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어화(解語花)를 아시나요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는 뜻으로 미인(美人)을 이르는 말이랍니다.
중국 당나라 때 현종이 양귀비를 가리켜 말하였다는 데서 유래되었답니다
김부용
자(字)가 운초(雲楚)요, 호는 부용이며, 성천 태생이다. <부용집제발시(芙蓉集題跋詩)>를 보면 그는 무산(巫山) 12봉의 정기를
품고 성천에서 태어나 누대가무지(樓臺歌舞地)에서 생장하는 동안에 그의 예술, 특히 시문에 빛을 발휘하여 성도(成都) 설교서
(薛校書)의 칭호를 받게 되었다 한다.
그러나 운초는 이와 같은 모든 허명을 내던지고 원래는 기생이었으나 별로 뜻이 없어 금수강산을 유람한후 문을 굳게 닫고
여 생을 보내려 하였다.
다행히 운초를 이해하는 연천(淵泉) 김이양(金履陽ㆍ초명 金履永=1755~1845)을 만나 소실이 되어서 시를 읊고 노래하며
여생을 보냈다.
시기(詩妓)로는 계생(桂生)을 누를 만한 부용류(芙蓉流)의 시경(詩境)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독특성이
있어 남자로 하여금 감히 얼굴을 못들게 하였다.
조선여류시인에게서 볼 수 있는 연약한 병적 애상이 적고 어디까지든지 여장부(女丈夫)다운 시정을 읊었다. 그의 문집인
< 운초시(雲楚詩ㆍ일명 芙蓉集)>에는 약 백오십여수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학수고대하던 김이양이 사람을 보내 부용을 부르니, 부용은 한양 남산 중턱에 신방을 꾸몄다. 그 집은 단촐하였지만 숲이
우거졌고, 기화요초로 정원을 꾸며 '녹천당(祿泉堂)'이라 하였다. 이 곳을 찾아 온 김대감의 친구는 부용을 '초당마마(草堂)'
라 불렸다. 김이양과 교제를 하던 많은 노정승들은 부용과 즐기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 하였다. 어리면서도 시재가 뛰어나고
인물 또한 고아 부용은 그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였다.
김이양이 83세로 벼슬에서 물러나자 임금은 그에게 '봉조하(奉朝賀)'라는 벼슬을 제수하였다. 그 벼슬은 종신토록 품격에 해당
하는 녹을 받고 국가의 의식이 있을 때는 조복(朝服)을 입고 참여할 수 있는 특별한 예우직(職)이다. 김대감이 벼슬에서 물러나
한가한 생활을 하자 그들은 원앙새처럼 다정하게 지냈다.
과거에 급제한지 60년이 되는 회방(回榜)잔치가 89세에 있자, 김대감은 부용을 데리고 이곳 천안 조상의 묘를 참배하였다.
그러나 회자정리(會者定離)라 만나면 반드시 헤어지는 법, 그들이 깊은 인연을 맺은 지 15년이 되는 1845년 이른 봄 김대감은
92세의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났다. 임종 시 김대감은 부용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눈을 감았는데, 이 때 부용의 나이는
겨우 33세였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님을 잃자 부용은 방안에 제단을 모시고 밤낮으로 고인의 명복을 빌며 애통한 심정을 시로
달랬다.
풍류와 기개는 호산의 주인 (風流氣槪湖山主)
경술과 문장은 재상의 기틀 (經術文章宰相材)
십오 년 정든 님 오늘의 눈물 (十五年來今日流)
끊어진 우리 인연 누가 다시 이어줄고 (峨洋一斷復誰栽)
부용은 고인과의 인연을 회상하면서 일체 외부와의 교류를 끊고, 오로지 고인의 명복만을 빌며 16년을 더 살았고, 그녀 역시
님을 보낸 녹천당에서 눈을 감았다. 부용은 어느날 꿈에서 그리운 님을 뵙고 다정한 시간을 함께 보낸 후 시를 읊었는데,
20년간 그리던 님을 이제사 꿈에 보니 (二十年前夢裡人)
서로간 상대하니 백발이 새로 났네 (海天相對白頭新)
이제라도 헤어진다면 서러워 말고 (從此無心傷歲暮)
잔 들어 담소하며 봄을 보내소서 (一樽談笑別生春)
그녀는 임종이 다가오자 유언으로 말하기를,
"내가 죽거든 대감마님이 있는 천안 태화산 기슭에 묻어주오."
