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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시(楊州市)
경기도의 중앙, 서울특별시 북쪽에 위치한 시.개관
동쪽은 포천시, 서쪽은 파주시·고양시, 남쪽은 고양시·서울특별시, 북쪽은 연천군·동두천시와 접하고 있다. 동경 127°06′∼127°54′, 북위 37°39′∼37°56′에 위치한다. 면적은 310.36㎢이고, 인구는 20만 5184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개 읍, 4개 면, 6개 행정동(17개 법정동), 100개 행정리(37개 법정리)가 있다. 시청은 경기도 양주시 남방동에 있다.
자연환경
광주산맥 말단에 속하고 서울과 원산을 잇는 추가령지구대가 시의 중심부를 남북으로 지나고 있어 동쪽과 서쪽에는 400∼500m의 높은 산이 솟아 있고 중앙에는 넓은 곡저평야가 남북으로 길게 펼쳐져 있다. 동쪽에는 천보산맥(天寶山脈)이 동북∼서남 방향으로 지나고 왕방산(旺方山, 737m)·천보산(天寶山, 337m)이 각각 동두천시와 포천시·의정부시, 앵무봉(鸚武峰, 622m)이 파주시, 남쪽에는 노고산(456m)·상장봉(534m)·만장봉(740m)이 각각 고양시와 서울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북쪽에는 감악산(紺嶽山, 675m)이 연천군과 접하고 있다. 그리고 중앙에는 도락산(441m)·불곡산(佛谷山, 460m)·한강봉(436m)·일영봉(444m)이 있다. 동서 산지에서 흐르는 청담천(淸潭川)·신천(莘川)·곡룡천·홍죽천 등이 북쪽으로 흘러 한탄강에 합류한다. 이들 하천 주변에는 넓은 곡저평야가 곳곳에 발달하고 있다. 내륙분지에 있어 기후는 한서의 차가 심하고 강수량은 많은 편이다. 연평균 기온은 10.8°C, 1월 평균기온 -6°C, 8월 평균기온 26°C이며, 연 강수량은 1,300㎜이다.
역사
서울과 인접한 이 시는 고대부터 한강 연안에 위치하고 있는 지리적 여건으로 항상 국토의 요충이 되어 왔다. 이 시는 서울의 상당부분과 남양주시·구리시·의정부시·동두천시 등을 포괄하는 큰 시였지만 지금은 모두 분리되어 경기도에서도 크지 않는 시에 속한다. 구석기시대의 유적은 은현면 운암리에서 다각면원구(多角面圓球)와 긁개 등이 발견되어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신석기시대의 유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청동기시대의 유적은 옥정동, 유양동·마전동, 은현면 선암리·하패리, 남면 한산리 등지에 고인돌이 있다. 은현면 용암리와 남면 신산리, 광적면 덕도리에서 민무늬토기편과 마제석기류가 발견되어 청동기시대에는 인구가 크게 증가했음을 말해준다. 이 시는 한강 이북에 위치한 점으로 미루어 서기전 1세기 초에는 낙랑군에 속하였고, 3세기 초에는 대방군의 강역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삼국시대에는 먼저 이 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한 백제에 속했고, 이어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으로 고구려 영토가 되어 이곳에 매성군(買省郡, 일명 창화군)이 설치되었다. 551년(진흥왕 12, 성왕 29) 이른바 나·제동맹으로 신라는 죽령 이북, 백제는 남한성·북한성 일대를 취하게 되어 이곳은 잠시 백제의 영토가 되었으나, 신라가 나·제동맹을 파기하자 다시 신라의 지배 하에 들어갔다.
