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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성탄 제1강
성육신하신 예수님
말씀 / 요한복음 1:1-14
요절 /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메리 크리스마스! 구주 예수님의 탄생의 은혜를 감사하고 축하합니다. 우리가 성탄하신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해 깊이 알 때 성탄의 은혜가 더욱 크게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을 밝힙니다. 요한복음 20장 31절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다시금 깊이 영접하므로 성탄의 은혜가 우리 심령에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요한복음 1장 1-5절은 요한복음에서 가장 어려우면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신성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예수님이 하나님임을 선포하며 시작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1).” 여기 ‘태초’는 엄밀히 말하면 창세기의 태초와는 달리 우주 만물이 있기 전부터 영원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우주가 존재하기 전 영원의 때에 말씀이신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태초에 무엇이 있었는가의 문제는 인류의 오랜 숙제였습니다. 이것은 철학자들이 고민하는 ‘제1원인자(the first cause)’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 모든 만물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으며 그 처음은 무엇으로부터 시작했을까요? 예를 들어, 스티븐 호킹의 빅뱅 이론으로 설명하고자 하더라도 빅뱅, 즉 대폭발이 일어나려면 에너지와 물질과 시간과 공간이 있어야 하는데 이런 것들은 도대체 어디서 왔을까요? 헬라 철학자들은 이에 대한 사색을 많이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공기, 물, 불, 숫자 등이 만물의 기원이라고도 이야기해 왔습니다. 그래서 사람 중에는 ‘태초에 물이 있었다’ 또는 ‘태초에 불이 있었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사도 요한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고 말합니다.
여기 ‘말씀’은 헬라어로 ‘로고스(λόγος)’입니다. 로고스는 두 가지 의미를 갖는데 하나는 만물의 근원이요 또 하나는 소통의 매개체라는 것입니다.
먼저, 로고스는 만물의 근원이 됩니다. 로고스의 철학적 의미는 만물을 이루는 이성적 원리입니다. 헬라의 스토아 철학자들은 우주 만물을 이루는 이성적 원리, 즉 제1원인자를 로고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AD 1세기에 유대 철학자 필로는 로고스를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하며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신적 존재로 이해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들이 말하는 로고스가 바로 예수님임을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사도 요한에게 로고스라는 단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창조 사역, 중보 사역을 나타내기에 매우 적합한 말이었던 것입니다. 또 구약적 배경으로 볼 때 하나님은 말씀의 하나님이십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이처럼 로고스는 헬라인들에게는 만물의 제 1원인자요 유대인들에게는 말씀, 곧 창조주 하나님이었습니다.
둘째, 로고스는 소통의 매개체입니다. 사도 요한이 예수님을 로고스, 곧 말씀으로 묘사한 것은 예수님이 소통의 매개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언어적 존재인 인간에게 말씀이신 예수님을 통해 당신의 뜻을 나타내십니다. 히브리서 1장 1b,2a절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하나님은 말씀이신 예수님을 통해 당신의 사랑을 인류에게 나타내고자 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1절에서 말하는 ‘로고스(말씀)’이 바로 육신이 되신 예수님이며 따라서 예수님은 영원부터 계신 하나님임을 선포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3절은 1절 말씀을 더 확장해 예수님이 온 우주 만물의 창조주임을 말해 줍니다. 여기 ‘만물’은 보이는 현상 세계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 세상의 돌아가는 원리까지도 포함합니다. 골로새서 1장 16절은 말씀합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예수님은 눈에 보이는 세계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 심지어 왕권과 주권 같은 통치권과 권세 같은 세상의 질서 원리도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세상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하시는 창조주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 모든 것의 참 주인이십니다. 우리 인간들의 주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해 지으심을 받은 자들입니다(엡2:10).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위해 살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삶의 의미와 목적과 방향을 가진 존재입니다.
