기까지만 하더라도 소주는 특정계급인 양반들에게만 접근 가능한 기호품이었고, 사치스런 고급주로 인식되었다. 곡식을 발효시켜 증류하기 위해서는 많은 양의 곡식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조선 성종 대 조효동은 “세종 대에는 사대부들이 집에서 소주를 드물게 썼는데, 지금 연회에서 모두 쓰므로 낭비가 심하니 금지하자”고 국왕에게 요청했고, 실제로 성종은 이를 받아들였다. 또한 소주는 너무 많이 마시면 중독이 되어 얼굴이 파랗게 되고 말을 못하는 구금(口噤)이 되며, 혼미하여 의식을 잃게 되기도 하는 폐단이 있기도 했다. 이처럼 소주는 매우 독해서 서민들의 건강에 폐단을 주기도 하였지만 양반 사대부가를 중심으로 빚어지고 사용되었기에 조선의 백성들은 주로 탁주를 즐겨마셨다.
조선시대에는 술을 잘 마시는 것이 자랑인 것과 같은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심지어는 국왕이 신하의 엄청난 주량을 들어 당호(堂號)를 지어준 일화도 있다. 당대의 술꾼으로 손꼽혔던 홍윤성을 위해 세조는 ‘바다를 기울여 술을 마실 정도’ 라는 의미인 ‘경해(傾海)’라는 당호를 하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분위기와 함께 술을 빚기 위한 쌀의 소비가 많아진다는 이유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금주령이 빈번하게 내려지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한시적인 조치로 내려질 때가 많았다. 금주령이 내려졌음에도 민간에서는 여전히 술을 빚었으며 금주령 당시 실질적으로 금지되었던 술은 청주이고, 탁주는 노동을 위한 술이자 선비들이 진정한 소통의 자리를 가지기 위해 마셨던 술이었다. 이렇듯 이미 인간 생활에 깊숙이 자리잡은 술은 어떤 권력으로도 쉽게 막기 어려웠다.
3. 나가며
음식 문화는 누구나 공유하는 필수불가결한 요소이지만 사람마다 이를 구현하는 모습은 다르다. 조선시대에는 음식 문화를 포함한 의식주의 구현을 통해 신분을 드러내었고 사회의 분위기를 사로잡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의식주야말로 인간 본연의 역사라는 점이다. 특히 이 글에서 자세하게 살펴보았던 조선시대의 음식 문화는 조선시대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결정지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사회적 분위기와 제도에 영향을 줄 정도로 조선시대 사람들의 생활 속에 깊이 스며들었다.
조선시대 사람들의 생활에 깊이 스며든 음식 문화는 이제 21세기 대한민국의 음식 문화에 영향을 주는 문화적 요소로 변화하는 과정에 있다. 음식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음식 문화의 역사는 이제 음식 문화적 콘텐츠로서 그 역할을 하고 있다. 백종원 현상, 먹방의 유행, 셰프라는 직업의 대중화 등이 이를 잘 드러내고 있으며 음식 문화를 중요시했던 조선시대 사람들의 생활상이 대한민국의 현대인들이 살아가는 모습에 그대로 투영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현대 사회는 세계화의 시대이다. 음식 문화 역시 세계화의 분위기에 따라 변화하고 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서구 음식 문화로 획일화되어가는 세계의 음식 문화 현장에서 이에 대응하는 민족적인 음식문화의 가치를 실현하는 방법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필자가 생각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대중화’이다. 따라서 이 책을 읽음으로써 우리의 민족적인 문화를 대중화하는 매체의 가치를 파악하고 ‘온고지신(溫故知新)’ 의 태도를 지닐 수 있는 대한민국의 국민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참고문헌
정혜경, 「한국 음식문화의 의미와 표상」, 『아시아리뷰』, Vol. 5 No. 1 (2015),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2015
이숙인, 「특집 2 : 18세기를 읽는 몇 가지 키워드, 통, 흥, 맛 ; 18세기 조선의 음식 담론」, 『한국실학연구』, Vol. 28 No. - (2014), 한국실학학회, 2014
김준혁, 「조선시대 선비들의 탁주 이해와 음주문화」, 『역사민속학』, Vol. - No. 46 (2014), 한국역사민속학회, 2014
첫댓글 같은 책이었지만 다른 시각으로 제가 바라보지 못한 부분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조선시대 의/식/주에 대한 많은 것을 배울수 있었습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