757년(경덕왕 16) 지금의 서울이 한양군(漢陽郡)으로, 이곳이 내소군(來蘇郡)으로 개칭되었다. 이곳 읍치(邑治)에서 가까운 대모산성(大母山城)에서 출토된 백제토기편과 신라와 통일신라의 유물들, 그리고 천보산맥과 불곡산·도락산 일대에 산재하는 고구려의 군사용 보루유적을 포함한 28개소의 관방유적이 분포되어 있음은 이 지역이 남북을 연결하는 관문으로서 전략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음을 입증해 준다. 양주의 지명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고려 태조 때부터이다. 한양군이 양주로 바뀌고 본래 양주 땅이었던 내소군은 견주(見州)로 바뀌었다. 이때 지주사(知州事)가 양주에 설치되면서 견주는 양주의 관할지가 되었다. 995년(성종 14) 전국 12주에 절도사가 두어질 때 양주는 해주(海州)의 우신책군(右神策軍)과 아울러 좌신책군절도사(左神策軍節度使)의 부임지로 광릉(廣陵)으로 호칭되기도 하였다. 1010년(현종 1)에는 물밀듯 쳐들어오는 40만 명의 거란병을 피해 왕이 송도를 버리고 멀리 나주까지 몽진할 때, 양주에 며칠간 머문 일도 있다. 당시 남진하던 거란군이 장단에 이르렀을 때 이곳의 서북단 천험의 요새지 감악산에 군대의 정기(旌旗)와 군마가 있는 것 같이 보여 더 이상 남진하지 못하고 퇴각하게 한 사실을 기록한 완문(完文)이 감악산사당(紺岳山祠堂)에 전해온다.
1012년 양주의 절도사가 폐지되고 안무사로 개편되었으며, 1018년 지양주사(知楊州事)로 강등되었고 견주·사천현(沙川縣: 지금의 양주시 회천면·은현면 일원)·풍양현(豊壤縣: 지금의 남양주시 진건면·진접읍 일원)이 양주의 속현이 되었다. 문종은 양주를 남경(南京)이라 하여 신궁(新宮)을 조영했는데, 이때 견주감무를 별도로 둔 일이 있다. 1308년(충렬왕 34)에는 양주가 한양부(漢陽府)로 개칭되었다. 조선왕조가 한양부에 도읍을 정하면서 한성부(漢城府)라 개칭하고 그 전의 한양부 부치(府治)를 대동리(지금의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 부근)로 옮기고 지주사로 강등시켰다. 1395년(태조 4) 양주부로 승격되었고, 1397년에 다시 부치가 견주(지금의 양주시 양주동)로 이전되었고 그 뒤 계속 양주라 불리다가 1413년(태종 13)에 도호부로 승격되었으며, 1466년(세조 12)에 목(牧)으로 승격되었다. 1504년(연산군 10)에 잠시 양주목이 없어졌다가 1506년(중종 1) 양주목이 부활되면서 지금의 유양동에 새로운 도시가 마련되었다. 이곳의 해유령(게너미고개)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부원수 신각이 육전에서는 최초로 전승을 거둔 전첩지이다. 1895년에는 한성부 소속 양주군이 되었다가 1896년 경기도 양주군이 되었다. 1922년 군청사가 주내면 유양리에서 시둔면(柴芚面: 지금의 의정부시)으로 이전됨에 따라 양주면이라 개칭되었다. 대표적인 인물로 한말 의병장으로 활약한 윤인순(尹仁淳)·정용대(鄭用大)가 있다.
교육자로는 민족항일기인 1926년 브나로드운동으로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했으며, 광복 후 추계학원(중앙여자중·고등학교)을 설립한 임봉순(任鳳淳)과 1906년 엄비(嚴妃)의 후원을 얻어 명신학교(明新學校)와 숙명학교(淑明學校)를 설립한 이정숙(李貞淑)이 있다.
