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 장 회개에 대한 평가와 회개자들에게 주는 위로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고후7:11)
- 고린도후서 7:11의 회개의 일곱 가지 결과에 비추어 스스로를 진지하게 평가해보라
1. 주의함
그리스어로는 “세심하게 주의함”, “모든 죄의 유혹을 조심스럽게 피함”을 뜻한다. 참된 회개자는 모세가 뱀을 피해 달아나듯 죄를 피해 달아난다.
2. 자신을 깨끗이함
그리스어로는 “변호”이다. 아무리 주의를 기우려도 우리는 유혹의 힘으로 인해 무심코 죄에 빠질 수 있다. 이처럼 죄에 빠졌지만 회개하는 영혼은 그 죄로 인해 양심이 곪도록 놓아두지 않고 스스로를 심판한다. 그는 주님 앞에서 눈물을 쏟아 내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비를 간청하고 용서를 얻어낼 때까지 떠나지 않는다. 이제 그는 양심이 깨끗해져 사탄을 상대로 자신을 변호할 수 있다.
3. 의분
회개하는 마음은 죄에 대해 강하게 반발한다. 의분은 죄로 인해 안절부절못하는 마음의 상태이다. 회개자는 스스로에게 화를 낸다.(시73:22) 우리가 죄로 인해 싸울 때보다 더 하나님께서 우리로 인해 기뻐하시는 때는 없다.
4. 두려움
회개자는 죄의 쓴맛을 보았으므로 두려움이 많다. 그는 생명보다 소중한 하나님의 사랑을 잃을까 두려워한다. 마음이 부드러워졌지만 회개의 눈물이 얼어붙어 또 다시 죄안에서 굳어질까 두려워한다. 늘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은 복을 받는다.(잠28:14) 회개하는 사람은 두려워서 죄를 짓지 않지만 은혜 없는 사람은 죄를 짓고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5. 열망
회개의 쓴 풀은 열망을 자극한다. 회개자는 죄에 대항하는 더 큰 능력을 열망하고 죄로부터 해방되기를 열망한다. 그는 죄에서 해방되고자 한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주랴”(롬7:24) 그는 바울과 같이 외친다.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열망한다.
6. 열정
열망과 열정이 하나가 되어 보여주는 사실이 있으니, 참된 열망은 열정적인 노력으로 결실을 본다. 회개자의 열정은 영광의 추구를 재촉한다. 열정은 어려움을 만나 저항함으로 대범해져서 위험을 짓밟고 지나간다. 회개자가 어떠한 낙심과 반대에도 굴하지 않고 신실한 슬픔을 꿋꿋이 유지할 수 있는 것도 열정 때문이다.
회심 이전의 바울은 미친 듯이 성도들을 적대하는 자였으나 회심 이후에는 그리스도로 인해 미친 자라는 소리를 들었다. “바울아 네가 미쳤구나”(행26:24) 열정은 우리의 신앙적 의무에 활력을 부여한다. 두려움이 죄를 억제하는 고삐라면 열정은 신앙의 의무를 재촉하는 박차이다.
7. 응징
참된 회개자는 거룩한 적개심을 가지고 자신의 죄를 추적하고, 두 눈을 잃은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복수하듯 죄를 죽이려 한다. 자신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 하나님의 참된 자녀는 그분의 명예를 더럽힌 죄들을 무엇보다 강하게 응징하고자 한다.
오른손으로 교황의 문서에 서명한 크랜머는 화형을 당할 때 그 오른손을 먼저 불 속에 넣어 자신을 응징했다.(1536년 옥스퍼드에서 화형당할 때) 마리아는 음란한 시선으로 죄를 지었지만, 이제 그녀는 두 눈을 응징하여 그리스도의 발을 눈물로 씻겨드린다. 그녀는 남자들을 끌어드렸던 그 머리카락으로 이제 주님의 발을 닦아 드림으로써 응징한다.