라며 다시 못 올 불귀의 객이 되었다.
여류시인 김부용의 묘
조선시대 여류시인인 운초 김부용의 묘
시문과 가무가 뛰어났던 기생으로
'운초 시집'과 '오강루문집'등을 남겼다.
조선시대 황진이, 이매창과 더불어
조선 3대 시기(詩妓)라 하였으며,
신사임당, 허난설헌과 함께 3대
여류문인이었다.
무덤 왼쪽에 작은 비석 하나 서 있다.
비석 뒤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김부용은 평남 성천 지방에서
가난한 선비의 집안에 무남독녀로 태어나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기적(妓籍)에
오르게 되었는데, 부용은
사서삼경에 능하고 시문, 가무에
뛰어났다고 한다.'
부용이 부용상사곡【芙蓉相思曲】에서
은장도로 장을 끊어 죽는 일은 어렵지 않으나라고 말한 것처럼
뭇 사내들을 상대해야 했던 해어화의 신분이었지만 해어화의 심정은
한평생을 다해 기다리고 또 기다리더라도 자신의 마음을 줄 사람은 일편단심
봉조하 김 이양
한 사람이었듯싶습니다
◎芙蓉相思曲◎ 【부용상사곡】김부용
운초 김부용의 시중에 가장 유명한것은 일명 보탑시로 알려진 '부용상사곡' 이다. 김대감이 부용을 부실로 삼았으나,
훗날을 기약하며 한양으로 혼자 떠나게 되었는데, 부용은 몇달을 그리움과 외로움의 나날을 보내도록 소식이 없자 피를 토하는
애절한 시를 써서 인편으로 보내는데, 이게 바로 부용이 남긴 가장 아름다운시 '부용상사곡' 이다.
(*보탑시 - 글자로 탑을 쌓듯이 지은 시)
芙蓉相思曲
別, (별)
思. (사)
路遠 (로원)
信遲 (신지)
念在彼, (념재피)
身留玆. (신유자)
巾櫛有淚, (건즐유루)
扇環無期. (선환무기)
香閣鍾鳴夜, (향각종명야)
練亭月上時. (련정월상시)
倚孤枕驚殘夢, (의고침경잔목)
望歸雲恨遠離. (망귀운한원리)
日待佳期愁屈指, (일대가기수굴지)
晨開情札泣支頣. (신개정찰읍지신)
形容憔悴把鏡淚下, (형용초췌파경루하)
歌聲嗚咽對人含淚. (가성오인대인함루)
掣銀刀斷弱腸非離事, (체은도단약장비리사)
躡株履送遠眸更多疑. (섭주리송원모경다의)
朝遠望暮遠望郞何無心, (조원망모원망랑하무심)
昨不來今不來妾獨見欺. (작불래금불래첩독견기)
浿江成陸地後鞭馬騎來否, (패강성륙지후편마기래부)
長林變大河初乘船欲渡之. (장림변대하초승선욕도지)
見時少別時多世情無人可測, (견시소별시다세정무인가측)
好緣斷惡緣回天意有誰能知. (호연단악연회천의유수능지)
一片香雲楚臺夜神女之夢在某, (일편향운초대야신녀지몽재모)
數聲良簫秦樓月弄玉之情屬誰. (수성량소진루월롱옥지정속수)
欲忘難忘愁依牡丹峯可惜紅顔老, (욕망난망수의모단봉가석홍안로)
不思自思强登浮碧樓每歎緣鬢衰. (불사자사강등부벽루매탄연빈쇠)
孤處霜閨腸雖欲雪三生佳約寧有變, (고처상규장수욕설삼생가약령유변)
獨宿空房淚從如雨百年貞心自不移. (독숙공방루종여우백년정심자불이)
罷春夢開竹窓迎花柳少年總是無情客, (파춘몽개죽창영화유소년총시무정객)
攬香衣推玉枕送歌舞者類莫非可憎兒. (람향의추옥침송가무자류모비가증아)
時出門望出門望甚矣君子薄情豈如是, (삼시출문망출문망심군자박정기여시)
千里待人難待人難悲哉賤妾孤懷果何其. (천리대인난대인난비재천첩고회과하기)
惟願寬仁大丈未決意渡江舊面燭下欣相對, (유원관인대장미결의도강구면촉하흔상대)
勿使軟弱兒女子含淚歸泉哀魂月中泣相隨. (물사연약아여자함루귀천애혼월중읍상수)
이별하옵니다
그립습니다
길은 멀고
글월은 더디옵니다
생각은 임께 있으나
몸은 이곳에 머뭅니다
비단 수건은 눈물에 젖었건만
가까이 모실 날은 기약이 없습니다.