1946년 파주군 남면이 이 군에 편입되었으며, 1963년 2월 24일에 와부면 조안출장소가 설치되었다. 그 해 이담면(伊淡面)이 동두천읍으로 승격되었고, 의정부읍이 시로 승격, 분리되었다. 화도면의 3개 리와 진접면의 1개 리 및 가평군 외서면의 3개 리가 병합되면서, 수동면이 신설되었고, 노해면(蘆海面)과 구리면 5개 리가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었다. 1966년 7월 1일에 별내면 퇴계원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73년 2월 14일에 동두천읍 광암출장소가 설치되었고, 7월 1일에는 포천군의 탑동리가 동두천읍에 편입되었으며, 구리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79년 4월 30일에 동두천읍 생연·보산·소요출장소와 구리읍 갈매·수택출장소가 설치되었고, 미금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0년 4월 1일에 양주군 관할구역 중 구리읍·미금읍·별내면·진접면·진건면·수동면·화도면·와부면이 분리되어 남양주군이 신설되었고, 별내면의 고산리와 산곡리가 의정부시에 편입되었다. 1981년 7월 1일에 동두천읍이 시로 승격, 분리되었고, 1983년 2월 15일 은현면 상패리가 동두천시로, 백석면 영장리와 기산리가 파주군 광탄면으로 편입, 1985년 10월 1일 회천면이 읍으로 승격, 1987년 1월 1일에 광탄면 기산리 일부가 백석면으로 편입되었다. 2000년 9월 25일 군청사를 의정부에서 현 남방동으로 이전하였고, 그 해 10월 1일 주내면이 양주읍으로 승격하여 2개 읍 5개 면이 되었다. 다시 2001년 10월 1일 백석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3개 읍, 4개 면으로 되었다가, 2003년 10월 19일 양주군이 도농복합시인 양주시로 승격하여 현재의 1개 읍, 4개 면, 6개 행정동이 되었다.
유물·유적
선사 유적으로는 옥정동에 양주 옥정리 선돌(경기도 문화재자료, 1995년 지정)이 있다.
산성으로는 어둔동에서 백석읍 방성리에 걸쳐 있는 양주 대모산성(사적, 2013년 지정)이 있고, 장흥면 삼하리의 노고산 독재동 추사필적 암각문(경기도 기념물, 1987년 지정)이 조사, 연구되었다. 불교문화재로는 회암동의 양주 회암사지(사적, 1964년 지정)에는 양주 회암사지 선각왕사비(보물, 1963년 지정)·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보물, 1963년 지정)·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앞 쌍사자 석등(보물, 1963년 지정)·회암사지 맷돌(경기도 민속문화재, 1978년 지정)·지공선사 부도 및 석등(경기도 유형문화재, 1974년 지정)이 있다. 또한 나옹선사 부도 및 석등(경기도 유형문화재, 1974년 지정)·무학대사비(경기도 유형문화재, 1974년 지정)·회암사지 부도탑(경기도 유형문화재, 1974년 지정) 등이 있다. 그 밖에 고찰로는 장흥면 교현리의 석굴암(石窟庵)과 유양동의 백화암이 있다. 유교문화재로는 유양동에 양주향교(경기도 문화재자료, 1983년 지정)와 양주관아지(경기도 기념물, 1999년 지정), 은현면 선암리의 송질사당(宋軼祠堂), 그리고 조선시대 서예가 안맹담(安孟聃)을 모신 양효공 사우(良孝公 嗣宇)와 죽산안씨 연창위 종가(경기도 문화재자료, 2001년 지정)가 만송동에 있다. 이 밖에도 남면 매곡리의 양주 매곡리 고택(중요민속문화재, 1984년 지정)과 유양동의 어사대비(경기도 유형문화재, 1978년 지정) 등이 있다. 능묘로는 장흥면 일영리에 조선 중종의 비 단경왕후 신씨(端敬王后 愼氏)의 묘인 양주 온릉(사적, 1970년 지정)을 비롯하여 석현리의 권율장군 묘(경기도 기념물, 1972년 지정), 삼하리의 이수광선생 묘(경기도 기념물, 1978년 지정), 광적면 효촌리의 백인걸 선생 묘(경기도 기념물, 1981년 지정), 남면 신산리의 이준선생 묘(경기도 기념물, 1989년 지정)와 전성부원군 이준선생 영정(경기도 문화재자료, 1990년 지정), 덕계동의 송석 최명창 묘역(경기도 기념물, 2002년 지정) 등이 있다. 백석읍 연곡리에는 임진왜란 때 부원수 신각(申恪)이 승첩을 거둔 해유령 전첩지(경기도 기념물, 1977년 지정)가 있으며, 장흥면 부곡리에는 조선시대 도요지인 부곡(釜谷)이 있다. 천연기념물로는 양주 황방리 느티나무(천연기념물, 1982년 지정)가 있다.
