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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부활절 특강
부활하신 예수님
말씀 / 마가복음16:1-20
요절 / 마가복음16:6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Happy Easter!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인류 역사상 가장 놀라운 소식이요, 가장 기쁜 소식입니다. 왜냐면 아담의 범죄 이후, 모든 사람은 죄와 죽음의 세력에 지배당해 슬프고 무기력한 인생을 살다 결국 죽음과 심판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인생들을 구원하시고 승리의 삶을 살도록 하시는 주님의 부활이야말로 진정 기쁜 소식입니다. 이 시간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안식일이 지나자,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 이렇게 세 여인이 이른 새벽 무덤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이날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지 삼 일째 되는 날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시신에 바를 향품을 가지고 갔습니다. 이른 새벽 예수님의 무덤을 찾는 여인들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그들은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고 온 진심을 드려 예수님을 섬겼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예수님은 삶의 희망이요, 방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처절하게 돌아가셨습니다.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생각할 때마다 슬픔의 눈물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여인들은 더 이상 삶의 희망도 의욕도 가질 수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사랑하는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이라도 발라 드리려고 이른 새벽 무덤으로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여인들의 헌신과 사랑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세력 아래 있는 인간의 사랑은 아무리 아름답다 할지라도 결국 비극일 뿐입니다. 여인들처럼 우리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지만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한다면 삶의 슬픔과 허무와 고난을 이겨내지 못합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늘 슬프고 고달픈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무덤으로 가는 여인들에게 걱정이 있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당시 유대인들의 무덤은 굴로 만들고 그 입구는 큰 돌로 막아두었습니다. 때문에 힘 없고 여린 여인들을 위해 돌을 굴려 줄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의 열한 제자들에게 부탁해 보려 했지만 그들도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 망연자실해서 그럴 여력조차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일까요? 그 큰 돌이 이미 저만치 굴려져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여인들은 무서웠지만 한 걸음 한 걸음 무덤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또 이게 어찌 된 일일까요? 응당 있어야 할 예수님의 시신은 보이지 않고 대신 흰옷 입은 한 청년이 앉아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다른 복음서에서는 천사라고 했습니다. 여인들은 놀라 사시나무 떨듯 떨며 뒷걸음질 치다 넘어졌을 것입니다. 천사는 놀란 여인들에게 더욱 놀라운 소식을 전해줍니다. 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천사의 이 말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에서 예수님의 죽음이 분명한 사실이요, 또 하나는 ‘그가 살아나셨다’라는 말에서 예수님의 부활이 분명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이는 죽음으로 인한 두려움, 허무, 슬픔, 좌절과 어둠의 무덤 속을 환하게 비추는 소망과 승리의 메시지입니다.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삼 일 만에 살아나셨습니다. 이는 실로 놀라운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천사는 부활의 증거로 예수님의 시신을 두었던 빈 무덤을 보여줍니다. 마가가 왜 천사의 이 증언을 기록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천사의 증언이야말로 예수님의 부활이 이성적 역사적으로 사실임을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도 예수님 부활의 수많은 증거가 있습니다. 연약한 제자들이 부활을 목격한 후 담대하고 능력 있는 사도들로 변화된 데서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모조리 없애고자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자신의 생명을 걸고 예수님을 전하다 순교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고난 주간에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던 겁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후,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능력 있는 종이 되었으며 로마에서 담대히 복음을 전하다 십자가에 달려 순교했습니다. 무엇이 이들의 인생을 이토록 변화시킨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그 외에도 요한, 안드레, 빌립, 도마 등 제자들을 비롯해 2세 제자들인 폴리갑을 비롯한 교부들의 삶의 변화가 예수님의 부활 때문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또 무엇보다 가장 확실한 증거는 예수님의 부활이 성경에 이미 예언된 것이요, 예수님도 살아생전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신 데 있습니다(막8:31). 또 예수님의 부활을 바탕으로 시작된 초대교회의 탄생과 부흥, 더 나아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세계로 전파된 것도 중요한 증거입니다. 이상을 볼 때 예수님의 부활은 확실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첫째,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유일한 구주이심을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심으로 인류의 모든 죄의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는 사해졌고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이 우리 대신 멸망을 당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죽음과 멸망으로부터 구원받았다고 좋아했는데 알고 보니 우리 주님은 그 세력에 붙잡혀 있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것이 우리에게 진정한 승리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우리도 죽음과 멸망의 세력에 붙잡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왕이 잡혀 있는데 졸개들은 승리했다고 좋아하는 판국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를 가두었던 죽음을 이기고 무덤 문을 활짝 열어 부활하셨습니다. 이 부활이야말로 우리의 구원을 완성시키는 통쾌한 대역전승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임당한 것을 본 사람들은 그분이 너무나 무력하고 무능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한때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철회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데 앞장섰던 종교 지도자들은 자기들의 생각이 맞았다고 콧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생각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산산조각 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음 가운데서 일으키셨고 살리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만이 우리의 진정한 그리스도이십니다.