회개의 복된 열매와 결실이 이와 같으니, 스스로 평가해 우리의 영혼에 이와 같은 일곱 가지 결실이 있다면 우리는 마침내 전혀 후회할 것이 없는 그 회개에 도달한 것이다.
- 깊이 회개한 이들에게 당부의 말을 하고자 한다.
회개는 반드시 필요하고 좋은 것이지만, 회개에 너무 많은 가치를 부여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교황주의자들은 두 가지 오류를 범하고 있다.
첫째, 그들은 회개를 성례전으로 삼는다.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회개를 성례전으로 삼으신 바가 없다. 회개는 외적인 표상이 없으므로 성례전이 될 수 없다. 표상이 없는 성례전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둘째, 그들은 회개를 공로로 여긴다. 이는 중대한 오류이다. 쟁기가 땅을 갈아서 씨앗을 받아들이기에 적합한 상태로 만들어 주지만, 그렇다고 회개 자체에 용서의 공로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 없이는 구원하시지 않지만 회개 때문에 구원하시는 것도 아니다. 회개는 자격이지 이유가 아니다.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죄와 결별할 뿐이며, 따라서 눈물은 죄를 사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피만이 죄를 사할 수 있다. 회개를 믿으면 결국 회개가 구세주가 된다. 회개는 죄의 더러움을 씻어 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지만, 죄 차체를 씻어 내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이다. 그러니 회개를 우상화하지 말라.
- 위로의 말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회개하는 마음을 주셨는가? 여러분이 알아야 할 영원한 위로가 있다.
1. 여러분이 죄를 용서받았다.
용서 받았다는 것은 그 자체로 복이다.(시32:1) 회개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용서를 받았다는 뜻이다. 부드러운 마음 위에 용서가 도장처럼 찍혔다.
회개했는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애초부터 죄를 짓지 않은 자인 듯 보신다. 그분께서는 이제 친구요, 아버지가 되신다. 가장 좋은 옷을 꺼내 입혀 주실 것이다. 탕자의 아버지처럼 달려 나와 목을 부여잡고 입맞춤하실 것이다. 성경에서 죄는 구름에 비유된다.(사44:22) 이 구름이 회개에 의해 흩어지는 순간 용서하시는 사랑이 햇빛처럼 쏟아져 내린다. 마음에서 회개의 샘이 흐르면 하늘에서 자비의 샘이 흐른다.
2. 하나님께서 사면령을 내리실 것이다.
“내가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않겠다”(렘31:34) 베드로가 통곡한 뒤로 그리스도께서 그의 배신을 책망했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결코 알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죄를 바다 깊은 곳에 던지셨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용서하시되 치부책에 기록한 빚을 삭제하시는 채권자로서 용서하신다. 그들의 죄가 언급된다 해서 그들에게 해가 될 일은 없다. 장부에 기록된 죄의 빚이 이미 말소되었기 때문이다.
3. 이제 양심에 평화가 깃들 것이다.
양심은 이제 낙원이 되고, 걱정 없이 거기 앉아 기쁨의 꽃을 딴다. 회개한 죄인은 기도로 담대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분을 심판관이 아니요 아버지로 바라볼 수 있다. 이제 그는 하나님에게서 난 자이며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이며, 그는 약속에 둘러싸여 있다. 그 약속의 나무를 흔들자마자 벌써 열매가 떨어진다.
결론적으로 참된 회개자는 근심 없이 죽음을 바라볼 수 있다. 죽음은 멸망이 아니라 감옥으로부터의 해방일 것이다. 그의 삶은 눈물의 삶이었으니 죽음이 오면 그 모든 눈물이 닦일 것이다. 회개하는 죄인들에게는 이처럼 크나큰 위로가 남아 있다. 회개하기 전에는 “회개”라는 그 쓰디쓴 단어를 견딜 수 없었지만 그 후로는 회개가 말할 수 없이 달다고 루터는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