무형문화재로는 유양동에는 양주 별산대놀이(국가무형문화재, 1964년 지정), 백석읍 방성리에는 양주 소놀이굿(국가무형문화재, 1980년 지정)·양주 상여·회다지소리(경기도 무형문화재, 1998년 지정), 광적면에는 양주 농악(경기도 무형문화재, 2006년 지정), 나전칠기장(경기도 무형문화재, 1998년 지정) 등이 있다.
교육·문화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는 유양동에 양주향교가 있다. 이 향교는 1401년(태종 1)에 창건되어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나 1610년(광해군 2)에 재건되었고 6·25전쟁 때 일부 건물이 파괴된 것을 1959년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근대 교육기관으로는 일제강점기인 1929년 농촌 청소년에게 새로운 학문을 교육시켜 독립정신 고취와 경제자립을 목표로 개설한 농벗야학당이 지금의 봉양동 내촌마을에 있었다. 이 학당은 내촌동 정귀현(鄭貴鉉)의 집을 빌려 야학당으로 출발하여, 1931년 24평 크기의 교실을 세워 경기도지사의 승인을 얻어 당시 교육에 굶주린 인근 마을의 성인 남녀를 수용하는 등 농촌계몽에 힘쓴 양주시 최초의 사설교육기관이었다. 이 학당의 후원자는 서울기독교청년회 총무로 있던 미국인 바나트와 홍병선(洪秉善) 등이고, 교사진은 윤익선(尹益善)·이형자(李亨子)와 이화여자전문학교 출신의 이귀남, 숭실전문학교 출신의 주휘순(朱輝順) 등이다. 근대에 설립된 학교는 1920년대에 설립된 유양보통학교(1921)·가납보통학교(1927)·송추보통학교(1928)와 1930년대에 설립된 덕정보통학교(1932)·백석보통학교(1932)·삼상보통학교(1935) 등이 있다. 201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32개교, 중학교 10개교, 고등학교 7개교와 서정대학이 있다. 1961년 동두천읍 생연리에 양주문화원이 설립되었으나, 동두천읍이 시로 승격되어 양주시에서 분리되어 나감에 따라 양주시에는 문화원이 없다가 1987년 광적면 가납리에 양주문화원이 설립되었다. 양주문화원은 1987년 10월에 양주시 관내의 유물·유품전시회, 1989년에는 향토문화강좌·유적지순례 등의 행사를 개최하였을 뿐만 아니라 2001년부터 역사문화대학을 개설 운영하여 고장의 문화향상과 민족정신함양에 힘쓰고 있다. 남면 입암리에는 무호정(武虎亭)이 건립되어 궁술연마와 국궁(國弓) 보급에 기여하고 있다. 문화제행사로는 양주 별산대놀이와 양주 소놀이굿의 정기공연이 유양동 양주별산대놀이 전수회관에서 해마다 내·외국의 민속관계학자·학생·일반인 등의 관심 속에 공연되고 있다. 그리고 양주문화원의 주관으로 매년 10월 초순에는 양주문화제가 개최되고 있다.
민속
이 고장의 중요한 민속놀이로는 「양주 별산대놀이」·「양주 소놀이굿」·「줄불놀이」 등을 들 수 있다.