둘째, 죄 사함의 확신을 줍니다. 인간은 본래 에덴동산에서 살면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영생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 이후, 낙원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죄는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파괴시키고 인간의 인격과 영혼을 파괴시킵니다. 또 죄의 결과로 모든 인간은 죽습니다. 이 죽음은 삶의 모든 것을 빼앗아가고 허무하게 만듭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죄와 죽음을 해결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이 사실을 확증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것을 확증할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인간의 가장 근본 문제인 죄와 죽음을 해결하셨습니다.
셋째, 예수님의 부활은 최종적인 승리를 줍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인생의 승리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노력해 인생의 공든 탑을 쌓습니다. 그러나 죽음 때문에 공든 탑이 순식간에 무너지게 됩니다. 결국 죽음 때문에 모든 것을 잃고 패배의 인생을 살아갑니다. 우리가 승리의 인생을 살려면 반드시 죽음을 이겨야 합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심으로 우리에게 최종적인 승리를 주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현재 삶 속에서 죄와 죽음의 세력을 이기는 부활의 능력을 주십니다. 과거에는 두려움과 운명주의, 패배주의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부활의 믿음으로 이제는 승리감에 충만한 확신 있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과정을 보면 힘들어 보이고 세상에서 실패한 자 같으나 궁극적으로 승리하는 자입니다. 바울은 외쳤습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15:55,57)” 우리가 승리를 쟁취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부활의 믿음을 가진 우리에게 확실한 승리를 주십니다.
넷째,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지게 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우리 인생들이 하나님께 나아갈 길을 여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부활의 첫 열매로 장차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부활하게 된다는 소망을 가지게 합니다(고전15:20). 사람들은 이 땅에서 물질적 풍요를 누리며 편하게 살기를 소망합니다. 명예와 권력을 얻어 존경받으며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소망이 이루어진다 할지라도 결국은 죽음과 함께 물거품처럼 사라집니다. 세상의 소망은 우리를 결국 실망시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부활의 소망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이 소망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으로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영원한 소망입니다. 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땅에서 주님을 위해 기쁨으로 헌신할 수 있습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라(고전15:58).” 우리가 부활의 믿음을 가지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7,8절을 보십시오. 천사는 여인들에게 예수님이 먼저 갈릴리로 가심을 제자들에게 알리라고 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 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천사의 말을 들은 여인들은 심히 놀라 떨며 무덤에서 나와 도망했습니다. 그들은 너무 무서워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부활은 이들에게 믿기 어려운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우리는 한 가지를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생동감 있는 마가의 기록이 당시 극심한 박해를 받고 있는 신자들에게는 어떤 메시지로 와닿았을까요? 당시 신자들은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 사실, 죽음보다 사람을 놀라고 두렵게 하는 일은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죽음의 위협과 두려움만큼 사람을 압도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은 죽음보다도 더 무섭고 떨리고 두렵고 놀라워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할 만큼 사람을 압도하는 소식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 소식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전에 일곱 귀신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셨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6절에 보면, 예수님은 무덤을 떠나지 않고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나타나 “마리아야!” 부르시며 눈물을 닦아주셨습니다.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자, 심령에 기쁨이 샘솟았습니다. 마리아는 달려가 슬퍼하며 울고 있는 제자들에게 감격스런 부활 소식을 전합니다. “예수님이 살아나셨어요! 정말이예요.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구요!” 그러나 제자들은 이를 믿지 않았습니다. 과거 정신 나간 병력이 있는 마리아가 너무 충격을 받아 허깨비를 보고 헛소리 한다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이후 실의에 빠져 시골로 걸어가고 있는 두 제자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두 제자는 즉시 예루살렘으로 달려가 부활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2진 제자들이 전하는 것이라 자존심이 상했는지 이번에도 믿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도 믿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14절을 보십시오.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을 심방하시고 먼저 그들의 믿음 없는 것을 책망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살아생전에 말씀을 들으면서 이성과 상식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말씀은 믿고 어떤 말씀은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제자들의 믿음은 상대적인 것이었습니다.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없을 때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없습니다. 또 제자들은 마음이 완악했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지만 이제는 예수님이 죽었으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내 앞가림이나 해야겠다는 이기적인 마음에 내면은 딱딱하게 굳어 예수님의 부활을 생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성공시켜줄 예수님이 안계시니 더욱 독하게 나를 위해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제자들을 완악하게 만들었습니다.
