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4일 일요일 가끔 흐리다. 도서관 안에서 바둑판을 벌리는 사람들도.
오후에 시립도서관에 가서 보았더니, 평일보다도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더 많이 와서 거의 빈 자리가 없었다. 오늘도 여전히 틀림없이 집 없이 방랑하는 무주택자로 보이는 남루한 사람이 들어 와서 멍청하게 앉아 있기만 하였지만 어느 누구도 그런 사람을 곁눈질하거나 쫓아내려는 사람은 없었다. 이러한 이야기를 몇일 전에 민용 형에게 하였더니, 이 도서관보다도 몇 배나 크고 시설도 더 좋은 보스톤 시립도서관에 가보면, 그런 거지꼴을 한 사람들이 더 많이 와서 들끓고 있는데, 다만 밤 중에 그 안에 머물러 자는 것만 금지하지 그 나머지는 하나도 단속하는 게 없다고 한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하루 종일 그 안에서 진을 치고 살면서 그 안에 설치된 사워룸에 들어가서 사워도 하고, 변소 같은 데에 들어가서 음식도 먹는다고 하였다. 참 기이한 풍경이다.
그런데 오늘은 보니 또 다른 풍경이 하나 보였다. 책을 보는 게 아니라 열람실에서 바둑을 두고 있는 사람들이 세 팀이나 보였다. 두 팀은 백인 청년들이고, 한 팀은 동양계의 젊은 여자들이 었다. 이런 곳에서 이러한 오락을 즐기는 것도 허용하는 것을 보면, 이 공립도서관이라는 곳은 꼭 책만 보는 곳이 아니라 아무나 와서 즐기다 가도록 매우 개방된 곳인 듯도 하다.(그러나 지금 내가 더러 가고 있는 대학교의 도서관들 중에는 드나들 때 꼭 열람증을 내어 직원에게 보이든지, 그것을 기계에 대고 끓든지 하여야 하고, 나올 때도 번번이 가방을 열어 보여야 하는 는 데도 있다)
6월 6일 화요일 비. 90노인이 운전을 하고 찾아오시다니
이 보스톤 지역에서 차를 운전하고 가면 1시간 반쯤 걸리는 롱아랜드 주의 뉴포트New Port라고 하는 조용하고 아름다운 항구에 살고 있는 나의 동향 선배 남석철 씨가 차를 손수 운전하여 나를 찾아주었다. 금년에 한국 나이 86세로 젊을 때는 병원의 검사실요원으로 한국이나 미국의 병원에서 근무하던 분이다. 내가 이 보스톤 지역에 와 있을 때 마다, 꼭 한 번씩 자기 집에 데려다가 재워주고, 지역의 특산물인 랍스타를 쪄서 푸집하게 대접해 주는 정이 많은 분이다.
한 6년 만에 다시 만나니, 이제는 정말 많이 늙으셨다. 젊을 때 비하여 키도 많이 줄고, 양쪽 귀에는 보청기를 착용하였고, 또 근래에 양쪽 팔목을 다친 일이 있다고 하면서 아직도 왼쪽 팔목에는 기부스를 풀지 않았는데, 비록 부인이 곁에서 조수노릇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런 노인이 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 몇 백리 길을 운전을 하고서 찾아와 주신다니 정말 고맙고도 불안스러웠다. 보스톤 시내에 있는 서울 설렁탕이라는 상호가 붙은 집으로 모시고가서 점심을 대접하고서 한담을 좀 하다가 작별을 하였다.
우리를 보고서, 이전과 똑 같이, 자기 집으로 내려가서 몇 일을 함께 지내자고 하였으나, 특히 집사람이 노인네들이 손님 대접한다는 것이 쉽지 않을 게라고 극력 사양을 하였고, 나도 가보고 싶은 마음도 없지는 않았지만, 여기서 도서관에 다니는 재미도 쏠쏠하여 사양을 하였다.
몇일 전에 지었던 한시와 같은 각운자를 사용하여 절구 한편을 또 지어 보았다.
〈五月, 美國劍橋有感〉其二
오월 달에 미국의 캠브릿지에서 느낌을 적다. 둘째 수
求居陋屋似沈沈 구거누옥사침침
반 지하실 얻어 거처하니 침침할 것 같기도 하지만,
近接燕京哈佛林 근접연경합불림
하버드대학의 옌칭연구소와는 아주 가깝다네.
東西古今多典籍 동서고금다전적
동서 고금에 걸친 좋은 책들 이 곳에 수두룩 하니,
明明依舊眼開深 명명의구안개심
안목이 밝고 밝아지기를 몇 년전과 꼭 같이 기약하여 본다네.
*누옥: 지금 잠시 거처하는 숙소, 반지하실. 옛날 이승만 대통령이 하버드대학에 유학하고 있을 때 체류하였다고 알려진 여관 건물의 반지하실임
*연경·합불: Harvard Yenching (Institute)란 말의 한문식 표현. 흔히 합불연경학사哈佛燕京學舍라고 적으나, 여기서는 평측을 고려하여 합불과 연경이란 말의 위치를 바꾸어 사용하였음.
*다전적: 하버드 대학의 여러 도서관 중의 하나인 이 옌칭도서관(Harvard Yenching Library)은 중국, 한국, 일본, 베트남 등 동양 여러 나라의 신·구도서는 물론, 여러 가지 서양말로 된 동양학 관련 책까지 두루 구비한 곳으로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음.
*의구: 나는 1999년부터 2000년까지 1년동안 이 연경연구소의 연구협력학자Research Cordinating Scholar란 신분으로 체류한 경력이 있음.