1964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양주 별산대놀이」는 유양동에서 전승되어온 가면극 중의 하나로, 경기도 지방에서 널리 연희되던 대표적인 서민오락의 하나였다. 사월 초파일·오월 단오·유월 유두·칠월 백중과 같은 대소 명절 때 마을의 노천에서 연희되었는데, 8·9마당으로 구성되어 보통 밤 10시에 시작하면 다음날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애오개산대·노량진산대·퇴계원산대·송파산대 등 원래의 산대놀이와는 다른 것이라 하여 별산대로 불려왔다는 「양주 별산대놀이」는 거드름춤과 깨끼춤의 몸짓으로 연극적 요소를 가미하고, 덕담과 재담으로 서민의 애환을 풍자해왔다. 1980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양주 소놀이굿은 일명 「소놀음굿」·「소굿」·「쇠굿」·「마부타령굿」 등으로도 불리는데, 우마숭배와 농경의례인 소멕이놀이에 기원을 두고 무속의 제석거리와 마마배송굿에서 일부 자극을 받아 형성된 굿의 일종이다. 양주시 일원에서 신곡맞이경사굿으로 제석거리에 이어 행해지며, 단순한 농경의례의 무속에서 벗어나 무당과 원마부·곁마부의 대화와 타령으로 진행된다. 줄불놀이는 유양동에서 매년 사월 초파일 밤에 「양주 별산대놀이」와 함께 행해지던 민속놀이이다. 마을 앞 개천가에 줄을 매고 그 줄에 참나무껍질로 만든 숯가루 봉지와 등불을 매단 다음, 숯봉지에 일제히 불을 당겨 불꽃을 내며 타게 했던 것으로 오늘날의 불꽃놀이와 비슷하다. 동제로는 광적면 가납리 능안말[陵內洞] 도락산과 효촌리 회내미[檜村洞] 회곶고개에서 지내는 산신제가 유명하다. 도락산산신제는 능내동의 평안을 기원하기 위해 동네 뒷산인 도락산에서 매년 음력 9월 9일을 기해 거행되며, 제례방법은 회곶고개의 산신제와 동일하다. 회곶고개산신제는 약 200여 년 전 지사를 지낸 이지사(李知事)라는 부자가 마을의 재앙을 막고 복을 비는 뜻에서 지낸 데에서 기원한다. 젯날은 매년 음력 9월 3일인데, 이때가 되면 마을 전체가 정성을 들이고 생기복덕(生氣福德)을 가려 제관 5명을 뽑는다. 선정된 제관은 다른 마을의 출입을 삼가야 하고, 제관의 집에는 금줄을 매어 부정한 사람이 출입하지 못하도록 한다. 제는 자정을 기해 지내는데, 제물과 의례절차는 보통 가례에 준한다.
설화·민요
이 군이 한양과 가까웠다는 지리적 조건 때문인지 왕들이 등장하는 설화가 많고, 이 고장 출신이라는 정렴(鄭磏)·정작(鄭碏) 형제에 관한 이인전설이 여러 편 전승되고 있다. ‘벼락소(沼)’와 ‘갓바위’의 유래와 관련된 「장자못전설」, ‘용소(龍沼)’의 「아기장수전설」, 원각사의 「사찰연기설화」등 많은 설화가 전하고 있다. 정렴·정작 형제의 신통술에 대한 설화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하루는 형제가 어느 마을을 지나다가 보니 한 집에 액운이 낀 것을 알고, 정작이 그 집을 찾아가 “이 집에 화가 닥칠 것이니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화를 피할 수 있을 것이오.”라고 하였다. 주인의 다짐을 받은 정작은 우선 마당에 백탄 열 섬을 쌓아놓고 불을 붙인 다음, 6·7세 된 주인아들을 궤짝에 넣어서 불 속에 던져버렸다. 잠시 뒤 불 속에서는 궤짝이 터지며 구렁이가 타고 있었다. 몇 년 전 이 집 주인의 낫에 찔려 죽은 구렁이가 원한을 갚기 위해 주인의 아들로 태어났던 것이다.
또한, 장흥면의 일영봉(日迎峯)에 얽힌 애틋한 전설이 있다. 중종반정의 결과 연산군이 폐위되고 진성대군이 중종이 되었으며, 그의 부인 신씨(愼氏)가 왕후가 되었다. 그러나 신씨의 친정아버지인 신수근(愼守勤)이 참살당하고, 반정공신들은 죄인의 딸을 국모로 모실 수 없다고 하여 결국 신씨는 친가인 장흥면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그 뒤 신씨는 이곳 일영산에 올라가서 임금이 있는 대궐을 향해 매일 배례했다는 전설이 있다. 또, 걸인이 찾아오는 것이 싫으면 ‘갓바위’의 갓을 벗겨버리면 될 것이라는 노승의 말을 들은 어느 부자가 그대로 시행했더니, 마을이 폐허가 되어버렸다는 「갓바위전설」은 중이 시주오는 것을 박대했다가 마을이 연못으로 변해버렸다는 「장자못전설」의 변이형으로 흥미로운 전설이다. 그 밖에 산신령이 마을의 소를 빌려 감악산 제일봉으로 옮겨놓았다는 「설인귀비전설(薛仁貴碑傳說)」 등 많은 설화가 전한다.
