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사진은 1930년대 일본식민지 조선의 경성(京城: 서울) 혼초(本町: 충무로)에서 촬영되었다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1785년작 《도덕기초철학의 근거들(도덕형이상학근거론; 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 필수참조)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이 세상에서는, 심지어 이 세상의 바깥에서도, 오직 선량한 의지(선의善意)만이 유일하게 무조건(절대로) 선량하다고 생각될 수 있다.”
이렇다면, 얄궂게도, “이 세상에서는, 심지어 이 세상 바깥에서도, 오직 악랄한 의지(악의惡意)만이 유일하게 무조건(절대로) 악랄하다고 생각될 수 있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그런데, 적어도 이 세상에서는, 선의나 악의가 실천되거나 실행되기 시작하면 무조건성(절대성)을 잃기 시작하는 듯이 보인다.
왜냐면 적어도 이 세상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선의가 실행되면 악작용(惡作用)·악효과(惡效果)·악결과(惡結果)를 직산(直産)하거나 방산(傍産)할 수 있을뿐더러 악의가 실행되어도 선작용(善作用)·선효과(善效果)·선결과(善結果)를 직산하거나 방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의지(意志)들의 이토록 아이러니한 반대결과들이나 역효과(逆效果)들 중에도 선의의 악결과는, 칸트의 주장에 비치면, 무조건성(절대성)을 상실한 선의의 불운한 결과라고 인지될 수 있겠지만, 다소 꾀까다롭고 불온한 관점들(☞ 참조)에서는 선의의 악결과는 특정한 개체에게나 집단에게 해롭거나 불리하거나 불쾌하니까 악하다고 인지될 수 있으며, 악의의 선결과는 특정한 개체에게나 집단에게 이롭거나 유리하거나 유쾌하니까 선하다고 인지될 수 있다.
그런데 악의의 선결과는 어쩌면 선의의 악결과보다 더 아이러니하고 의미심장하게 인지될 수 있다.
악의의 선결과들에는, 예컨대, “자본주의자들의 의지를 반영한 노예제도폐지(☞ 참조),” “군용장치(軍用裝置)로서 개발된 인터넷,” 일제강점기의 조선에서 진행된 “경부선(京釜線) 철도건설”뿐 아니라 “인구증가와 봉건적 신분체제 붕괴”도 포함될 수 있다. 물론 조선의 문벌제도와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을 차별한) 신분제는 이른바 “갑오개혁(甲午改革; 갑오경장; 甲午更張; 1894년 7월~1896년 2월)”이 단행되면서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그렇지만 현실에서 출신과 신분을 따지는 관습이나 관행, 신분감각, 신분의식은 좀처럼 소멸하지 않고 상당히 공공연하게나 암묵적으로 관철되다가 일제감정기의 말기에야 마침내 실질적으로 붕괴하여 소멸하기 시작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한민족독립운동사 제5권 일제의 식민통치》(1989) 제VI단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서술되었다.
“일제가 한국을 병탄한 1910년에 우리나라의 인구는 약 1,300만이었는데, 국세조사가 처음으로 실시된 1925년에는 1,900만으로 불어났고 1944년에는 약 2,500만으로 계속 증가했다. 즉 1925~1944년의 20년간에 한국의 인구가 600만(30%)이나 증가한 것이다. 이렇게 갑작스런 인구증가는 일제시대에 점차로 사망률이 저하되고 출생률이 높아진 때문으로 볼 수 있는데, 특히 사망율의 감퇴는 생산증진과 교통수단의 개량에 따른 식량보급의 원활화, 공중 보건시설의 확장과 현대의술의 도입, 약품의 제조와 판매에 관한 관리의 엄격화 등에 기인하는 것으로 분석·파악된있다[장윤식(브리티시 컬럼비아대 교수), 〈새고장을 찾는 무리: 인구의 변동〉, 新丘文化社 編, 《한국현대사 8: 신사회 100년》(1971), pp. 233, 236~237]. …… 일제는 조선시대의 전통적 신분구조를 의도적으로 변혁하지 않았기 때문에 적어도 1930년대까지 양반제는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시대 말기 이래로 꾸준히 신분상승을 시도한 비양반 계층의 소속원들이 일제의 친일파 포섭정책과 능력본위의 교육·충원정책 등에 편승하여 사회적으로 ‘출세’하고 있었다. 1930년대 이후 가속화된 공업화는 이런 추세에 박차를 가했다고 판단된다. 이런 사회신분의 ‘수직적 변동(vertical mobility)’은 특히 조선시대의 신분제사회에서 신분상승이 여의치 않았던 ‘주변적’ 신분층 ㅡ 향리(아전·이속)와 중인 ㅡ 과 백정을 포함한 천민계층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고 평가될 수 있다[김용덕, 〈일제시 우리가 잃고 얻은 것〉, 《세대》4·5(1956. 5), p.150; 진덕규, 〈일제 식민지시대의 지배세력에 관한 연구〉, 한국사회과학연구협의회 편, 《일본식민정책에 관한 연구》(1980), p. 126; Yun-shik Change, 〈Colonization as Planned Change: The Korean Case〉, 《Modern Asian Studies》5:2(1971), p. 164; Henderson, Korea, pp. 48~48 참조]. 또한 양반들 중에서도 근대적 기업가로 변신하는 경우가 많이 나타났다[Daniel S. June, 〈Nationalism and Korean Businessmen〉, C. I. Eugene Kim and Doretha E. Mortiimore, ed., 《Korea’s Response to Japan: The Colonial Period, 1910~1945》(Kalamazoo: The Center Korean Studies, Western Michigan University, 1977), p. 47 참조]. 다시 말하면, 일제 식민통치 후반기에 이르러 조선시대의 ‘봉건적’ 신분체제는 크게 붕괴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쯤에서 ‘실행된 악의의 이토록 아이러니한 선결과들은 언제 누구에게 어떻게 감지·해석되고, 감지·해석되어야 하며, 감지·해석될 수 있느냐?’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으리라.
그러나 눈치마저 미비한 모깃글 따위나 끼적거리는 죡변이, 무엄하고 괘씸하게도, 이토록 의미심장한 이 의문에 어찌 감히 술술 매끄럽게 즉답할 수 있으랴.
하물며 ‘이따위 께름칙한 모깃글은 어떤 의지의 어떤 결과이고, 또 어떤 결과를 직산하거나 방산하겠느냐?’고 다그치는 성급한 의문에도 이토록 느려터지고 심약한 죡변이 어찌 무엄하고 괘씸하게 감히 즉답할 수 있으랴.
뭐, 하여튼, 아랫사진은 1945년 전에 촬영된 〈조선총독부의 헌병경찰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