부활하셔서 제자들을 심방오신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그래! 얼마나 힘드냐? 내가 죽어버려서 너희들 성공하도록 뒷바라지도 못해주고 미안하구나.”하시며 위로하지 않으셨습니다. 밥 먹을 때는 개도 안건드린다는데 예수님은 제자들이 식사를 마치기도 전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책망하셨습니다. 부활의 증인들의 말을 듣고도 믿지 않는 것은 어떤 상황과 처지로도 변명할 수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은 불신이요 자기 생각만을 고집하는 완악한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이 예수님의 책망은 우리를 향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믿음이 없어 인생의 슬픔과 고통, 자기 연민에 사로잡혀 눈물만 흘리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을 우리가 부활의 믿음으로 벗어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 예수님이 죽은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자기 방식, 자기 생각, 자기 고집대로 이제는 독한 마음으로 자기만을 위해 살고자 하는 완악한 마음을 회개하고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는 순수 신앙을 가지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책망하심으로 제자들의 불신과 완악한 마음을 깨시고 부활신앙을 심으셨습니다. 그리고 이를 기초로 선교사명을 주셨습니다.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15).” 우리는 이 말씀에서 중요한 몇 가지 사실을 배웁니다.
첫째, 복음의 대상이 온 천하 만민이라는 것입니다. 천하 만민은 누구나가 복음을 절실히 갈망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만이 천하 만민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태어나서 한 번도 유대 밖에 나가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회복만을 꿈꾸는 편협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들이 원수나라인 로마에까지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편협한 생각을 깨고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주신 이 사명이 교회의 존재목적이기도 합니다.
둘째, 예수님의 비전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린 제자들의 어깨에 온 세계를 맡기셨습니다. 지금까지 제자들은 종교지도자들이 두려워 꼭꼭 숨어있었습니다. 깊은 절망 가운데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하고 불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조금 전만 해도 부활을 믿지 않는 불신과 완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보다 더 나쁠 수 없는 제자들의 영적상태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보실 때 앞으로 세계를 섬길 일꾼들로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통해 온 세상 만민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비전에 불타셨습니다. 예수님의 비전대로 이들은 사도행전의 역사를 쓰는 인류의 대 스승들이 되었습니다. 이들이 위대하게 된 것은 예수님이 주신 사명이 위대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좀 부족하다 할지라도 위대한 선교사명을 감당할 때 그 인생이 위대해집니다. 아무리 편협한 자라 할지라도 선교사명을 감당할 때 생각하는 스케일이 커지고 세계를 품고 기도하는 세계적인 인생을 살게 됩니다.
셋째, 복음의 절대성입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16).” 믿는 사람은 구원을 얻되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습니다. 제자들이 복음을 전할 때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습니다. 여기에 복음의 절대성이 있습니다. 복음은 구원과 연계된 것이므로 그 어떤 것보다 귀중하며 가장 우선적으로 시급히 전해져야 합니다.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15).” 이 말씀은 예수님의 지상명령일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마지막 간절한 부탁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온 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수 많은 영혼들이 멸망 길로 갑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사랑하는 이들이 멸망 길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시급히 복음이 전해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실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선교사명을 심령에 새기고 순종해 지금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부터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17,18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에게 선교사명을 맡기신 예수님은 믿는 자들에게 표적을 약속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뱀을 집고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을 것이며 치료의 능력을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참으로 엄청난 약속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죄 사함과 부활을 믿을 때 이런 표적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을 믿으면서도 부활은 먼 훗날 죽음 이후에나 일어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관념적인 부활의 지식은 지금 현재 나의 삶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부활을 머리로만 알고 현재 삶에서 부활신앙이 우리를 지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님의 역사를 섬기면서도 온전히 헌신하지 못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선교사명을 맡기시면서 표적을 약속하심으로 주님이 함께하고 계심을 믿고 능력 있게 선교사명을 섬기도록 도우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온 천하에 두루 나가 복음을 전파할 때 성령으로 역사하사 늘 동행하시고 도와주셨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심령에 예수님의 부활이 와닿습니까? 이해가 되고 영접이 됩니까? 우리의 심령에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한 제자들의 감격과 기쁨이 있습니까? 이 시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의 마음을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또 천사의 말을 기억하고 믿어야 합니다.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6).” 우리가 제자들처럼 죽은 예수님으로 인해 자기연민과 슬픔과 어둠과 두려움과 괴로움에 빠져있을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제자들의 기쁨으로 충만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그 기쁨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주님의 선교 사명을 힘 있게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그 기쁨으로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은 죽음과 고난, 역경, 온갖 두려움과 슬픔을 이겨내고 생명력이 넘치는 인생, 능력 있는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