이 고장에는 「시집살이노래」·「바느질노래」·「늴리리야」·「쌍가락지노래」 등 부녀요(婦女謠)가 많이 있고, 「모내기소리」·「논매기소리」·「밭갈이소리」 등의 농업노동요와 「상여소리」·「달구질소리」 등의 의식요, 그리고 「통타령」·「산타령」 등 타령이 있다. 그 가운데 「시집살이노래」는 매우 특색 있고 질이 우수한 부녀요로 문학적 가치가 높은 노래인데, 그 내용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아버님생전 내에모래/어머님생전 내에모래/뭐나뭐나 해여가나/뒷동산에 앞동산에/송기뜯어 송기절편해여가지/뭣에뭣에 담아가나/표주박에 담아가지……/뭐나뭐나 타구가나/앞동산에 뒷동산에/비루먹은 당나귀나타고가지…….”알뜰하고 정성스러운 효심이 진솔하게 나타난 개인창의 노래이다. 역시 부녀요인 「늴리리야」는 “늴늴늴늬리 늴늬리야”라는 후렴이 사용되고 가사는 임을 그리워하는 내용이다. 그 일부를 소개하면 “청사초롱 불밝혀라 잊었던 낭군을 찾아보자/늴늴늴늬리 늴늬리야/믿지 말아 믿지 말아 남자의 마음을 믿지 말아요…….”와 같다. 다음의 「바느질노래」는 부녀자들이 바느질할 때 부르는 기능요이다. 그 내용의 일부는 “양주땅 상품쇠로 바늘 한쌈 달려내여/낮으로면 간수하고 밤으로면 벗을 삼고…….”와 같다. 노동요 중에는 「모내기소리」와 「논매기소리」가 주종을 이루고, 「밭갈이소리」가 약간 전하고 있다. 「모내기소리」의 일부를 보면 “……하나 소리 하는뜻은 일 잘하자는 뜻일세/하나하나 한알기로구나/이논자리 물채좋아 조앙내기를 하는구나/하나하나 한알기로구나/어화우리농부들아 한일자로 늘어서서는 증조식으로 만모를 내세……”와 같이 풍년기원과 부지런히 일할 것을 권하는 내용이다. 가창방식은 선창중답식이다. 가락은 모를 내는 행동에 맞추므로 단조롭고 느리나 작업의 속도에 따라 달라진다. 특이한 「통타령」을 보면 “이통 저통/신통 방통/노방통 금부통……/웃집오줌통 아랫집똥통/우리집 절구통 술집 뜨물통……/큰애기젖통 주정꾼술통/못된놈 심통 설은사랑애통/…….”과 같다.
산업·교통
전 토지의 57.6%가 임야로 산지가 많은 지역이다. 경지는 20.0%, 대지는 4.4%, 도로는 2.9%, 하천은 2.1%, 공장은 3.4%이다. 경지 중 논은 3,197㏊, 밭은 3,034㏊이다. 주요 농작물은 쌀 이외에 채소류로 배추·무·상추·시금치·오이·참외·고추·수박·마늘·파, 특용작물로는 들깨·참깨, 과실류로 배 등이 생산된다. 토지의 2/3가 산지인 이곳에서는 밤이 많이 생산되고 있는데 양주밤은 예로부터 맛이 있기로 알려져 있다. 이 밖에 대추·도토리·은행·잣·포도·버섯도 많이 생산되고 있다. 농가 인구는 전체 인구의 9.6%이고, 제조업 인구는 전체 인구의 18.5%이다. 주요 제조업은 섬유공업·조립공업·비금속공업·식료품공업이다. 장흥면에는 조선시대부터 도자기 제조가 알려져 있는데 현재에도 도자기 공장이 있다. 수도권에 인접해 있고 서울과 교통로가 잘 발달하여 상업 시설의 발달이 미약하였으나 최근 덕정신도시의 개발로 인한 인구의 유입과 옥정신도시 개발·광석신도시 개발사업 등의 추진으로 인하여 많은 인구의 유입이 기대되는 관계로 할인점과 상가들이 계속 들어서고 있다. 이 지역의 재래 정기 시장은 도농복합시의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회천읍의 덕정장과 남면의 신산장이 2·7일, 광적면 가납장이 4·9일에 열리는데, 주요 거래품목은 나물의 취나물종류로 고사리와 채소류의 열무·시금치, 곡물의 콩·참깨 등이 거래되고 있다. 도로는 국도 3호선이 중심부를 남북으로 지나고 있는데 이 도로는 1970년대 4차선으로 확장되어 평화로로 명명되었다. 국도 32호선이 장흥면을 동서로 지나 의정부시에서 국도 3호선과 합류한다. 철도는 경원선 철도가 국도 3호선과 나란히 남북으로 지나고 서울 교외선이 국도 33호선과 나란히 서남∼동북진하여 의정부시에서 경원선과 합류한다. 2006년 12월 의정부∼동두천 간 경원선 복선 전철이 개통되어 교통난 완화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관광