향이 각서 종소리 들려오는 이 밤
연광정에서 달이 떠오르는 이때
쓸쓸한 베개에 의지했다가
잔몽에 놀라 깨어 돌아오는 구름을 바라보니
멀리 떨어져 있음이 슬픕니다
만날 날 수심으로 날마다 손꼽아 기다리며
새벽이면 정다운 글월 펴 들고
턱을 괴고 우옵니다
용모는 초췌해져 거울을 대하니 눈물뿐이고
목소리도 흐느끼니 사람 기다리기가 이다지도 슬픕니다
은장도로 장을 끊어 죽는 일은 어렵지 않으나
비단신 끌며 먼 하늘 바라보니 의심도 많습니다
어제도 안 오시고 오늘도 안 오시니 낭군은 어찌 그리 신의가 없습니까
아침에도 멀리 바라보고 저녁에도 멀리 바리 보니 첩만 홀로 속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대동강이 평지가 된 뒤에나 말을 몰고 오시려 합니까
장림이 바다로 변한 뒤 노를 저어 배를 타고 오렵니까
이별은 많고 만남은 적으니 세상사를 누가 알 수 있으며
악연은 길고 호연은 짧으니 하늘의 뜻을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운우 무산에 행적이 끊기었으니 선녀의 꿈을 어느 여자와 즐기시나요
월하 붕대에 피리 소리 끊기었으니 농악의 정을 어떤 여자와 나누고 계십니까
잊고자 해도 잊기가 어려워 억지로 부벽루에 오르니 안타깝게도 홍안만 늙어가고
생각지 말자 해도 절로 생각나 몸을 모란봉에 의지하니 슬프도다 검은 머리 자꾸 쇠해가고
홀로 빈 방에 누우니 눈물이 비 오듯 하나 삼생의 가약이야 어찌 변할 수 있으며
혼자 잠자리에 누웠으나 검은 머리 파뿌리 된들 백 년 정심이야 어찌 바꿀 수 있으랴
낮잠을 깨어 창을 열고 화류계 년을 맞아들여 즐기기도 했으나 모두 정 없는 나그네뿐이고
베개를 밀고 향내 나는 옷으로 춤을 춰 보았으나 모두가 가증한 사내뿐입니다
천리에 사람 기다리기 어렵고 사람 기다리기 이토록 어려우니 군자의 박정은 어찌 이다지도 심하십니까
삼시에 문을 나가 멀리 바라보니 문을 나가 바라보기 애처로운 천첩의 심정은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오직 바라옵건대 관인하신 대장부께서는 강을 건너오셔서 구연의 촛불 아래 흔연히 대해 주시고
연약한 아녀자가 슬픔을 머금고 황천객이 되어 외로운 혼이 달 가운데서 길이 울지 않게 해주옵소서
- 조선 3대 기녀시인
황진이, 매창과 함께 조선시대 3대 시기로 꼽히는 운초는 평안남도 성천 출신의 기녀로서 주옥같은 한시 300여편을 남긴
조선 순종 때의 여류시인이다. 운초의 생존연대와 행적에 대하여는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정확히 알 수 없다. 황진이가
8수의 시와 시조로 많이 알려진 사실에 비하면 300여수의 한시가 전해지는 운초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셈이다. 운초는 조선
3대시기 중 유일하게 시집을 갖고 있다.
- 운초의 삶
운초는 평양에서 북동쪽 50km에 있는 성천에서 유학자 집안의 무남독녀로 태어나 어렸을 때에는 사서삼경, 제가백가, 방기서
(의학서)등을 배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운초는 30여세 되던 1831년 안동김씨 출신이며 예조 이조 호조판서 등을 지낸 홍성
에 살던 원로 정치인 연천 김이양(1755-1845)의 소실이 된다. 이때 연천의 나이는 77세로 두 사람은 50여세의 나이 차이에도
불고하고 서로의 시 세계를 이해하면서 깊은 애정을 지니게 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