그러면 창조주이신 예수님과 우리는 무엇으로 연결되어 있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창조주 예수님은 우리 생명의 근원이 되십니다. 여기 ‘생명’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ζωἠ(조에)’인데 이는 ‘영적 생명’ 또는 ‘참 생명’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영생은 단순히 영원히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참된 생명에는 반드시 기쁨과 행복, 풍성함을 내포하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 10절에서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말씀하심으로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풍성한 생명을 주기 위함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이 생명은 나중에 장차 주어질 천국에서만 누리는 것뿐만 아니라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통해 ‘지금 현재’ 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통해 우리가 풍성한 생명력을 얻고 누리길 원하십니다. 우리는 삶이 곤고하고 무기력할 때 언제든지 이 생명의 샘 근원으로 나아가 참 생명의 샘물을 길어 마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φως)이 됩니다. 예수님을 통해 얻는 생명이 우리의 어둠을 내몰고 환하게 밝혀줍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이 우리 삶을 밝히 비추고 나아갈 길을 보여 주는 빛이 됩니다. 삶에서 실망하고 절망하여 지쳐 쓰러진 사람들에게 소망이 되고 힘이 됩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속에서 예수님을 통한 이 생명을 어떻게 얻고 누리게 되는지, 또 예수님을 통한 생명이 어떻게 빛이 되어 우리 인생들을 비추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사건, 왕의 신하의 아들과 38년 된 병자를 고쳐준 사건,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것, 물 위를 걸으신 것과 날 때부터 소경 된 자를 고치신 것,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것, 이 모든 사건은 예수님이 주시는 풍성한 생명을 어떻게 누리게 되고, 우리 삶을 어떻게 밝게 비추는지에 대한 증거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포도주와 같이 빛깔 있고 맛깔 나는 삶, 영육 간의 질병으로부터 치료받은 삶,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통해 영적 생명의 풍요를 누리는 삶, 때로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이루고,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영적 세계를 보게 되며 마지막 날에는 완전한 부활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외에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모든 일들 속에서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의 풍성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죄와 죽음 권세로 인한 어둠의 요소들이 사라지고 주님이 주시는 풍성한 생명을 얻고 누리며 밝게 빛나는 빛의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미 주셨고 앞으로 더 풍성하게 주실 참 생명의 구체적 삶의 실체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만 이 같은 사실을 믿고 예수님을 우리의 생명샘의 근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명의 빛인 예수님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9절을 보겠습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먼저 이 빛은 참 빛입니다. 빛을 쬐였더니 식물이 자라고 생명이 살아나면 진짜 빛으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빛이라는 사실은 약 2천년 간 검증을 받았습니다. 그분의 제자들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통해 생명을 얻었다고 증언합니다. 우리는 매일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경험으로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이 참 생명의 빛임을 경험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또 참 빛은 모든 사람을 비추는 보편성과 시대를 초월해 비췰 수 있는 영원성이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어둠의 본질인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 인생들의 근본적인 어둠의 문제인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참 생명을 주시므로 우리의 진정한 빛이 되어 주셨습니다. 이 생명의 빛은 앞으로도 영원토록 우리 인생들과 함께 할 것입니다. 문제는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을 우리 삶에 모셔들이느냐 거부하느냐하는 것입니다.
10,11절을 보십시오.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시고 창조주이시고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에 대한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세상이 그를 알지 못했습니다.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이 이 세상을 비추었지만 이 세상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5). 자기 땅에 왔지만 자기 백성들이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헬라인들은 이원론 사상 때문에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비천한 나사렛 출신이요 목수의 아들 예수님의 신성을 용납하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버렸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현대인들은 과학과 이성에 기초한 사고방식만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포도원 농부들처럼 자기 욕심 때문에 자기들 맘대로 살고 싶은 마음 때문에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기 삶의 주도권이 빼앗길까 봐, 죄와 쾌락의 어둠을 즐길 수 없을까 봐 아들을 영접하지 않습니다. 이를 볼 때 믿음은 모든 사람들의 것이 아니며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창조주요 생명의 빛인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어떻게 됩니까? 12절을 보겠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여기 ‘권세’는 권리, 특권을 의미합니다. 이 말씀을 바꾸어 보면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은 사람은 아직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불만스럽게 받아들입니다. 꼭 예수님을 맞아들여야만 믿어야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냐고 묻습니다. 하지만 빛이 비추는 것을 굳이 피해 어두운 그늘로 가 있는 사람이 빛이 주는 은혜를 입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풍성한 참 생명을 주는 빛을 피하면서 어떻게 참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또 유대인들은 선민이라는 자격, 혈통을 내세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되지 않습니다(13). 사도 요한이 비슷비슷한 말인 혈통, 육정, 사람의 뜻을 연달아 부정한 것은 아주 강력한 부정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능력이나 의지나 공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믿음의 부모에게서 태어났다고 자동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에서 열심히 봉사했다고 해서, 사회에서 없어서는 안 될 공로를 행한 사람이라고 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음을 열고 예수님을 나의 주요 그리스도로 믿을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이제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드리며 교제할 수 있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때마다 기도함으로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만 살아간다면 힘들고 외롭습니다. 하지만 나의 힘들고 어려운 것을 하나님께 말씀드리면 그분이 주시는 힘과 위로를 덧입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기쁨과 소망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장차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할 상속자로서의 특권을 우리는 지니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분명한 인식이 있는가에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권세, 특권이라고 했는데,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가 이런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기도하는 특권, 응답받는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까? 또 우리는 세상에서 자신을 어떤 존재라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사실 캠퍼스 목자의 삶은 누가 잘 알아주지도 않고 세상에서 돋보이는 삶도 아닙니다. 그다지 세상에서 존중해주는 삶도 아닙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에서도 살펴봤듯이 사도 바울도 전도하고 선교 여행하면서 세상으로부터 좋은 대접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사람인지라 세상 사람들로부터 받은 마음에 크고 작은 상처들이 자리잡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특권을 마음에 새기고 있었기에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고린도후서 6장 9,10절은 말씀합니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우리의 신앙생활과 목자의 삶이 별것 아닌 것 같고 근심하고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우리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을 부요하게 해주고, 모든 것을 가진 삶이 된 줄 믿습니다.