이 지역의 중앙부인 낮은 침식구릉지를 북류하면서 흐르는 강화천이 연변에 좁은 충적지를 형성하면서 임진강으로 흘러들며, 지세는 대체로 험준한 산지로 이루어져 산악관광지가 잘 발달되어 있다. 특히, 의정부와 동두천 사이에는 남북주향의 단층이 있는데 단층선을 따라 침식받은 지역이 평탄면을 이루고 있어 주요한 교통로로 이용되면서 주변 관광지가 발달되었다. 명산은 북쪽의 감악산, 동쪽의 칠봉산, 남쪽의 앵무봉 등이 솟아 있고 이들 산지 중앙에는 구릉성 분지가 발달하여 목축지역으로도 적합하다. 또한 산간 계곡이 수려하고 서울과의 교통이 편리한 편이어서 유원지가 많이 발달되어 있으며, 아울러 명산과 고찰을 찾는 관광객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중요한 관광명소로는 도봉산·소요산·불곡산·불암산·수락산·감악산·칠봉산·도락산·마치산·회암사·보광사·송추계곡·기산저수지·광릉수목원·왕숙천·장지못·만장대·수락유원지·수동유원지·삼초원·밤섬유원지·온릉·가남리암굴·남선굴 등이 있다. 그 중 송추계곡은 산수가 맑고 계곡이 길며 서울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어 교외선이 개통된 이후 유원지로서 많은 관광객이 모여들고 있다. 또한, 군의 남동쪽에 있는 도봉산과 만장대는 예로부터 서울을 비롯한 인근 주민들에게 잘 알려진 유명한 관광지이다. 그 밖의 이름난 사적지로서는 장흥면 일영리의 온릉이 있다. 사찰로는 고려시대에 전국사찰의 총 본산이었던 회암사지가 회천면 회암리에 있고,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는 보광사는 백석면 영장리에 있다. 특히 회천면을 중심으로 많은 지정문화재와 지방문화재가 분포되어 있어 많은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소요산은 경기도의 소금강이라 불리고 있는데 철쭉·단풍·폭포가 서로 잘 조화를 이루어 절경을 이루는 명산이다. 산속 깊숙이 2㎞쯤 가면 청량폭포·백운대·옥류폭포·비룡폭포·옥로봉 등이 절경을 이루고 자재암에는 천연약수가 석굴에서 솟아나오고 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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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전유적유물지명표』(김원용,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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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1917)
양주시(www.yangju.go.kr)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도락산(道樂山)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방성리와 덕계동, 은현면 도하리·용암리, 광적면 석우리·가납리 등지에 걸쳐 있는 산.명칭
유래
도락산(道樂山)은 두락산(頭落山), 돌압산(突壓山), 돌압산(突押山), 돌앞산, 노락산으로도 불리었다. 이처럼 여러 이름으로 불린 배경에는 몇 가지 전설이 전해 온다. 옛날 모든 산들이 서울 남산을 향해 가는데 불곡산이 가로막고 길을 내주지 않았다. 그래서 화가 나서 덕계리 동쪽 방향으로 돌아앉아서 이로부터 돌악산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돌악산이라는 이름은 도락산 정상에 있는 바위와 관련이 있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즉, 돌이 많은 악산이란 뜻으로 돌악산으로 부르다가 도락산으로 변하는 과정에서 돌압산, 도락산, 두락산, 노락산과 같은 이름이 나오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와 다른 전설도 있다. 고려 건국 후 지관(地官)을 시켜 송도(松都) 근처 500리 이내의 산천을 돌아보게 했는데 도락산만 송도를 향해 머리를 조아리고 예를 드리는 모양이라고 해서 고려 시대에는 충신산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이 한양에서 건국되고 다시 한양 근처 500리 이내의 모든 산을 답사하도록 하였는데 오로지 도락산만 한양을 배반하고 있다 해서 조정에서 산의 머리[山頭]를 치게 했고 그로 인해 산의 머리가 떨어져 두락산이 되었다고 한다. 이런 전설이 전혀 근거가 없지는 않다. 고려 건국을 지지하고 조선의 건국을 반대한 세력들이 바로 이 도락산 주변 지역에 많이 살았음을 반영하는 이야기일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부터 약 200여 년 전에 두락산이라는 이름이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두락산과 음이 비슷한 도락산으로 개명하여 지금에 이르렀다고 한다. 도락산이란 이름은 18세기 중반의 기록에서부터 등장하며, 『해동지도(海東地圖)』[1760]에는 돌압산으로 기록되어 있다. 『팔도군현지도(八道郡縣地[1767~1776], 『동국여도(東國輿圖)』[1801~1822]에도 돌압산(突壓山)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1861], 『대동지지(大東地志)』[1864]에는 돌압산(突押山)으로 한 글자만 다르게 적혀 있다. 그러다가 20세기 초부터 다시 도락산으로 기록되어 있다. 1924년에 간행된 『신편조선지지(新編朝鮮地誌)』부터 도락산으로 나와 있다. 이런 전통에 따라 현재 국토지리정보원[구 국립지리원]이 발행하는 5만분의 1 지형도에도 도락산으로 표기되어 있다.
자연 환경
북쪽 양주시 은현면 지역으로부터 시계 방향으로 회정동·덕계동·산북동, 백석읍, 광적면이 에워싸고 있어 실제로 은현면과 백석읍은 물론 양주시의 진산(鎭山)이라 할 수 있다. 소요산과 감악산 줄기가 남쪽으로 뻗어 내리다가 양주시 일대의 분지에서 하나의 낙맥(落脈)을 이뤄 서울 북쪽의 명당을 만들어 낸 곳이 양주시 백석읍과 은현면이다. 이 지역은 북으로 신천과 한탄강을 두르고 있으며 연천군의 산악 지대와 서울특별시를 잇는 중간 거점이기도 하다.
현황
도락산의 높이는 439.8m이며, 산세가 대단히 크다. 불곡산과 함께 양주시와 수도권 등산객들에게 꽤나 알려져 있다. 도락산의 북쪽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채석 작업이 이루어져 산세의 많은 부분이 훼손되었으나 여전히 웅장하고 수목이 울창하며 빼어나다. 도락산 정상에서 남쪽으로 불곡산이 건너다보이며 현재 정상에 송전탑이 있다. 도락산의 서북쪽인 양주시 광적면 가납리 새낭골과 흔덕골, 백석읍 방성5리에서 산 정상으로 오를 수 있다. 양주시 회천2동에서는 저수지 옆으로 관음사(觀音寺)를 끼고 올라간다. 포장도로를 따라가다가 중간에 도락산으로 오르거나 여기서 조금 더 가서 지장사(地藏寺)를 기점으로 산을 오르면 단거리로 정상에 다다를 수 있다. 주로 도락산 북편에 대장암(大藏岩)·선경암(仙敬岩)·사모암(紗帽岩)·깃대봉[旗臺峰] 등과 같은 아름다운 봉우리가 있다.
참고문헌
『양주군의 역사와 문화유적』(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양주군, 1998)
『양주 땅이름의 역사』(양주군·양주문화원, 2001)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2022-09-08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