1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영원한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 속에 오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성육신이라고 합니다. 성육신은 인간의 이성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 한계적인 분이 되시고 전능하신 분이 연약한 인간이 되셨습니다. 볼 수 없는 존재가 눈으로 보고 만질 수 있는 존재가 되셨고 거룩하신 분이 죄는 없으시지만 죄 있는 인간의 모습이 되셨습니다. 육신이 되신 예수님에게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영광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물을 포도주로 만드실 때,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실 때, 병자들을 고치시고 바다 위를 걸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실 때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신성과 영광이 잘 나타났습니다.
또 예수님에게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습니다. 여기서 진리는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사람들을 큰 은혜로 돌보셨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을 때, 눈에 보이는 것에만 치중할 때 크게 책망하시고 올바른 믿음의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육신이 되셨으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왜 이처럼 성육신,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까?
첫째, 우리와 함께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높으신 보좌에 계셔서 우리와 멀리 계신 분으로 생각합니다. 멀리 계시기 때문에 나의 문제를 이해할 수 없고 나를 실제적으로 도와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 너무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죄인인 우리와 함께 머무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높으신 분이지만 가장 낮아지시고, 가장 영화롭고 부요하지만 가장 비천하고 가난한 분이 되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높아지기를 원하고 어떤 모양으로든 인정받고 대접받고 무엇인가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낮아지고 아무 것도 아닌 자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주(Lord)요, 스승이지만 겸손히 낮아져서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제자들의 냄새 나는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머리 둘 곳 없이 가난하게 사시다가 마침내 십자가에 죽기까지 우리들을 섬기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장에서 예수님의 이 겸손과 희생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마태복음에서 마태는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1:23).” 우리가 예수님의 성탄을 기뻐하고 축하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그리고 이 기쁨과 축하는 바로 우리의 것입니다. 하나님이시고 창조주이신 예수님이 육신이 되어 우리에게 오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함께하심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누리며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기 위해 사람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셔서 우리와 대화하시고 슬픔을 이해하시며 연약함을 감당해주신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영원한 멸망에서부터 구원하기 위해 오지 않았다면 이런 일들의 의미가 크지는 않을 것입니다. 때로는 위로도 중요하지만,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하는 위로는 작은 동정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영원한 멸망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를 위해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연약한 육신이 되어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시며 죽으셨습니다. 성육신, 즉 성탄은 바로 이때를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에게 진정한 참 생명의 빛을 주시는 일을 다 이루셨습니다(요19:30). 그리고 이제는 성령님을 보내주셔서 ‘지금’의 우리와 함께해 주십니다. 성령님을 통해 우리를 돕고 위로해주시고 힘과 능력이 되어 주십니다. 하나님이시고 창조주이신 예수님의 이 같은 은혜와 사랑을 감사 찬송 드립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예수님을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초대교회 때부터 오늘 본문 1-5절은 황금 글씨로 새겨질 가치가 있는 소중한 본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1-5절을 내 마음에 황금 글씨로 써서 늘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AD 4세기경 갑바도기아 교부 그레고리가 전한 오늘 본문에 대한 설교가 있습니다. 그는 ‘놀라운 전환’이라는 제목으로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모든 시대에 앞서 계시고, 보이지 않으시며, 파악할 수 없으시고, 비물질적이시며, 태초부터 모든 것의 원인이시고, 빛에서 나온 빛이시며, 생명과 영생의 원천이시고, 신적 원형의 형상이시며, 지울 수 없는 인장이시고, 세세에 동일한 형상이시며, 아버지의 표현이요, 말씀이요, 하나님의 아들인 바로 그분은, 당신의 형상대로 지어내신 사람을 돕고자 사람이 되십니다. 그분은 사람에 대한 사랑 때문에 사람이 되시고, 영혼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인간 영혼과 결합하십니다. ... 다른 이들을 부요하게 하시는 분께서 가난하게 되십니다. 내가 그분의 신성의 부요를 얻도록, 그분은 내 육신의 가난을 받아들이십니다. 모든 것을 완전히 지니고 계신 분이 당신 자신을 비우십니다. 내가 그분의 충만함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그분은 잠시동안 당신의 영광을 비우십니다. 오! 하나님, 선의 넘치는 부요함이여! 이 크나큰 신비가 내게 무엇을 말해 주고 있습니까?”
이 같은 예수님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그분의 풍성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육신이 되어 오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다 이루셨습니다. 이제 이 예수님을 믿는 자는 생명의 빛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권세를 지금부터 영원까지 풍성히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성탄의 은혜를 감사하고 축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